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9월 하늘은 맑고 높다.

대전에서 7시 30분 출발. 자동차에 월명암을 입력하고 왔는데 종착지는 터널로 안내한다. 터널을 나갔다 차를 돌려 내변산 공원안내소에 도착하니 9시다.

광장 식수대에서 물을 채우고 세봉, 관음봉 쪽으로 오르려다 월명암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조금 걸어 까마귀베개나무를 지나고 멸종위기식물원에 실거리·미선·모감주·이나무를 심어 놓았다.

바로 길 너머 실상사 목탁소리가 맑다.

묘각에서 유래된 모감주나무가 절 집과 잘 맞는다. 여름철 빗물에 떨어지는 꽃이 마치 황금색 비와 같다고 해서 골든 레인 트리(golden rain tree), 근심을 없애는 무환자(無患子)나무 식구다.

열매로 염주를 만든다고 염주나무,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보살(bodhisattva 菩提薩陀, 구도·수행자)을 묘각(妙覺), 염주를 이르는 주(珠)를 붙여 묘각주에서 모감주, 무환자가 모감주로 굳어졌을 것이다.

빨간 열매를 매단 누리장나무와 월명암 오르는 바위길.
빨간 열매를 매단 누리장나무.
빨간 열매를 매단 누리장나무와 월명암 오르는 바위길.
월명암 오르는 바위길.

병풍처럼 둘러싼 봉우리들

누리장나무 열매는 붉고 실상사 입구의 빨간 꽃무릇과 대금소리가 애절함을 더한다.

꽝꽝나무가 있는 봉래교를 지나니 마치 대포처럼 꽝꽝 터지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얼마나 난리에 시달렸으면 불에 타는 나무소리를 대포소리로 알고 줄행랑 쳤을까?

나무 모양이 회양목과 비슷한데 제주, 거제, 보길도 등에 자라고 부안 중계리 군락지는 생육한계지역으로 알려져 천연기념물이다.

어긋나는 잎은 반질반질 열매는 검고 3미터쯤 낮게 커 정원수로 심는 상록수다.

생강·때죽·미선·이팝·층층·산딸나무들과 어울리며 자연보호헌장 탑에서 잠시 머문다. 9시 45분 갈림길, 월명암은 오른쪽이다.

밤·쇠물푸레·굴피·팥배·상수리·소나무, 조릿대·진달래·청미래덩굴·며느리밥풀·닭의장풀이 바위산길 따라 자란다.

10시경 전망 좋은 소나무 바위(월명암1.2·자연보호헌장비0.8·직소폭포1.7킬로미터)에 앉아 잠시 땀을 닦는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하얗고 하늘이 주인인지 구름이 주인인지 풍경 한 번 되게 좋구나. 한 잔 없어 아쉽지만 사과 한입 베어 물고 병풍처럼 둘러선 변산의 봉우리들을 바라본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이 유희경(劉希慶)을 위해 지었다는 “이화우(梨花雨)”다.

의병을 이끌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서울로 가 소식 없자 시를 짓고 수절했다. 매창은 선조 때 부안의 이름난 기생으로 자는 천향(天香).

호는 매창(梅窓). 계유년에 태어나 계생(癸生)·계랑(癸娘)이라 불렀고 유희경·허균과 문우였다.

개성 황진이와 명기쌍벽, 허난설헌을 더해 조선3대 여류시인이었으며 부안읍에 매창공원이 있다.

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를 송도삼절이라 하듯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 부른다.

매창의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였다니 소나무 아래서 바라보는 저 산의 구름도 멈춰서 하늘이 곱다.

화필 배꽃 피는 봄날에 헤어졌는가?

이별의 아픔을 더하면 상사병도 거룩해 진다더니 명원(名媛)은 서른여덟에 죽는다.

시와 거문고에 뛰어나 무덤에 거문고를 같이 묻어주었다.

열여덟에 유부남 시인 유희경을 만났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문학동인 “풍월향도”를 만들었는데 나도 “수레자국”을 만들었으니 문우가 될까? 기타라도 같이 묻어주면 좋겠다.

월명암.
월명암.
전나무와 삽살개.
전나무와 삽살개.

바위길 나무 난간대를 지나 드문드문 노간주나무, 오르는 길에 반가운 예덕나무, 굴참나무 이파리 뒷면은 더욱 희다.

어느덧 월명암 뒷산에 서니 곰소, 관음봉, 직소폭포가 멀고 작살·여자·소사·팥배·당단풍·서어·소태나무들이 눈앞에 있다.

소태나무 줄기는 새까만데 이파리는 모감주·굴피나무를 섞은 것처럼 보인다. 월명암으로 가는 길은 대팻집·쪽동백·나도밤·노린재·까치박달나무들이 호젓함을 달래준다.

목탁소리 점점 가까워 오니 10시 40분 월명암에 닿는다. 오래된 전나무 아래 삽살개 누워 눈만 껌벅거리며 대체 반겨주질 않는데, 절집마당의 구절초와 빨갛게 핀 꽃무릇에 셔터를 누른다.

앞으로 탁 트인 곳엔 중국 어느 산처럼 높이를 자랑하듯 저마다 우뚝우뚝 솟았다. 법당엔 염불소리 낭랑하고 백일홍으로 부르는 배롱나무 더욱 붉으니 내 마음도 어찌 붉지 않으랴?

오호라, 여기가 바람을 감춰 산으로 둘러싸인 장풍국(藏風局) 명당 아니던가?

월명낙조라 해야겠지.

월명암(月明庵)에서 하룻밤 지내겠다는 생각이 꿀떡 같다. 이곳에서 둥실 떠오르는 달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라 부설거사는 어느 마을에서 하룻밤 묵게 된다.

그 집에 묘화라는 딸이 절세미인 벙어리였다. 이날 밤 부설을 본 딸이 갑자기 말문을 열더니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부설은 묘화와 남매를 낳고 도를 닦는다.

세월은 흘러 신문왕 때 부설거사는 월명암 근처에 부설암을 지었다. 부인을 위해서는 묘적암을, 아들 등운에겐 등운암을, 딸 월명을 위해서는 월명암을 지어주니 일대에 불교가 번창하였다.

어느덧 어미를 닮아 재색을 겸비한 월명에게 처사가 치근대니 오라비 등운이 들어주라 했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되자 아궁이에 밀쳐넣어 죽인다. 염라대왕이 남매를 잡아들이게 하나 이미 득도해서 잡아가지 못했다 한다.

동해 일출은 낙산사 홍련암이고 서해 낙조는 월명암 아니던가? 계단 쪽으로 낙조대, 남여치 가는 정겨운 길을 두고 11시경 다시 걷는다.

“달빛 젖은 삼학도 옛 전설의 한이 서려, 파도 소리만 철썩철썩 바람만 한들 부네, 어이야디야 랏차 어야디야~”

외변산의 밤 바닷가에 앉아 노래를 부르던 지난 5월은 잊을 수 없다. 어둠, 술, 등대, 파도, 섬, 친구……. 밤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노랫소리에 숨죽이고 있었으니 이보다 더한 낭만이 어디 있던가? 변산 바윗돌 사이 예덕나무도 바닷바람에 잘 어울렸다.

직소폭포.
직소폭포.
줄포만.
줄포만.

그 무렵 정부청사에서 고속도로 2시간 반을 달려 고창 청보리밭의 봄 경치를 담던 시절……. 등대지기, 모나코를 틀어주던 남도찻집의 추억. 해질녘 격포에서 곰이 물 마시듯 큰 잔으로 들이키던 조개안주가 일품이었던, 그리하여 곰소는 내게 고유명사가 아닌 형용사로 남았다.

바다와 합류되는 물 먹는 지형으로 곰의 소(늪沼) 아니던가? 언제나 물이 마르지 않으니 온갖 물산(物産)이 기름진 곳이다. 오래된 조개탕에 아침식사를 그르쳤던 기억 빼고는 좋았다.

30분 더 내려와 다시 자연보호탑(내소사4.5·월명암2·내변산주차장1.4·직소폭포0.9킬로미터)이다. 땀을 닦으며 직소폭포 쪽으로 걷는데 저수지 물이 많이 줄었다.

고추나무 잎을 닮고 대추나무 껍질과 비슷한 윤노리나무를 한참 살피면서 어느덧 재백이 다리까지 왔다. 합다리나무 하얀 수피와 붉은 회나무 열매가 대조적이다.

12시 30분경 바위에 앉아 어젯밤 대전 퓨전레스토랑에서 남겨온 피자 몇 조각과 빵, 사과 두 개로 배고픔을 채운다. 저마다 산봉우리들은 높이를 뽐내는데 난형난제(難兄難弟)다.

산세도 물길도 구불구불 휘감아 돌아 그야말로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

오후 1시경 관음봉삼거리(직소폭포2.3·내소사1.3·관음봉0.6·새봉1.3킬로미터) 지나 10분 올라 해발 424미터 관음봉이다. 지난봄에 없었던 표지석을 새로 세워 단장을 잘 해놓았다.

줄포만 일대 갯벌이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고 크고 작은 섬들이 점으로 박혀 있다.

오른쪽으로 새만금 방조제, 더 위로는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 발아래 내소사가 가까워졌다(내소사1.9·원암2.6·직소폭포2.9·세봉0.9킬로미터). 햇볕은 쨍쨍 내리쬐고 가뭄이 심했던지 붉나무 이파리 축축 늘어져 곧 시들 것 같다.

“비는 안 오고. 나무들이 죽을 맛이네.”

20분 오르락내리락 발아래 내소사를 두고 지난 일을 생각한다. 그땐 내소사 일주문에서 전나무, 나도밤나무 길을 걸어 이곳으로 올라왔다. 동그란 열매가 달린 바위에 자라는 식물을 묻는다. 먼저 가던 양박사다.

“글쎄, 많이 본 것인데…….”

수목도감을 들춰보는 열정으로 봐서 그는 역시 박사감이다.

“그래, 꾸지뽕나무 만병통치약이다.”

양지바른 산기슭이나 마을 주변에 자라는데 가지에 가시가 붙어있다. 5-6월에 꽃 피고 암수딴그루다. 열매는 검정색 공 모양으로 익어 먹을 수 있으며 약으로, 잎은 누에에게 먹인다. 잼을 만들거나 술을 담고, 나무껍질과 뿌리는 약이나 종이 원료로 쓴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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