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기이한 꿈이었다. 흰 구름이 종루(鍾樓: 종각)를 감싸고 있는데, 그 구름 속에서 용이 나와 종각 기둥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이었느니라.”

선조 임금은 어복(御服)을 들고 들어온 내관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무슨 일이 있는지 종루에 한번 가보라고 분부했다.

내관이 즉시 종루로 달려갔는데, 특별한 것은 없고 시골에서 올라온 사내가 코를 드렁드렁 골며 자고 있을 뿐이었다.

종루에서 용이 나다

내관은 사내를 깨워서 누구기에 거기서 잠자고 있는 것인지 물었다.

사내는 곤한 잠을 깨운 내관을 귀찮은 눈길로 쳐다보았고, 과거를 보러 올라온 진주 정씨 금계공파 15세손 무수(茂壽)라고 대답했다.

내관은 정무수에게 아무쪼록 과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길 바란다고 덕담을 해주고 돌아섰다.

곧바로 궁으로 돌아가서 임금을 알현하고는, 무과에 응시하러 상경한 정무수라는 자가 종각에서 자고 있었다고 아뢨다.

“그래? 만일 그 자가 급제하거든 내게 데려오라.”

임금이 분부했다.

정무수는 그 며칠 후 치러진 무과에 급제했다. 내관은 급제자 명단에서 그 이름을 확인하고 그를 찾아서 임금께 데려갔다.

“네가 이번에 무과에 급제하였다고 들었다. 자고로 무관이 능력을 발휘해 큰 공을 세운다는 것은 나라가 혼란스럽다는 뜻이므로 내 너에게 큰 공을 세우라고 말하지는 못하겠구나. 하지만 항상 너를 눈여겨볼 것인즉. 너를 기억하기 위해 특별히 이름을 지어주고 싶구나.”

임금은 정무수에게 ‘기룡(起龍)’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586년(선조 19년)의 일이었다.

정기룡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크고 긴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육상의 이순신(李舜臣)으로 불리며 수많은 전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경상우도(慶尙右道: 낙동강 서쪽)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상주와 성주, 추풍령, 울산, 사천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는데, 명령으로 군사를 다스리는 다른 장수들과 달리 칼을 들고 가장 앞장서서 직접 싸웠다.

그 힘이 맨손으로 소를 때려잡을 만큼 장사인 데다, 자신의 명마를 타고 달리면 비호처럼 빨라서 적의 조총수가 조준해서 사격할 틈이 없었고, 적 기병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숱한 전투를 치르고도 단 한 번 부상을 당한적도, 패한 적도 없었다.

정기룡은 1562년(명종 17년) 경상도 하동에서 증 좌찬성 정호(鄭浩, 혹은 정활鄭活, 鄭成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초명은 무수이며, 자는 경운(景雲)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진주 정씨의 원류는 신라 6촌 중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의 촌장 지백호(智伯虎)이며, 그 후 진주8정(晋州八鄭)으로 갈라졌다.

그중 금계공파는 고려시대 첨정(僉正) 벼슬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8대조 정가원(鄭可願)은 조선 초 우찬성 겸 안주도병마단련사 판덕주사(安州道兵馬團鍊使判德州事)를 역임했다.

정기룡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두 형에게 의지해 살았다.

형의 보살핌으로 1580년(선조 13년) 8월 열아홉 나이에 고성(固城)에서 치러진 향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러나 두 형 중 한 명이 아우 정기룡을 응원하러 시험장까지 따라갔다가 병이 나서 먼저 집으로 돌아갔는데, 갑자기 위중해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기룡은 형을 잃은 슬픔에 과거를 포기하고 허튼 세월을 보냈다.

보다 못한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정기룡을 데리고 상주로 이주했고, 새로운 환경에서 마음을 다잡도록 격려했다.

정기룡은 홀어머니의 정성에 감복하여 정신을 차렸고, 형을 잃은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났다. 문관으로의 입신을 포기하고 무관으로 입신하기 위해 무예를 닦고 병법을 익혔다.

그리고 1585년(선조 18년) 진주에서 가장 부유한 향리 강세정(姜世鼎, 혹은 姜世貞)의 딸과 혼인했다.

새 가정을 꾸린 정기룡은 이듬해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했는데, 원래 타고 태어나기를 글을 읽는 선비보다 병법에 능한 무장의 기질 쪽이었다.

1591년(선조 24년) 좌의정 겸 이조판서 류성룡은 곧 왜침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삼아 북방을 안전하게 한 후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이일을 경상우병사로 삼아 군사를 모집하고 군대를 정비하게 해야 한다며 이들을 천거했다.

그러고는 판윤 신립과 왜의 침범에 대비한 대책을 의논하고 훈련원 교관을 실전에 강한 군관들로 교체했다.

함경도 동북면(東北面) 무관으로 있던 정기룡도 이때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에 발탁돼서 군사훈련에 투입됐다.

1592년(선조 25년) 우려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바다를 건너온 700여척의 왜적 병선은 4월 13일 절영도(絶影島: 지금의 부산 영도)에 상륙했다.

조선군의 주력무기인 화살과 쇠뇌에 비해 유효사거리와 명중률이 탁월한 조총으로 무장한 왜적은 이튿날 동래성(東萊城)을 공격하여 4월 15일 함락했다.

그 다음 소서행장(小西行長: 고시니 유키나가) 휘하의 왜군 제1군은 기장-양산-밀양-대구-인동을 지나 상주로 향했고,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왜군 제2군은 양산-언양-경주-영천을 거쳐 상주로 향했다.

조정에서는 신립을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 경상, 충청, 전라의 3도 총사령관)에 세우고, 전략전문가 김여물을 부사로 세워 급히 조령으로 보냈다.

그리고 경상도순변사 이일에게는 군사를 거느리고 상주로 가서 신립의 군사가 올 때까지 왜적을 막으라고 명했다.

그때 왜장 흑전장정(黑田長政: 구로다 나가사마)이 이끄는 왜적 제3군이 뒤늦게 대마도를 출발해 김해(金海) 죽도(竹島: 지금의 죽림동)에 상륙했고, 김해성을 함락하고 창원에 있는 경상우병영을 격파한 후 영산방면으로 향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조정에서는 강계(江界)에 유배 온 정철을 우대하다가 파직된 전(前) 강계부사 조경을 다시 등용해 경상우도방어사로 삼고 경상우도로 급파했다.

조경이 경상우도로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훈련원봉사 정기룡이 찾아왔다. 조경이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저는 경상도 하동 출신으로, 그곳 지리를 잘 알고 일가친척 친구들이 모두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저를 데려가셔서 저로 하여금 고향 땅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게 그대 같은 사람이 절실한 때에 어찌 알고 스스로 찾아와 주었는가.”

조경은 정기룡을 크게 반겼고, 별장(別將)으로 삼고 함께 경상우도로 향했다.

조경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창녕 근처 고령으로 갔고, 병대가 무너져 도망쳐온 군사를 불러 모아 자신의 군사와 합쳤다.

그렇게 해서 약 800여명의 군사로 새롭게 군진을 짰다.

정기룡은 그중에서 특히 강하고 날쌘 군사를 선발해 돌격대를 구성하고 자신이 돌격장을 맡았다.

왜장 흑전장정은 이때 창녕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현풍을 지나 성주방면으로 진격할지, 아니면 합천을 지나 전주(全州) 방면으로 진격할지 고민이었다. 그래서 선봉대를 보내 어느 쪽으로 진격하는 것이 좋을지 정찰하고 오게 했다.

정기룡 장군 초상화. [사진 제공=상주시청]
정기룡 장군 초상화. [사진 제공=상주시청]

경상우방어사 휘하의 돌격장 정기룡도 날쌘 기병 여덟 명을 차출하여 거느리고 직접 정찰을 나갔다. 적군은 훈련이 잘 돼 있고 준비가 철저한 데다, 기세마저 하늘을 찔렀다.

거기에다 군사의 수도 1만 5천은 족히 돼보였고, 무기까지 좋았다. 그런데 왜적 선봉대가 합천 방면으로 향했다는 목격자가 여럿이었다.

정기룡은 왜적 선봉대를 뒤쫓아서 합천을 지나 거창까지 갔고, 거창읍 객관에 들어갔다가 그만 왜적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정기룡과 여덟 기병은 왜적 여섯 명을 죽이고 말을 탄 채 높은 담을 뛰어넘어 포위망을 뚫었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우리 군사가 겨우 800여 명인데 1만 5천의 왜적을 어찌 상대하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적이 흩어질 때를 기다렸다가 본대와 떨어진 소수를 공격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정기룡이 정찰을 다녀와서 조경에게 말했다.

“그대에게 계책이 있는 것인가?”

“왜적은 선봉대를 보내 진격할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 숫자가 약 500여 명인데, 지금 거창에 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적이 전라도 전주 방면으로 진격할 궁리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적이 후발대를 지금 오게 한 것은 먼저 간 적 제1군과 제2군의 군량을 조달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적은 병선을 타고 왔으므로 많은 군량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또 바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군량을 수송해올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후발대로 하여금 우리 땅에서 군량을 거두어서 먼저 간 제1군과 제2군에 보급할 계획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창녕에서 움직이지 않고 길을 찾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라도는 곡창지대입니다. 적이 절대 그곳으로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적 선봉이 500명이라면 우리 군사로 능히 쳐부술 수 있겠군.”

“하나 적은 조총이 있습니다.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오히려 당할 수 있으니 계책을 잘 세워야 합니다. 제가 돌격대를 거느리고 가서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싸움을 걸다가 적이 총을 겨누면 도망치겠습니다. 적의 조총은 모퉁이 뒤로 숨은 우리 군사를 향해 발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은 우리 군사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반드시 추격할 것입니다. 방어사께서는 길 양쪽에 군사를 숨겼다가 적이 가까이 지날 때 급습하십시오. 저 또한 군사를 돌려세워서 적을 몰아치겠습니다.”

정기룡이 계책을 말했다.

정기룡과 조경은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으로 달려갔고, 왜적 제3군 선봉대가 지나간 길을 뒤쫓았다.

마침내 신창에서 왜적 500여 기병이 막 지나갔다는 민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조경은 왜적이 지나간 산길의 적당한 지점에 군사를 숨겼고, 정기룡은 돌격대를 거느리고 달려가 화살을 쏘고 창을 던지며 적을 뒤에서 공격해 싸움을 걸었다.

적은 조총을 겨누어 정기룡의 군사를 쏘려 했다.

그러자 정기룡은 적의 조총이 불을 뿜기 전 군사를 돌려 모퉁이 뒤로 사라져버렸다. 적이 바짝 추격해오면 군사를 돌려 다시 싸움을 걸다가 조총을 겨누면 달아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곧은길이 나왔다.

왜적 선봉대가 정기룡의 돌격대를 향해 조총을 겨눌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저만치 달아나는 정기룡의 돌격대를 향해 조총을 겨누고 화승(火繩)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화승이 다 타들어가기 전 양쪽 숲에서 큰 함성이 일더니 조선군이 쏟아져 나오며 창칼을 휘둘러 공격했다.

조경의 군사였다.

왜적 조총수들은 급습을 받고 깜짝 놀라서 가까운 곳의 조선군에게로 총구를 돌렸다. 하지만 때늦어서 탄환이 허공을 향해 발사됐다.

조경의 군사가 적을 에워싸고 맹렬히 공격했다.

정기룡도 군사를 돌려세워 왜적을 몰아쳤다. 적의 조총은 가까이 붙어서 싸우는 백병전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조선군의 창칼은 거침없이 왜적의 몸을 베고 찔러 삽시간에 주변 초목을 피로 물들였다. 그 전투에서 정기룡과 조경은 왜적 선봉대 500여 명 전원을 살획하고 무기와 말을 노획해 돌아갔다.

왜장 흑전장정은 정찰나간 선봉대가 돌아오지 않자 오래 머뭇거렸다.

특히 강한 군사로 꾸려진 선봉대가 전멸했다는 것은 그쪽 길이 조선군과 의병의 저항이 강해서 열어 나아가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는 진격로를 변경할까 말까 고민했다.

정기룡은 왜적 영채를 세밀히 살피며 공격 기회를 엿보았다.

소규모의 적 부대가 본대와 떨어져 활동할 때를 기다렸지만 왜적은 조선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좀처럼 영채를 나서지 않았다. 기회가 왔을 때도 조경은 군사의 수를 걱정하며 진군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충주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친 삼도도순변사 신립의 조선 주력군과 경상도순변사 이일의 군사는 왜적과 싸워서 크게 패했다. 신립과 김여물이 강물에 투신했고, 이일은 잔병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조선 주력군을 무너뜨린 왜적 제1군과 제2군은 충주를 지나 한성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하고 있었다.

왜적 제3군의 흑전장정도 드디어 진격로를 결정하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기룡의 예상대로 왜적은 합천 방면의 길을 포기하고 현풍과 성주 방면으로 올라갔다.

가면서 도중에 관아와 민가를 공격해서 군량을 모았다.

정기룡은 조경에게 적이 약탈에 나설 때 공격하자고 여러 번 건의했지만 조경은 결정적 기회가 아니라며 출격하지 않았다.

왜적 제3군은 성주를 지나 김산(金山: 지금의 김천)의 추풍령으로 향했다.

조정에서는 조경에게 왜적이 충청도와 전라도 곡창지대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추풍령에서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추풍령에서 강하게 저항하면 왜적 제3군이 제1군과 제2군이 이미 길을 열어 놓은 상주 방면으로 향하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래야 백성의 피해도 줄이고 곡창지대도 지킬 수 있었다.

조경은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게 됐다. 만일 싸우지 않고 적이 추풍령을 넘게 한다면 문책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정기룡은 추풍령에 올라 높은 지대를 선점한 상태에서 적의 앞을 가로막고 싸우자고 했다.

그러나 조경은 퇴로가 없는 싸움이 부담스러워서 후미공격을 고집했다. 정기룡은 상관의 명령에 감히 더 반대하지 못하고 복종했다.

그런데 추풍령을 앞두고 뒤따르는 조선군이 신경 쓰였던 왜장 흑전장정이 모든 군사를 돌려세우고 총공격을 명하는 바람에 조경의 군사가 왜적에게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당황한 조경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일단 포위를 벗어나야 합니다. 적의 수가 앞뒤로 많고 양 옆이 적습니다. 저희 돌격대가 앞서가며 포위를 뚫겠습니다. 방어사께서는 군사 대형을 유지한 채 뒤따르십시오.”

정기룡이 돌격대를 이끌고 앞서 나아가며 창칼을 휘둘러 적의 가장 약한 곳 포위망을 뚫었다. 그 뒤를 조경의 군사가 따랐다. 그러나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도중 조경이 그만 유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 쓰러져 왜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자료
「정기룡장군 재조명과 선양방안 연구」(이세영, 한규철, 건양대학교), 「정기룡」(국방부 군사편찬연
구소 편집부), 「정기룡장군의 활약상과 주요 전적지」(김덕현, 경상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임진
왜란 연표로 본 정기룡장군」(이상훈,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장
군」(장원철,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사진 제공_ 상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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