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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12-03 20:07 (목)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3)] 전설적 영웅 정기룡 장군(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3)] 전설적 영웅 정기룡 장군(3)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10.24 0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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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정기룡 장군은 뛰어난 전술 뿐 아니라 직접 칼을 들고 싸워서 수많은 적의 목을 벤 전사였다.

대규모 병력을 거느리고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지만 주로 소수의 기병만 거느리고 다니며 다수의 적을 무찔렀는데, 백전백승의 비결은 적의 전략전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계책을 세웠을 뿐 아니라 몸을 사리지 않고 가장 앞장서서 부하들을 이끈 용맹함에 있었다.

전투에 임해서는 부상 입은 부하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데려왔고, 무의미한 전투로 병사의 목숨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래서 병사들이 친형처럼 믿고 따랐기에 소수병력으로도 큰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백성만 생각하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이때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과 무고로 투옥됐다가 사면을 받고 풀려나 백의종군 중이었다.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그러나 쳐들어온 왜적을 감당하지 못해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하고 견내량(見乃梁)에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정기룡은 군사를 거느리고 선산(善山: 지금의 구미) 금오산성(金烏山城)으로 가서 추풍령으로 향하는 길과 상주로 향하는 길을 미리 차단했다. 또 낙동강을 따라 올라온 왜선 200여 척을 공격해서 무찔렀다.

왜장 모리수원(毛利秀元: 모리 히데모토)이 거느린 군사 3만 5천이 성주와 고령 사이로 치고 올라왔다.

보고를 받은 4도체찰사 이원익은 군사를 거느리고 고령으로 가면서 정기룡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지원 할 것을 명했다.

그래서 정기룡은 7월 15일 고령 대마평(大馬坪)으로 달려가서 이원익을 만났고, 녹가전(綠價田)에 진을 쳤다.

왜적은 용담천(龍潭川: 지금의 안림천)에 목책을 세워 진을 치고 있었다.

정기룡은 밤에 척후장 이희춘과 황치원에게 군사 400여 명을 내어주며 적의 동태를 살피고 오게 했다.

이희춘과 황치원은 군사 200여 명씩 나누어 거느리고 거리를 두고 정찰에 나섰다. 그런데 앞서가던 이희춘의 군사가 복병을 만나 기습을 받았다.

황치원은 약속대로 군사를 숲에 숨기고 대기했고, 이희춘은 군사를 돌려서 황치원의 군사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달아났다.

왜적이 추격해오자 숨어 있던 황치원의 군사가 적을 습격했고, 달아나던 이희춘도 군사를 돌려 협공해서 왜적 100여 명의 목을 베고 적장을 사로잡았다.

충의사 전경. [사진 제공=상주시청]
충의사 전경. [사진 제공=상주시청]
충의사에 보관중인 매헌실기 목판본. [사진 제공=상주시청]
충의사 전경. [사진 제공=상주시청]
충의사에 보관중인 매헌실기 목판본. [사진 제공=상주시청]
충의사에 보관중인 매헌실기 목판본. [사진 제공=상주시청]

7월 16일 이원익은 총공격을 명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군과 왜적은 수차례 공방을 주고받았다.

서로 지친 양쪽은 잠시 전투를 중단하고 뒤로 물러났고, 군사들의 배를 불리고 무기를 정비했다. 충분히 쉰 다음 이원익이 다시 총공격을 명하려 할 때였다.

정기룡이 이원익을 찾아와서, “제가 정찰을 다녀보니 이동현(李同峴)고개가 적을 격파하기에 알맞더이다. 제가 적을 유인해보겠습니다. 장군께서는 이동현고개에 군사를 숨기고 기다리십시오”하고 말했다.

“적이 유인에 말려들까?”

이원익이 물었고,

“적장 모리수원은 제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를 믿어주소서.”

정기룡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원익은 정기룡의 능력을 믿었으므로 그 계책에 동의하고 이동현고개로 가서 군사를 숨겼다.

정기룡은 자신의 기병을 거느리고 적진으로 달려갔고, 목책을 불태우고 싸움을 걸어 적 수백 명을 베고 지친 척 달아났다.

왜장 모리수원은 태풍이 몰아치듯 영채를 급습하여 왜적을 마구 베고 달아나는 장수가 정기룡임을 알아보았다.

모리수원은 상주성에서 정기룡에게 대패하고 도망친 왜장 모리휘원의 양자였다. 모리휘원은 정기룡에게 대패한 후 그 분을 이기지 못해 병을 얻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랬기에 정유재란 때 제8군을 거느리고 출사하게 된 모리수원에게 조선에 가거든 자신의 원수를 대신 갚아줄 것을 당부했다.

모리수원은 양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기회라 생각했고, 정기룡을 반드시 잡아 죽이겠다는 의지로 수천의 기병에게 추격을 명했다.

왜적 수천 기병이 진문을 열고 쏟아져 나와 거세게 추격해왔다.

정기룡은 약속대로 이동현고개로 달아났고, 고갯길을 오르다가 돌연 군사를 돌려세우고 깃발을 높이 들었다.

왜적은 뭔가 싶어 멈칫하며 추격을 늦추었다.

그때 숲속에서 북이 울렸고,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일며 조선군이 쏟아져 나왔다. 낮은 지대에 선 왜적은 당황하여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골짜기 양쪽 절벽 위에도 온통 조선군이었다.

조선군은 달아나는 왜적의 머리 위로 돌을 굴리고 활을 쏘았다.

그때 정기룡은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칼을 휘두르며 적장에게 달려들었고, 말 위에서 훌쩍 날아 적장의 말 등에 올라앉았다. 그리고는 칼을 적장의 목에 대고 말고삐를 낚아채 아군 진영으로 돌아왔다.

이 이동현 전투에서 왜적은 수천여 명 중 겨우 500여 명만 살아서 돌아가고 나머지는 모두 죽었는데, 그 시체가 왕릉 같은 높이로 여섯 무더기나 됐다고 한다.

전투가 끝난 후 이원익은, “과연 그대는 명장이다”라고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기룡은 성주(星州)에 군영(軍營)을 두고 군사를 지휘했고, 안음현(安陰縣: 경남 함양군 안의면 일대)으로 달려가서 왜적이 움직이는 길목을 차단하고 싸웠다.

류성룡은 도원수 권율과 충청병사 이시언으로 하여금 경상우도로 가서 정기룡과 군사를 합치고 왜적을 쳐부수게 했다.

정기룡은 한명련과 함께 왜적을 공격해서 19급의 목을 베었고, 다시 권율 휘하에서 왜적과 싸워 24급의 목을 베는 등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자 공이 탐난 충청병사 이시언은 항복한 왜적들을 시켜서 정기룡이 잘라놓은 왜적의 머리를 훔쳐오게 했다.

왜적 머리를 도둑맞았다는 보고를 받은 정기룡은 직접 말을 타고 뒤를 쫓아가서 도둑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이시언은 정기룡이 이원익에게 보고할까 걱정이 돼서 직접 달려와 사과했고, 정기룡은 용서했다.

정기룡은 성주와 고령 등을 돌며 왜적을 소탕했고, 수많은 적의 머리를 베어 이원익에게 바쳤다. 그래서 왜적은 정기룡의 군사가 나타났다는 말만 듣고도 줄행랑을 쳤다.

정기룡은 명나라 제독 마귀와 군사를 합쳐 왜적과 싸우기도 했다. 마귀는 수 차례에 걸쳐 선조임금께,

“의협심이 대단해서 왜적을 잘 사살하니 적을 토멸할 때 손발이 잘 맞습니다”

하고 정기룡을 칭찬했다.

정기룡은 왜적에게 붙어 단성현감으로 불렸던 안득을 사로잡았고, 지리산에 나타난 적을 명군과 함께 공격해서 크게 무찔렀다.

고령으로 진격해서 적을 내몰았고,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고언백과 군사를 합친 후 삼가(三嘉: 지금의 합천)에서 왜적과 싸웠다.

명나라 모국기 선봉장과 함께 통양창(通洋倉: 지금의 사천)을 공격해서 왜적을 내몰았고, 사천선진리성(泗川船津里城)에 숨어 있던 왜적 2급의 목을 벴다.

경주와 울산에서도 적을 내모는 등 60여 차례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모두 이겼다. 특이한 것은 그 휘하의 군사가 수천이었음에도 정기룡은 자주 군사 400~500여 명의 유격대를 거느리고 선봉에서 직접 싸웠다는 점이다.

정기룡은 비록 싸워서 이길 수 있더라도 백성의 희생이 예상되면 싸움을 미루고 백성들부터 피난을 시킨 후 다시 기회를 노렸다.

보은(報恩) 땅적암(赤岩: 지금의 미로면 적암천)에서 가등청정이 거느린 약 1만여 명의 군사와 마주쳤을 때가 그런 경우였다.

당시 소사평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 패한 왜장 가등청정은 군사를 거느리고 적암으로 숨어들었다. 정기룡은 적을 유인하기 위해 본대는 숨겨둔 채 유격대 400여 명만 거느리고 직접 적암으로 추격해 들어갔고, 짙은 안개 속에서 적과 마주쳤다.

비록 적의 수가 많았지만 싸움에 지고 도망쳐 와서 지치고 굶주려 있었기에 싸우면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이 상주 방면으로 퇴각하면 백성들의 피해가 클 것 같았다.

그래서 정기룡은 싸움을 일단 뒤로 미루고 후퇴했고, 상주와 의성 등지의 백성들부터 피난시킨 후 적을 의성 비안현(比安縣) 방면으로 몰아가며 후미를 공격해 격파했다.

전투는 백성을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지 적을 죽이기 위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론이었던 것이다.

정기룡의 60여 차례 전투 중 기록에서 누락된 대부분은 성을 지키거나 왜적을 처부수기 위한 전투가 아닌 백성을 지킨 전투였다.

전쟁이 끝난 후 정기룡은 전공을 인정받아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올랐고, 경상도방어사를 거쳐 김해부사에 제수됐다. 1604년(선조 37년) 경상도 순검어사 유간(柳澗)은,

“김해부사 정기룡은 군사시설과 무기를 잘 정비했고, 가난하고 외로운 백성을 위로하고 도움을 주었으며, 청빈하게 살면서도 그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고 겸허히 받아들였습니다”

라고 치계를 올렸다.

정기룡은 그 후 밀양부사, 중도방어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 등을 역임했다. 1610년(광해군 2년) 상호군에 올랐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삼군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있으며 통영 진중에서 눈을 감았다. 시호는 충의(忠毅)였다.

정기룡은 왜란 중 6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으나 전시의 특성상 그 기록은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다. 1646년 조정융(曺挺融)이 상주군수 재임때 모은 자료로 정기룡의 행적을 정리해 『사적(事蹟)』을 편찬했고, 1718년 증손인 정륜(鄭綸)의 요청으로 채휴징(蔡休徵)이 『연보(年譜)』를 편찬했으며, 1746년 『매헌실기(梅軒實記)』 2권이 간행됐다.

그러나 후대의 자료수집에 의한 기록이기에 전체적 활약을 들여다보기엔 한계가 있다.

상주시에서는 정기룡 탄생일에 충렬사(忠烈祠)에서 다례를 올리는 행사를 거행하고 있으며, 상주성 탈환을 재현하는 행사도 열었다.

<상주극단둥지>에서는 정기룡 장군의 상주성 탈환 이야기를 담은 「용마의 기상으로」를 제작해 공연했고, <충의공 정기룡장군기념사업회>와 <코리아파파로티문화재단>에서는 「정기룡장군 뮤지컬」을 제작해 공연했다.

참고자료

「정기룡장군 재조명과 선양방안 연구」(이세영, 한규철, 건양대학교), 「정기룡」(국방부 군사편찬연

구소 편집부), 「정기룡장군의 활약상과 주요 전적지」(김덕현, 경상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임진

왜란 연표로 본 정기룡장군」(이상훈,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장

군」(장원철,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사진 제공_ 상주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