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당시 의병대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고 있었다. 지도부는 재지사족, 이른바 지주들이었다.

이들은 애국충정의 마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집안과 땅을 지키기 위해서 의병대를 일으켰다. 각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일반 백성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생활터전을 지키고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의병대에 참여했다.

산에서 사냥을 하거나 약초를 캐며 생활하던 사람들도 대거 의병에 가담했다.

이들은 외적에 대한 적개심과, 식량문제도 해결하고 전공을 세우면 지금과 같은 천한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의병에 참여했다.

의병대에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지못해 참여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 노비들이었다.

노비들은 지주에게 강하게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주가 의병을 일으키면 반 강제적으로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김면이 고령에서 처음 모은 700여 명의 의병도 대부분 노비 출신이었다.

민관군의 힘을 하나로 모으다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활동이 긍정적인 측면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관군과 의병, 의병과 의병 간의 대립으로 인해 충돌이 일어나는 적도 있었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겪다 보니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해서 오해를 빚거나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경우였다.

경상감사 김수(金睟)와 곽재우가 대립한 사건은 관군과 의병이 갈등을 빚은 대표적인 경우였다.

김수는 왜군이 동래성과 부산성을 잇달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자 적극적인 방어계책을 마련할 생각은 포기한 채 임금을 모셔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

이로 인해 김해가 쉽게 함락되고 연이어 영남의 방어선이 차례로 무너졌다.

이에 격분한 곽재우는 김수를 ‘망국의 대적’으로 규정하고 당장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통문을 영남 각지에 보냈다.

곽재우는 김수가 다시 순찰사로 부임하자 그가 저지른 여덟 가지 죄목을 적은 격문을 휘하의 관군에게 보내 김수의 목을 베도록 촉구했다.

김수의 부하에게 김수를 죽이라고 권유하는 글을 보낸 것이었다.

곽재우의 글을 보고 화가 치민 김수는 초유사 김성일에게 곽재우는 역적이므로 당장 체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닫자 김성일은 곽재우를 달래기 위해 의령의 유격장으로 임명하는 한편 사태의 전말을 임금에게 보고했다.

선조는 곽재우가 자신의 세력을 믿고 김수를 모함하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조정의 대신들은 전란이 한창인데 섣불리 어느 한쪽을 단죄하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다고 간언했다. 선조는 김성일에게 두 사람을 화해시킬 것을 명했다.

김성일은 곽재우에게 “의병을 일으켜서 큰 공을 세운 마당에 엉뚱한 일로 화를 키우면 모든 걸 그르치게 되니 자중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며 달랬다.

김수의 부탁을 받은 김면도 곽재우에게 편지를 보내 설득에 나섰다.

“우리와 같은 백면서생이 조정의 명령 없이 의거를 했을 때 우려되는 것은 의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처사의 정당성을 잃는 것이오. 일을 잘못한 자의 죄를 물어서 목을 치는 것은 의기는 당당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순리로 공적을 세우는 일에서 벗어나는 일이오. 이만하면 곽공의 의기는 널리 알려졌으니 이제 다시 힘을 모아 왜적을 몰아내는 일에 앞장섭시다.”

김성일의 거듭된 충고와 김면의 논리적인 설득에 마침내 곽재우는 자신의 주장을 접었다. 김수도 임금에게 곽재우의 공을 적극 아룀으로써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만약 이때 곽재우가 옳고 그름만 앞세워서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면 관군과 의병 양측의 사기를 고려해서 김수와 곽재우는 함께 처벌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가리되 현실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김면의 중재로 일은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때의 경험 때문인지 곽재우는 김면에 대해 “엄숙하고 의연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 데다 행동도 차분한 면모가 있다.

왜적을 소탕하고 영남을 보전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하면서 깊은 신뢰를 나타냈다.

김면과 정인홍도 갈등을 빚은 적이 있었다.

성주와 현풍에 주둔한 왜군이 낙동강을 따라서 목책을 설치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인홍은 깊은 밤에 습격하면 적을 섬멸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부하 손인갑에게 활 잘 쏘는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출동하라고 명했다.

동시에 김면에게는 지원병을 보내달라고 연락을 했다. 그러나 김면 휘하의 참모들은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병사의 출동을 반대했다.

김면은 정인홍에게 그 뜻을 전했으나 손인갑이 이끄는 병사들은 이미 출동을 한 뒤였다. 결국 정인홍의 기습작전은 성공하지 못했고 손인갑은 김면이 후원하지 않은 탓이라고 분개했다.

초유사 김성일이 금산과 지례의 왜군을 막기 위해 정인홍으로 하여금 우마현을 지키라고 했다.

그런데 정인홍은 김면의 동태를 살피다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일은 정인홍에 대한 김면의 반감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1592년 8월에는 두 사람이 연합해서 성주성을 치러 갔는데 왜군의 방어가 만만치 않아서 지지부진했다.

이에 대한 책임 소재를 두고 양측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 와중에 정인홍의 문하생으로 주축을 이룬 참모들이 스승의 공적을 높이 부각하기 위해서 김면의 공적을 왜곡하고 폄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정인홍이 김면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차츰 쌓여가면서 김면과 정인홍의 사이는 점점 벌어졌고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같은 문하 출신이어서 합동작전도 펴고 사이도 좋았던 두 사람이 결국 완전히 등을 지게 된 것이다.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었던지 김면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정인홍은 문상을 오지 않았다.

정인홍 측에서는 왜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지만 김면 측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태도를 보였다.

김면과 정인홍의 갈등은 그들을 따르는 세력들의 경쟁심리가 부추긴 측면도 있다.

당시 경상우도에는 퇴계학과 남명학이 깊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

김면처럼 두 문하를 함께 드나든 사람과 정인홍처럼 남명 문하만 드나든 사람들 사이에는 미묘한 대립이 있었다.

결국 전자는 남인(南人)으로, 후자는 북인(北人)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해서 의병대를 조직할 때도 김면 휘하에는 남인이, 정인홍의 휘하에는 북인이 모여들었다.

김면과 정인홍은 경쟁관계에 있던 두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여러모로 서로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정인홍은 김면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위였다. 김면은 곽재우보다 열한 살 위였으므로 정인홍은 곽재우보다 열여섯 살이나 위였다.

그런데 의병대 직책은 김면이 대장이고 정인홍은 그 밑에서 곽재우와 나란히 포진하는 꼴이 되었으니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을 것인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재난 앞에서 모두가 극도로 긴장하고 흥분하고 두려움에 빠져 있던 상태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빚어진 갈등이었다.

김면 의병대의 빛나는 전공들

김면은 1592년 6월에 의병대를 발족해서 이듬해 3월 순국할 때까지 약 8개월 동안 3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했다.

그중 역사에 남을 만한 전공을 세운 전투는 무계, 개산포, 우척현, 지례, 사랑암, 그리고 앞서 소개한 성주성 등 여섯 개에 이른다.

무계 전투는 1592년 6월 6일 낙동강변 무계진 나루터에서 벌어졌다.

왜군이 군량을 운반하기 위해 무계진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면은 정인홍과 합세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선봉장 손인갑이 50여 명의 병사와 함께 기습을 하여 왜군 진지를 유린했다. 이 전투에서 왜군 100여 명을 처단했으며 왜장은 중상을 입었다.

개산포 전투는 같은 해 6월 9일부터 6월 10일까지 고령에서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낙동강변의 개산포 나루터에서 벌어졌다.

6월 9일 오전 8시경 왜군 선단이 현풍에서 낙동강 하류 쪽으로 내려왔다. 이를 발견한 황응남이 30여 명을 이끌고 화살을 퍼부어 왜군 80여 명을 사살했다.

배에 타고 있던 왜군은 겨우 두세 명만 남고 모두 사망했다. 이 전투에서 적선 2척을 포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우척현 전투는 같은 해 6월 15일경 고령에서 북쪽으로 15리 정도 떨어진 소백산맥 중턱의 우척현 고개에서 벌어졌다.

지례에서 거창으로 들어가는 접경지에 있던 우척현은 경상도에서 호남 지방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개였다.

전라도를 침공하려는 왜군의 낌새를 눈치챈 김성일이 고령에 있던 김면에게 급히 연락을 했다.

김면은 병사 2000여 명을 이끌고 직접 전투에 나섰다.

우천현에 매복해 있던 아군은 왜군이 접근해오자 일시에 협공을 시작했다. 그 기세에 놀란 왜군은 금산 방면으로 패퇴했다.

지례 전투는 같은 해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지금의 김천시 지례면에서 벌어졌다.

금산과 전주로 향하던 왜군 수천 명이 지례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면은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이 전투는 그동안 매복 위주의 작전을 구사했던 김면 의병대가 대규모 공격전으로 전환한 전투였다.

의병대는 지례의 사창, 객사, 관아 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포위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는 화공전을 펼쳤다. 이 작전으로 많은 왜군을 섬멸하고 지례를 회복할 수 있었다.

사랑암 전투는 같은 해 8월 3일 거창에서 전라도로 가는 길목인 사랑암에서 벌어졌다. 우척현 전투에서 김면에게 패퇴한 왜군은 전라도로 침입하려는 야망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이에 김면은 거창에서 지례와 금산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정인홍은 성주에서 고령과 합천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곽재우는 의령에서 함안과 창령 방면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개령과 금산 방면에서 왜군이 연달아 공격해오자 김성일은 김면으로 하여금 거창, 함양, 산청, 합천 지역의 병사를 모아서 왜군을 막도록 했다.

이에 김면은 진주판관 김시민(金時敏)에게 응원군을 요청했다.

김시민이 병사 1천여 명을 이끌고 거창으로 오자 마침내 사랑암 앞에서 아군과 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김면과 김시민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전진으로 들어가서 왜군을 무찔렀다.

김면이 왜군을 좇으면 김시민이 활을 쏘아서 맞추고 김시민이 왜군의 앞을 막으면 김면이 그 옆을 쳤다.

두 사람의 눈부신 활약에 아군은 승승장구했고 왜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 기세를 몰아 왜군을 지례까지 밀어냈다.

김면의 전공이 쌓여가자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 치하했다.

1592년 6월 선조는 김면을 합천군수로 임명하는 교서를 내렸다.

“김면은 남들보다 앞서 자진해서 도적을 치겠다고 마음을 졸여 몇 달에 걸쳐 수천 명의 병사를 모았으니 의로운 기운이 감동스럽고 열사들이 행동을 같이 함이다. 정진에서 싸워 도적들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으며 무계에서 도적을 무찌르니 떠내려가는 주검이 강을 메웠다. 관군은 붕궤하고 의병은 승리하는구나. 마침 명나라가 가련히 여겨 용감한 장수들이 명령을 받들고 와서 미친 도적들의 행패에 천벌을 가하리니 너희들은 다시 힘을 내어 한결같이 충성하기를 바라노라.”

같은 해 9월, 선조는 김면을 장악원 정으로 임명하고 얼마 뒤에는 첨지중추부사로 승진시켰다.

11월에는 의병대장으로 임명해서 경상도의 군사를 통솔하도록 했다.

“외로움은 오랑캐를 물리침이 급해서 이보다 소중한 것이 없으며, 충성함은 제 몸을 잊고 나라에 목숨 바침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명령을 받아서 그 책임을 다함은 신하가 해야 할 일이요 벼슬자리에 있음에 정성을 바치는 것 또한 직분의 마땅한 일이다. 감독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힘쓰며 재촉하지 않아도 어려움에 나아가니 그를 일러 충신열사라 할 수 있으리라. 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공리만 가지고 되겠는가. 직책이 있어야 할 것임에 밝은 충의의 마음을 생각하여 삶과 죽음이 달린 절박한 때에 김면을 경상도 의병대장으로 임명하노라. 깊은 원수를 갚고 나라 회복함을 너 아니고 누가 하겠는가.”

이처럼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전공을 쌓아가던 김면은 1593년 1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선조는 특별히 선전관을 보내 격려했다.

“명나라 병사들이 평양에서 이겨 승승장구함에 도적들이 틈을 타서 도망을 가니 경은 정예의 병사들로 하여금 길을 막아 도적을 무찔러 한 놈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여러 진영에 유지를 보내 장군과 사졸들이 마음을 모으고 용기를 내어 군기를 어기지 못하게 하라.”

님은 스러졌어도 푸른 정신은 길이 남으리

1593년 2월 김면은 호남과 호서의 아군과 함께 금산으로 가서 개령과 선산의 왜군을 무찌를 계획을 세웠다.

요충지에 병사를 매복하는 등 세부적인 전략을 세우고 있던 중 돌연 병에 걸려서 3월 11일 진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참모로 있던 곽준과 문위가 직접 염습을 해서 3월 24일 고령 칠동 선산에 안장을 했다.

당시 감사로 있던 김성일은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서 이렇게 아뢰었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는 본래 병이 잦아서 산림에서 조섭을 했는데 왜란이 일어나자 먼저 분기를 내어 몸을 돌보지 않고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도적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해를 넘겨가며 삶과 죽음을 헤아리지 않고 싸워 도적의 선봉을 여러 번 꺾어 고령, 지례, 금산을 차례로 수복했습니다. 지금 강우 일대를 보존한 것은 모두 그의 공입니다. 오랫동안 지례의 진중에 있으면서 여름을 나고 겨울을 지냄에 비바람과 눈서리를 맞으면서 죽을 줄을 알고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히 나라를 걱정하는 그 정성의 빛남이 붉은 빛과 같습니다.

몸소 군사들을 독려하고 금산과 개령의 지경에 군사를 주둔하고 선산에 있는 도적과 겨루어 도적이 매우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경내에 있는 여염집을 다 불태우고 도망간 흔적이 뚜렷했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을 썩인 나머지 끝내 역질에 걸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군중에 있는 장성이 한번 무너짐에 삼군이 모두 눈물을 머금었습니다. 하늘이 어찌하여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합니까.”

선조는 크게 탄식하면서 김면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글을 지어 추모하게 했다. 1607년(선조 40년)에는 선무원종공신의 예우와 함께 이조판서로 추증했다.

1666년(현종 7년)에는 고령을 비롯한 인근 유림이 뜻을 모아 고령군 쌍림면 칠등리에 도암서원(道巖書院)을 세워서 김면의 학문과 덕행을 기렸다.

김면 유적지와 신도비.
김면 유적지. [사진 제공=고령군청]
김면 신도비.
김면 신도비. [사진 제공=고령군청]

생전에 김면이 얼마나 청렴결백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의병대를 이끌고 있을 때 가족이 10리 밖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구국이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한 번도 돌보지 않았다. 선산을 지날 때는 주변에서 제를 올리자고 제물을 준비했다.

그러나 “주상께서도 능침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데 내 어찌 감히 공적인 것을 받아서 사사로이 내 선조에게 바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물리친 김면은 글을 지어 조상의 무덤에 바치는 걸로 대신했다.

“나라가 불행하여 섬 오랑캐가 침입하여 포악하게 굴어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임금께서 서쪽으로 피난하셨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분발하여 혼자 편히 있을 수 없어 항병을 불러 모아 향리를 보전할 계획을 세우고 급한 것을 먼저 하고 급하지 않은 것은 뒤로 하여 거창으로 가서 지켰으나 지키는 장수의 공이 별로 없어 도적이 쳐들어오게 하여 흉한 불길에 타는 바람에 구업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충성과 효도를 온전히 하기가 어렵습니다. 제사도 지낼 수가 없고 해를 넘겨 고을을 지켰습니다. 지금 고향 산천을 지나며 선영을 바라보고 절하오니 호천망극(昊天罔極)입니다.”

고령 출신으로 퇴계와 남명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유학자였던 김면은 벼슬을 욕심 내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마와 후학 양성에 몰두한 참 선비였다.

쉰두 살의 늦은 나이에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빠지자, 병약한 몸을 이끌고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의병대를 조직해서 치열하게 싸웠다.

여러 차례 빛나는 전공을 세워서 경상도 의병대장과 경상우도병사에 임명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전란의 와중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의병을 일으킬 때는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하고 포호했던 김면은 “나라가 있는 줄 알았지 내 몸이 있는 줄은 몰랐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평생 무욕의 삶을 실천하면서 오로지 나라만을 걱정하고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았던 김면의 선비정신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참고문헌

『송암 김면과 임란의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진 제공_ 고령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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