작자 미상, '유주자사 진의 초상', 408, 고분벽화, 남포직할시 강서구 덕흥동 덕흥리고분,  조선유적유물도감(1988~1996),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작자 미상, '유주자사 진의 초상', 408, 고분벽화, 남포직할시 강서구 덕흥동 덕흥리고분,  조선유적유물도감(1988~1996),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작자 미상, '13인의 태수', 408, 고분벽화, 남포직할시 강서구 덕흥동 덕흥리고분, 조선유적유물도감(1988~1996),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작자 미상, '13인의 태수', 408, 고분벽화, 남포직할시 강서구 덕흥동 덕흥리고분, 조선유적유물도감(1988~1996),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덕흥리 벽화고분의 앞방에 그려진 유주자사 진(幽州子史 鎭)의 초상과 그에게 인사드리기 위해 온 태수 13명을 그린 무덤 벽에 그린 그림(고분 벽화)이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남포직할시 강서구 덕흥동(옛 지명은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에 있다. 이 고분은 흙무지돌방 벽화고분이며, 1976년에 발견되었다.

덕흥리 고분에서 서쪽 1.8km되는 지점에 강서대묘, 강서중묘가 있고, 수산리 벽화고분·약수리 벽화고분·보산리 벽화고분·가장리 벽화고분 등 10여기의 벽화고분들도 덕흥리 벽화고분 근처에 산재해 있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발견되기 이전에 이미 도굴되어 남아있는 유물은 거의 없으며, 봉분도 마멸이 심하고, 내부 석실도 일부 파괴 되었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구릉을 파고 반 지하에 조성한 앞방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이며, 무덤 입구에서 앞방까지 널길과 앞방과 널방 사이에 이음길이 있다.

앞방과 널방의 벽과 천장에는 기둥·들보·도리 등 목조가옥의 구조를 그려 놓았고, 내부 공간에는 사람들의 생활과 풍속을 묘사하여, 죽은 사람들이 내세에서도 살아 있을 때처럼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공간을 꾸며놓았다.

덕흥리 고분 벽화 투시도(서쪽에서 동쪽으로 본 모습), 『조선유적유물도감』1988~1996,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덕흥리 고분 벽화 투시도(서쪽에서 동쪽으로 본 모습), 『조선유적유물도감』1988~1996,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덕흥리 고분 벽화 투시도(동쪽에서 서쪽으로 본 모습), 『조선유적유물도감』1988~1996,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덕흥리 고분 벽화 투시도(동쪽에서 서쪽으로 본 모습), 『조선유적유물도감』1988~1996,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덕흥리 벽화고분의 앞방에는 북벽 서쪽에 무덤 주인인 유주자사 진의 초상이 있다.

서벽에는 유주에 소속된 13군의 태수가 유주자사를 배알하기 위해 도열한 모습이 그려져 있고, 남벽 동쪽에서 시작하여 동벽을 거쳐 북벽 동쪽까지 무덤 주인의 행렬도가 있다.

또한 남벽 서쪽의 나뉜 공간에는 막부의 관리들이 정사를 보는 그림이 위아래로 나뉘어 그려져 있다. 이처럼 앞방에는 주로 생전에 관리였던 무덤 주인의 공적인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앞방의 천장에는 사냥 장면, 해와 달 및 별자리 그림, 상상의 동물과 설화의 주인공 등이 그려져 있다.

널길에는 무덤을 지키는 수문장 그림이 있고, 앞방과 널방의 이음길에는 주인 부부가 탄 것으로 보이는 수레와 시종들의 이동 장면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널방의 북벽에도 무덤 주인의 초상이 있는데, 그 옆에 있어야 할 부인의 자리는 그림이 없고 비어 있다. 부인을 그리지 않은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서쪽 벽에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화살을 쏘아 과녁을 통과시키는 놀이인 마사희(馬謝戱) 장면 등이 그려져 있고, 동벽에는 불교와 관련된 칠보행사 등이 그려져 있다.

널방 벽화는 무덤 주인의 일상생활과 생전에 했던 일 가운데 기념할 만한 장면들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앞방의 벽화는 각 벽면의 벽화 내용이 서로 연결되지만, 널방의 벽화는 한 벽면을 두 단 혹은 네 단으로 구획하여 각 면마다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고분은 안악 3호분(357)보다 반세기 늦은 광개토왕 시절에 조성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국력이 가장 강성하던 시기였으므로 덕흥리 벽화고분은 이전에 만든 안악 3호분에 비해 고구려적인 면모를 더 많이 보인다.

이 벽화들은 안악 3호분과는 달리 벽과 천장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부분적으로 박락과 오염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벽화의 상태는 양호하다.

벽화에 칠해진 색상은 갈색을 기본으로 하고 노란색·붉은색·녹색·연두색·백색 등의 안료가 사용되었다.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노란색 계열의 안료와, 연두색, 분홍색, 녹색, 적갈색 안료 등으로 채색하였다.

인물이나 기타 형상들의 윤곽선은 먹을 이용하여 검은색으로 그린 뒤, 붉은 색 선을 겹쳐서 그린 경우가 많다.

덕흥리 고분 벽화는 5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무용총이나 각저총의 벽화보단 기량이 미숙해 보이지만, 활달한 필치에서 생동감이 넘친다.

앞방의 무덤 주인 초상화에서 주인공은 머리에 검은색 내관에 청라관(靑羅冠)을 겹쳐 쓰고 있는데, 이 관은 고구려 대신들이 쓴 관모다.

무덤 주인은 섶이 서로 겹치지 않고 맞닿게 여민 붉은색 도포를 겉옷으로 입고 평상 위에 앉아 부채를 들고 정면을 보고 있다.

이 그림은 안악 3호분의 무덤 주인 초상화 양식과도 흡사하지만, 안악 3호분 보다는 주인공 뒤로 보이는 장방이 좀 더 넓어졌고, 중앙에는 연꽃 대신 화염문과 반원의 법륜 문양을 장식하였다.

또한 주인공을 양옆에서 보좌하고 있는 인물들도 주인과 비교해 크기 차이가 더욱 심해졌는데, 이런 표현방식은 신분적인 위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지배 세력의 힘이 더욱 강해지고 확고해졌음을 알려준다.

당초무늬가 그려진 가리개 뒤로 악사들과 시종 및 관리들을 배치하였는데, 뒤에 서있는 남녀 시종들은 부채를 들고 있으며, 관리들 중 일부는 붓을 들고 무언가 받아쓰고 있다.

덕흥리 벽화고분 앞방 천장의 북쪽에는 무덤 주인의 출생지와 관직명 등을 밝힌 묵서명문이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 사람이며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인 □□씨 진(鎭)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였다.

진은 77세로 수(壽)를 누려 영락(永樂) 18년 무신년(戊申年) 초하루가 신유일(辛酉日)인 12월 25일 을유일(乙酉日)에 무덤을 완성해서 영구(靈柩)를 옮겼다. 주공(周公)이 땅을 상(相)하고 공자(孔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武王)이 시간을 택하였다.

날짜와 시간의 택한 것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유함은 7세에 미쳐 자손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位)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하라.

무덤을 만드는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 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 창고분이나 보관해 두었다.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며, 영원하기를.

(『남북공동 고구려 고분벽화고분 보존실태 조사보고서』 제1권, 문화재청, 2006, 124쪽)

이 묵서는 묘지명(墓誌銘)으로 이를 통해 무덤에 묻힌 사람이 408년(영락 l8년)에 죽은 유주자사 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진은 신도현 출신이며, 관직으로 보아 무관 출신으로 유주자사에까지 오른 광개토대왕 당시의 고위 관료였다.

묵서의 내용에서 흥미로운 것은 무덤 주인 진은 불교신자이지만 지배이념으로 정착된 불교 외에 유교와 도교도 수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 묵서에는 부와 명예가 대대손손 영속하기를 바라는 귀족 지배층의 염원이 담겨있어 신분이 세습되던 당시 사회의 성격도 보여준다. 하지만 무덤 주인인 진이 고구려 출신인지, 중국의 망명객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앞방 서벽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배례하기 위해 온 유주에 속한 13군 태수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태수들은 같은 복장과 같은 자세를 하고 있는데, 유주자사를 향하여 위아래로 도열해 있다.

위쪽의 단에는 연군(燕郡)·범양(范陽)·어양(魚陽)·상곡(上谷)·광녕(廣寧)의 태수들과 대군내사(代郡內史)가, 아래쪽의 단에는 북평(北平)·요서(遼西)·창려(昌黎)·요동(遼東)·현도(玄兎)·낙랑(樂浪)·대방(帶方) 등의 7군 태수가 나란히 서있다.

이들 앞에는 유주부의 관리와 시동도 아래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태수들은 꼬리가 뻗은 책형의 관모를 쓰고 있으며, 황색 도포형의 관복을 입었고, 두 손을 소매 안에 넣어 가슴에 모으고, 허리를 약간 굽혀 읍하는 자세로 북벽의 자사를 향하고 있다.

명문에는 13명의 태수들이 유주관아에 내조(來朝)하여 자사를 배알하고, 자사가 부임한 데 따른 축하 인사와 사업 보고를 한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있고, 또 유주에 속하는 군과 현의 행정구역이 밝혀져 있다.

무덤 주인이 입고 있는 옷에 비해 태수들이 입은 황색의 의상은 넓은 붓을 사용하여 대담한 붓질로 채색하였다.

안악 3호분은 ‘동수’가 죽은 해가 357년이라는 묵서명이 발견되긴 했지만,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 무덤의 조성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덕흥리 벽화고분은 409년에 무덤의 입구를 막았다는 명문이 있어, 무덤의 조성 연대가 확실히 밝혀진 고분이다.

따라서 덕흥리 벽화고분은 4~5세기 무렵에 조성된 고구려 벽화고분들의 편년을 설정하는데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또한 벽화의 각 장면마다 내용을 설명하고, 관리들의 명칭과 지명 등을 표시한 명문이 있어 5세기 고구려의 문화 및 사회, 제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전호태, 사계절출판사, 2000)

고구려 벽화고분(전호태, 돌베개, 2016)

남북공동 고구려 고분벽화고분 보존실태 조사보고서 제1권(문화재청,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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