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비봉산 주변에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땅이름을 지었는데 일종의 비보(裨補)인 셈이다.

고아읍 근처 마을에 그물을 쳐 막았다는 망장리(網障里), 목마르니 단물이 흐르는 감천(甘川)이요, 수컷과 놀도록 암컷을 의미하는 황산(凰山), 대나무 열매를 많이 먹으라고 곳곳마다 죽장리(竹杖里), 만발한 꽃에서 온갖 새들과 즐기라며 만화백조(萬花白鳥)의 화조리(花鳥里), 봉황을 맞는 영봉리(迎鳳里), 새들과 같이 춤추라고 무래리(舞來)·무을(舞乙),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주변에 봉란(鳳卵)을 의미하는 야트막한 산을 여러 개 만들기도 했다.

모든 땅이름이 봉황에 맞춰져 있으니 대단한 조상들이라 느낀다.

모든 땅이름이 봉황에 맞춰져

한때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선산출신 기자와 봉황이며 오동나무에 얽힌 지명을 얘기했다.

“땅이름 하나에도 애지중지 했지만 도읍이 되지 못한 건 무엇 때문일까요?”

“…….”

“봉황이 깃드는 오동나무가 없어서 그래요.”

“아니, 오로리가 있어. 골짜기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

“…….”

“제가 알기론 오동 오(梧) 자(字)가 없어요.”

나중에 확인해보니 “벼슬에 나오라 했으나 오로지 나는 여기서 늙어죽는다”고 오로(吾老)리가 됐다는 것.

오동나무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고증(考證)이 필요할 것 같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쇠못을 박았다느니 고을이 한 개 부족했다느니 여러 이야기가 있으나 오동나무 이름만 붙였어도 화룡점정(畵龍點睛) 도읍이 되었을 것이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렷더니

내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오고

밤중에 일편명월만 빈가지에 걸렸어라.” (작자 미상, 출전 화원악보花源樂譜)

오동나무는 가볍고 방습·방충에 뛰어나 상자를 만드는 데 썼다.

천년을 묵어도 오동은 제 곡조를 잃지 않는다고 거문고, 가야금 등 악기 재료로 최고였다. 딸을 낳으면 오동을 심어 혼례 때 장롱을 만들어 주었다.

껍데기는 동피(桐皮)라 해서 치질, 상처, 종기에, 오동잎으로 재래식 화장실 구더기를 없앴고, 10년 정도 되면 목재로 쓸 수 있을 만큼 빨리 자란다.

껍질이 초록색인 것이 벽오동인데 추위에 약하므로 중남부 지역에 자란다. 7월경에 보라색 꽃이 피고 꼬투리 열매는 10월에 익는다.

공해에 잘 견뎌 가로수·정원수로 심으며 열매는 커피 대용으로, 기름을 짜 식용유로도 쓴다.

선산읍 영봉정 숲길.
선산읍 영봉정 숲길.

12시 50분 솔숲을 지나면서 비봉산은 전국적으로 수십 곳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 고을마다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오길 바라는 염원이었을 것이다.

근처에는 땅을 돋아 봉란산(鳳卵山)을 만들고 벽오동과 대숲을 만들어 봉황이 세세연년(歲歲年年) 머물게 했다. 봉황은 신령스러워 새 가운데 으뜸이다.

닭의 머리, 뱀의 목, 거북 등, 물고기 꼬리에 육척으로 오색 찬란 상스러운 빛에 다섯 가지 울음소리를 낸다.

오동에 깃들고 굶주려도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 성인군자가 나면 나타나는데 용·거북·기린과 사령(四靈)이다.

동으로 교리, 서쪽은 노상리 뒷산이 날개 부분이고 현재 선산보건소와 선산출장소를 입으로 친다.

이러한 산세를 보고 “조선 인재 절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했으니 길재, 김숙자,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선생과 동락서원에 배향된 선조 때 문신·성리학자 장현광이 이곳 출신이다.

포은 정몽주를 이은 길재는 고려가 망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쳤고 김숙자는 점필재 김종직의 아버지다. 영남사림의 으뜸 김종직은 외가 밀양에서 났지만 선산이 고향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부자(父子)가 포은·야은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선산은 영남사림파의 중심 역할을 한다. 사림파의 유학사상은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선생으로 이어진다.

“김종직 선생이 밀양에서 났는데 어떻게 선산이 고향이야?”

“아버지 고향이 아들의 고향이다.”

“태어난 곳이 고향이지.”

“생물학적으로 그래.”

“씨앗이 만들어 진 곳.”

사전적 의미는 “태어나서 자란 곳과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하위지는 세종 때 벼슬길에 나가지만 수양대군이 왕위를 뺏은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키자 사육신(死六臣)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 김질의 배신으로 죽음을 당한다.

비슷한 시기에 벼슬에 나선 이맹전도 거창현감 등을 거치나 은둔으로 일생을 마친다. 어쨌든 이 지역에 벼슬아치가 많이 나서 조선시대에는 장원방(壯元房)이라 불렀다.

도읍이 되지 못한 터, 멀리 낙동강, 금오산.
도읍이 되지 못한 터, 멀리 낙동강, 금오산.

저 멀리 묵호자(墨胡子)가 저녁놀에 금 까마귀를 보고 지은 금오산이 흐릿하게 다가온다.

대통령 부친의 무덤이 있다는 금오탁시(金烏啄屍) 명당! 금오는 태양 속 세 발 까마귀 삼족오(三足烏=太陽) 아니던가?

경부고속도로 건너편 천생산이 안산(案山)인데 주검이 누운 형국이라 까마귀가 발복한다는 것이다.

시체를 쪼는 금오탁시 형국은 제왕의 터, 부귀(富貴)명당이지만 고난과 위험이 따른다고 한다. 그래선지 생사를 가르는 우여곡절을 많이 겪지 않았던가?

내려가는 길은 등산로가 아니라 산책길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오솔길처럼 다져진 길이 걷기에는 좋다.

옆으로 30~40년 된 소나무, 리기다소나무, 상수리, 신갈나무가 섞여 자라고 숲은 보기 좋게 가꾸어 놓았다.

나무장승도 아주 큼직하게 세워서 든든하다. 산 앞으로 멀리 보이는 곳에 오동나무를 무리지어 심어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후 1시, 보건소 주차장으로 다시 걸어오면서 나는 학생시절 교과서 표지에 기불탁속(飢不啄粟)을 적어놓고 청춘을 지나왔지만 지금까지 품격을 잃지 않고 살았는지 뒤돌아본다.

<탐방로>

● 전체 10.6킬로미터, 3시간 50분 정도

선산보건소 주차장 → (20분)하위지 유허비 → (1시간)두꺼비 닮은 바위 → (20분)형제봉 정상 → (40분)갈등고개(임도 갈림길) → (1시간)영봉정 → (20분)소나무 숲 → (10분)선산보건소 주차장

* 눈 쌓인 길, 두 사람 걸은 평균 시간(기상·인원수·현지여건 등에 따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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