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김면은 1541년(중종 36년) 4월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양전동에서 아버지 김세문(金世文)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세문은 무과(武科) 출신으로 철산군수(鐵山郡守)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승진을 거듭했다.

경흥부사, 경원도호부사 등으로 재직하면서 오랑캐의 침입을 격퇴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어머니 김씨는 예빈시 판관 김중손(金仲孫)의 딸이었다.

퇴계와 남명의 철학을 두루 이어받다

김면의 본관(本貫)이자 고향인 고령은 원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이었으나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의 침공으로 멸망되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기록하고 있다.

이후 경덕왕(景德王)이 고령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강주(康州: 지금의 경남 진주)에 속해 있다가 고려(高麗) 초에는 경산부(京山府:지금의 경북 성주)에 속하게 되었다.

고령에서 동쪽으로 30리를 가면 현풍이고 남쪽으로 28리를 가면 초계이며 서쪽으로 32리를 가면 합천, 북쪽으로 10리를 가면 성주이다.

고령에서 서울까지는 680리다. 지도상의 위치는 경상도 중앙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경상도를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누면 고령은 우도에 속한다.

서울을 기점으로 영남을 상도(上道)와 하도(下道)로 구분하면 하도에 속한다.

김면을 배향한 도암서원 전경. [사진=고령군청]
김면을 배향한 도암서원 전경. [사진=고령군청]

조선 중종(中宗)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고령의 풍속에 대해 ‘강(强)하고 무(武)한 것을 숭상하면서도 농사에는 부지런하다’고 적고 있다.

지리적으로 낙동강 중류와 하류를 끼고 있는 우도는 좌도에 비해 땅이 비옥해서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유지해왔다.

학문에 힘을 기울여서 고귀하게 되기보다는 농사일에 진력을 다하여 부귀를 누리는 쪽을 택했다.

세조(世祖) 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鄭麟趾)는 고령의 자연환경에 대해 ‘힘을 기울여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물을 끌어들이는 방죽이 있다’는 시를 지었으며, 조선 초기에 이조판서를 지냈던 김효정(金孝貞)은 ‘냇물이 맑아서 잉어와 붕어가 많고 언덕이 넓어서 메벼와 기장이 잘 익었다’는 시를 남겼다.

김면의 성씨인 고령 김씨는 경주(慶州) 김씨에서 시작되었다.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인 김석(金錫)이 의성군(義城君)으로 봉해지면서 의성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김석의 10세손이자 김면의 7대조인 김남득(金南得)이 고령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남득은 고려 후기에 있었던 공민왕(恭愍王) 폐위 음모사건 때 왕위를 보전하는 데 공을 세워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으로 봉해졌다.

고령의 옛 명칭이 고양이어서 이때부터 관향(貫鄕)을 고령으로 삼았다.

여섯 살 때 글을 깨우친 김면은 일곱 살에 가학(家學)으로 『소학(小學)』을, 여덟 살에는 『대학(大學)』을 공부했다.

열 살이 되던 1550년(명종 5년)에는 낙동강 건너 현풍에 사는 덕망 높은 학자 배신(裵紳)을 찾아가서 학문을 배웠다.

배신은 당시 경상우도의 양대 학파였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두루 학문을 익힌 인물이었다.

김면도 스승의 영향을 받아서 두 학파의 학풍을 이어받았다.

그 무렵부터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등과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쌍계사와 용구사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1557년(명종 12년), 열일곱 살이 된 김면은 3월에 삼가례(三加禮)를 행하고 5월에 부호군 이황의 딸과 결혼을 했다.

관(冠)을 세 번 갈아 씌우는 의식인 삼가례는 중국에서 전해져온 네 가지 예습의 하나로 일종의 성인식이었다.

삼가례를 행할 때는 관을 쓰는 사람, 즉 성인식을 행하는 사람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친구 중에서 덕망이 있고 예법을 잘 아는 분을 모시고 절차를 진행했다.

삼가례가 끝나면 아명(兒名)을 버리고 자(字)를 지어 부르며 조상을 모신 사당에 아뢰고 집안 어른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한 다음 잔치를 벌였다.

한편, 김면의 장인인 이황은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자손이었다.

김면과 부인 전주 이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서 적손이 단절되고 말았다.

스무 살 무렵부터 김면은 남명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학문을 익히는 한편 경상우도의 주요 인사들과도 많은 교류를 했다.

스물세 살이 되던 1563년(명종 18년) 『율례지(律禮誌)』 2권을 지어서 스승에게 보여주고 가르침을 받았다.

스물일곱 살이 되던 1567년(명종 22년)에는 재실을 짓고 남명에게 상량문을 부탁했다.

이듬해 8월 남명이 재실을 방문하여 친필로 송암(松菴)이라는 재호를 써주자 김면은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 무렵 아버지가 부임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시신을 고향으로 모시고 와서 장례를 지냈다. 서른두 살이 되던 해에 스승 남명이 세상을 떠나자 제자로써 극진한 예를 갖추고 장례를 지냈다.

서른한 살이던 1571년(선조 4년)에 효렴(孝廉: 효성스럽고 청렴한 사람)으로 추천되어 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서른일곱 살이 되던 1577년(선조 10년)에는 유일(遺逸 : 학문은 높으나 벼슬이 없는 사람)로 추천되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환이 깊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마흔아홉 살이 되던 1589년(선조 22년)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되었으나 곧 혐의가 풀렸다.

남명의 문인이었던 최영경이 역옥사건에 무고되는 바람에 김면과 정인홍 등에게도 혐의가 씌워졌던 것이다.

쉰한 살이 되던 해에 다시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조정으로 나아가서 임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아뢰고 벼슬은 사양한 채 이내 낙향했다. 이처럼 조정의 부름을 거듭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김면은 자신의 심정을 시로 남겼다.

벼슬에 나가거나 물러나는 걸 즐거움이나 근심으로 여기지 마라(莫謂行藏付樂憂)

임금의 은혜를 갚지 못하는 건 신하의 부끄러움일 뿐(君恩未報是臣羞)

재주 없이 공조에 있으면 무슨 쓸모 있으랴(無才工部工懷志)

잦은 병치레로 말미암아 젊은이가 여러 번 청했네(多病中郞屢告由)

엄격하고 명백하게 조사해서 쫓아내야 마땅하나(考績嚴明宜罷黜)

하소연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돌아올 수 있었나니(原情寬恕得歸休)

하늘과 땅이 낳고 기른 무궁한 덕으로(天生地養無窮德)

멀리 영외에서 다만 요년순일을 비노라(徒祝堯年嶺外州)

벼슬을 한다고 즐거운 것도 아니고 안 한다고 걱정할 일도 아니라고 읊으면서 자신의 심정을 헤아린 김면은 이 모든 게 임금의 은혜라고 적었다.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데 병치레를 핑계로 물러나는 자신의 처지를 부끄럽게 여기면서 비록 자신은 조정을 떠나 있지만 나라가 태평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에는 거창 부근 신창이라는 마을을 지나다가 백성들이 다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되어 황폐해진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나라가 파괴되고 집안이 망하니 오랑캐 원수 갚기 바빠서(國破家亡虜報忙)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에 세 번이나 왔네(領軍三度到新倉)

도적 무리보다 우리 병사가 적다고 하지 마라(莫言賊衆吾兵少)

고향을 그리는 백성의 마음을 어찌 감히 잊으랴(思漢民心不敢忘)

이 두 편의 시를 통해 김면의 애국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김면은 3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스승 남명의 출사관(出仕觀)을 이어받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퇴계와 함께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학자인 남명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에 『성리대전(性理大典)』을 공부하다가 “대장부가 벼슬길에 나가서는 아무 하는 일이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는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원나라 학자 허형(許衡)의 글을 읽고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남명은 출세를 위한 학문은 포기하고 유학의 본령을 공부하는 것에 전념했다.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채 오로지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길러내는 일에만 몰두했다.

스승의 사상을 이어받은 김면도 향리에 은거하여 학문 연마와 강학 활동에 애를 쓰는 한편 정구, 김우옹, 박성, 문위, 곽준 등 인근의 학자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

특히 정구와는 여러 편의 시를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격려하는 등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오래 산중에 머물던 흰 구름(久淹山中之白雲)

홀연 푸른 구름으로 변해 나가네(倏然變作靑雲出)

사람들아 본래부터 무심하다 말하지 마라(世人休道本無心)

날 저물고 하늘 흐리면 돌아와 해를 받들지니(歲暮天陰歸捧日)

성주 출신의 정구는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퇴계와 남명의 문하에서 두루 배운 인연으로 김면과 교류하게 되었다.

위의 시는 1584년 정구가 동북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자 그가 강학을 하던 성주를 지나면서 김면이 읊은 것이다.

한가롭고 욕심이 없는 흰 구름 같았던 정구가 멀리 떠나감을 아쉬워하는 한편, 나라가 어지러울 때 큰일을 해낼 인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를 조직한 김면은 3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차단함으로써 전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김면의 의병활동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먼저 당시 경상우도 의병의 활약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김면, 곽재우, 정인홍, 3대 의병장이 주축이 된 경상우도 의병의 공적은 크게 네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킴으로써 다른 지역의 봉기를 촉발했다.

둘째, 조선 수군이 남해에서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필요한 배후기지를 제공해주었다.

셋째, 낙동강과 진주성을 잘 지킴으로써 왜군이 호남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으며, 호남이 보유하고 있던 군수품과 민간물자의 수송 및 보급을 원활하게 했다.

넷째, 왜군을 상대로 기습, 야습, 유인전을 펼쳐서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한편, 민관군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상호협조 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공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했을 때 경상우도의 의병대가 임진왜란을 극복해내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김면이 왜적을 물리치고 궁중보물을 되찾은 개경포너울길 입구. [사진 제공=고령군청]
김면이 왜적을 물리치고 궁중보물을 되찾은 개경포너울길 입구. [사진 제공=고령군청]

경상우도의 의병을 주도한 세력은 재지사족이었다.

재지사족의 근본은 사림(士林)이었다.

조선시대의 사림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순절하거나 낙향한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세력이었다.

사림세력은 화담학(花潭學)과 율곡학(栗谷學)을 중심으로 한 기호사림과, 퇴계학(退溪學)과 남명학(南冥學)을 중심으로 한 영남 사림으로 나눌 수 있다.

화담학은 모순된 현실에서 벗어나 안빈낙도하는 삶을 추구했다.

율곡학은 모순된 현실을 용인하면서도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개혁을 모색했다.

퇴계학은 우주를 이루고 있는 이(理)와 기(氣)의 가치를 분별하고 대립적 관계를 인정하여 이의 지배를 지향하면서도 기를 소멸의 대상을 여기지 않았다.

남명학은 이(군자)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선악이 혼재하지만 악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은 기(소인)를 궁극적으로는 소멸해야 할 존재로 인식했다.

화담학이 현실도피의 처사적 삶을 지향하고, 율곡학은 적극적인 현실 타협 경향을 보이며, 퇴계학은 원칙을 중요시하면서도 현실에 탄력적으로 대응했다면, 남명학은 확고한 가치분별의 자세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남명학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은 선악의 구분이 너무나 분명한 상황이었다. 선(조선)을 지키기 위해서 악(일본)은 확실하게 척결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남명학을 계승한 김면, 곽재우, 정인홍이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서 누구보다도 맹렬하게 의병활동을 벌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면은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해 4월 19일부터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면, 4월 초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김해, 창원, 창녕, 현풍, 성주, 추풍령을 거쳐 북상하는 우도로,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선산, 상주, 조령(새재)을 거쳐 북상하는 중도로, 울산, 경주, 영천, 군위, 조령을 거쳐 북상하는 좌도로 등 3개의 경로로 조선을 침공했다.

파죽지세로 북상한 왜군은 순식간에 서울과 평양을 점령했다.

전란 초기 왜군이 이처럼 빠르게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은 무방비 상태로 적을 맞이한 조선의 실책 때문이었다.

왜군이 너무 빨리 북상해 지나쳐버리는 바람에 합천, 의령, 거창, 진주, 함양, 영덕, 청송, 안동, 봉화, 영주, 예천 등 경상좌우도의 여러 지역은 침범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이 지역들은 당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주로 활동하던 곳으로 재지사족이 탄탄하게 기반을 잡고 있었다.

때문에 재지 사족을 중심으로 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많은 백성들이 이에 호응함으로써 적극적인 의병활동이 이루어졌다.

김면이 고령에서 처음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을 때는 전쟁에 대한 공포로 다들 도망가고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4월 22일에 창과 몽둥이로 무장한 건장한 하인을 중심으로 100여 명이 모였다.

이후 계속 인원이 늘어나서 700여 명에 이르자 더 많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 김면은 5월 11일 고령을 떠나 거창으로 향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의로운 뜻을 품고 있던 거창의 선비와 백성들이 속속 모여들어서 6월에는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김면은 곽준, 문위, 윤경남, 박정번, 류중용 등을 참모로 삼고 정식으로 의병대를 발족했다.

김면의 의병대는 이듬해 1월 5천여 명으로 늘어나서 당시 함께 활동했던 곽재우와 정인홍의 의병대를 합친 것과 맞먹는 규모가 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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