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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10-27 19:53 (화)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㉒] 구국에 앞장선 의병장 김면(1)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㉒] 구국에 앞장선 의병장 김면(1)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09.19 0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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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전환점, 성주성 전투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한창이던 1592년 8월 18일 늦은 밤, 경상도 성주성 외곽에 있는 한 막사에서 장수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경상도 의병대장 김면, 경상도 의병좌장 정인홍, 전라도 의병대장 최경회, 운봉현감 남강, 구례현감 이춘원 등이 성주성 탈환을 위해 전략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호남과 호서 지방에서 패한 왜군이 성주성으로 모여들고 있소. 우리가 성주성을 점령하면 왜군의 근거지가 사라지므로 지리멸렬해질 것이오.”

김면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힘이 서려 있었다. 그의 갑옷 사이로 굵은 땀방울이 연신 흘러내렸다.

“이번 전투는 향후 전세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야 합니다. 좋은 전략이 있으면 서슴없이 이야기 해봅시다.”

지난 6월 의병대를 발족한 이래 김면은 한 번도 갑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자나 깨나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었다.

50대 초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다 평소 잔병치레가 잦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는 김면의 모습에 장수들은 숙연해졌다.

“성문이 열려야 성을 점령하기가 수월합니다. 선봉대가 기습공격을 감행해서 왜군을 밖으로 유인한 다음, 매복하고 있던 아군이 열린 성 안으로 침입하는 전략을 취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거 괜찮은 방법인 것 같소이다.”

정인홍의 제안에 다른 장수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럼, 기습은 언제 하는 게 좋겠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내일 새벽에 감행하지요.”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적이 우리의 계략을 눈치 채기 전에 빨리 해치웁시다.”

“선봉대는 우리 부대가 맡겠습니다.”

앞다투어 말하는 장수들의 얼굴에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루 빨리 조국 산천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말겠다는 굳은 결의로 가득했다.

“좋소. 선봉대는 내일 새벽 기습 작전을 감행합시다. 나머지 부대는 성 주변에 은밀하게 매복해 있다가 선봉대가 왜군을 유인해서 성문이 열리면 성 안으로 진격합시다.”

말을 마친 김면은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위로 다른 장수들의 손이 포개졌다. 장수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각자의 얼굴을 둘러보는 그들의 두 눈은 왜군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김준민이 이끄는 선봉대가 성주성 앞에 나타나 활을 쏘면서 공격을 했다. 왜군의 응수가 이어졌다.

그런데 왜군은 좀체 성문을 열지 않고 성 안에 머문 채 방어만 했다.

지금까지 왜군은 전면에 나서서 싸우는 전술을 주로 사용했다. 이는 왜군의 주 무기인 조총의 위력을 최대한 높이는 전술이었다.

조총은 조선 관군과 의병대가 보유한 궁시(弓矢: 활과 화살)보다 사정거리와 살상력이 월등하게 뛰어났다.

때문에 넓고 탁 트인 지형에서는 조총을 주 무기로 한 왜군의 승산이 훨씬 높았다. 궁시를 주 무기로 하는 아군은 험한 지형에서 매복전을 펼쳐야 승산이 높았다.

그런데 성산성의 왜군은 성 밖으로 나와서 전면전을 펼칠 생각은 하지 않고 성 안에서 방어전만 구사하고 있었다.

저녁 늦게까지 아군이 여러 차례 공격을 하면서 유인했지만 왜군은 성문을 굳게 닫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아군의 피해만 늘어나고 기습공격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적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끈질깁니다.”

그날 저녁, 다시 막사에 모인 장수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놈들이 우리 작전을 눈치챈 걸까요?”

“그럴 리가… 우리 기세에 겁을 먹은 겁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요?”

이런 저런 말들을 쏟아내던 장수들은 김면을 바라보았다. 두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김면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적이 겁을 먹고 있다면, 우리가 조금만 더 세차게 밀어붙이면 성을 함락할 수 있을 것이오. 내일은 작전을 바꿔서 총공격을 합시다. 모든 병사가 합심해서 성문을 깨부수고 안으로 진격합시다.”

이튿날, 잠도 푹 자고 아침밥도 든든하게 챙겨먹은 병사들을 앞세우고 아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왜군은 여전히 성 밖으로는 나오지 않고 성 안에만 머물면서 완강하게 저항했다. 왜군의 공세를 이겨내면서 한 발 한 발 성문으로 접근해간 아군은 마침내 성문을 깨부술 지점까지 이르렀다.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천 명의 왜군이 조총을 난사하며 몰려왔다. 개령을 지키고 있던 왜군이 성주성의 지원 요청을 받고 달려온 것이었다.

왜군의 갑작스러운 공격과 조총의 위력 앞에서 아군은 속수무책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성 안에만 있던 왜군도 몰려나와서 공격했다. 졸지에 협공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자칫하면 전멸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김면은 후퇴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남긴 채 아군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두고 보자. 내 성주성을 반드시 탈환하고 말 것이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후퇴 명령을 내린 김면은 그렇게 다짐했다. 이날의 패배로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 문제를 따지느라 잠시 내분이 있었다. 그러나 갈등은 금세 마무리되고 아군의 결속력을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낙동강에 빠져 죽자!’

전열을 정비한 관군과 의병대는 그해 9월 10일 다시 성주성 공격에 나섰다. 거듭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왜군은 여전히 성문을 걸어 잠근 채 성안에 머물면서 조총으로 응사를 했다. 첫 번째 공격의 실패를 복수하겠다는 마음만 앞선 나머지 아군은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2차 공격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두 차례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면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군의 피해도 이미 상당했다. 더 이상의 피해 없이 성주성을 함락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김면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성주성 공략을 위한 작전을 차근차근 수립해갔다.

마침내 12월 초, 김면은 또다시 성주성 탈환에 나서기로 했다.

“옛말에도 모든 일은 삼세번이라고 했소. 이번에도 성주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앞서간 동지들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나부터 낙동강에 빠져 죽겠소.”

출정을 앞두고 병사들을 집합시킨 김면은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굳은 표정을 한 병사들도 저마다 가슴 속으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망정 결코 져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12월 7일, 김면은 병사를 이끌고 성주성을 향해 진격했다. 부하 장윤으로 하여금 군사 일부를 데리고 개령으로 가서 지난번에 기습공격을 했던 왜군을 견제하도록 했다. 개령으로 간 장윤은 왜군 200여 명을 처단하고 아군 포로 400여 명을 석방시키는 쾌거를 거두었다.

지난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아군이 나타나자 성주성을 지키고 있던 왜군은 뜻밖에도 성문을 열고 돌격대를 보내 공격을 해왔다.

잠시 성 밖으로 나와서 공격을 하던 왜군은 다시 성 안으로 숨어버렸다. 이른바 치고 빠지기 작전을 벌인 것이었다.

그것이 아군을 자극했다. 어디 한번 제대로 걸려봐라. 이번에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

12월 14일 아침, 아군은 성주성을 포위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왜군도 성문을 열고 성 밖으로 나와서 대항했다. 아군과 왜군이 전면전으로 맞붙기 시작한 것이었다. 초반에는 아군이 밀렸다. 사상자도 조금씩 늘어갔다. 그러나 아군은 이 자리에서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무장하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군의 기세에 왜군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왜군 사상자도 점점 늘어났다. 그러던 중 적장이 중상을 입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을 계기로 왜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고 아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2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왜군은 성 안으로 도망가서 성문을 닫고 숨어 버렸다. 꼼짝도 않고 성 안에만 머물면서 한 달을 버티던 왜군은 이듬해 1월 중순, 몰래 성문을 열고 도주해버렸다. 5개월 동안 세 차례의 치열한 전투 끝에 아군은 마침내 성주성 탈환에 성공했다. 피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던 김면의 각오가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조선, 최대의 국란에 빠져들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이어진 임진왜란은 조선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 전쟁이었다.

조선이 감당했던 가장 큰 침략전쟁이었던 임진왜란에서 조총으로 무장한 막강화력의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이었다.

전국적인 의병활동 중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올린 곳은 경상우도였다.

당시 왜군은 경상우도를 먼저 제압하고 전라도로 진출해서 곡창지대를 장악하는 전략을 세웠는데 경상우도 의병의 맹활약으로 차질을 빚었다.

경상우도의 의병이 이처럼 뛰어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재지사족(在地士族: 향촌사회에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배계급, 넓은 의미에서는 양반)의 존재 때문이었다.

16세기부터 토족(土族)의 지주(地主) 성격이 강해지고 사화(士禍: ‘사림이 입은 화’의 준말로 조선 중기에 사림세력이 훈신과 척신으로부터 받은 정치적 탄압)를 겪으면서 낙향하는 관료가 증가했다.

이들은 재지사족을 형성하면서 향촌사회를 주도하는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점점 세력을 다져나간 재지사족은 16세기 후반 사림정권을 창출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을 주도하는 집단으로 활약했다.

재지사족이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에서 기반을 탄탄하게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병을 조직하려면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재력이 있어야 하고 해당 지역 주민들의 지지가 필수였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서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확보하고 있는 재지사족이 의병활동을 주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령 대가야유물박물관에 보존중인 송암실기. [사진 제공=고령군청]
고령 대가야유물박물관에 보존중인 송암실기. [사진 제공=고령군청]

임진왜란 때 가장 두드러진 전과를 올린 3대 의병장으로 정인홍(鄭仁弘:1536~1623), 김면(金沔: 1541~1593), 곽재우(郭再祐: 1552~1617)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경상우도 출신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이었다.

1592년 4월에 곽재우가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에 자극을 받은 김면과 정인홍은 곽재우보다 2개월 뒤인 그해 6월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 세 의병장은 함께 연합전선을 펴는 등 서로 협조하면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지금까지는 홍의장군 곽재우의 의병활동이 널리 알려져 왔다.

하지만 당시 의병의 규모와 전과, 그리고 중앙정부의 평가 등을 검토해보면 김면의 의병활동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곽재우가 이끌었던 의병은 2000여 명이고 정인홍이 이끌었던 의병은 3000여 명이었는데, 김면이 이끌었던 의병은 그 둘을 합친 것과 맞먹는 5000여 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의병대 조직에서도 김면은 제일 윗자리인 의병도대장을 맡았고 그 아래에 의병좌장 곽재우와 의병우장 정인홍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면의 활약은 곽재우와 정인홍에 비해 덜 알려져 왔다.

곽재우와 정인홍은 전란 이후까지 생존했지만 안타깝게도 김면은 전란의 와중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때문에 제대로 조명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더구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후손들에 의한 사후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구국의 선봉장으로 빛나는 전공을 쌓았던 김면, 곽재우, 정인홍, 세 의병장을 서로 비교해서 평가하는 행위는 온당하지 않다.

다만, 그동안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김면의 업적을 다시금 되짚어보는 것은 조상의 훌륭한 업적을 올바로 계승하는 의미 있는 일이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문헌

『송암 김면과 임란의병』,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