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생산자가 말하는 와인 페스티벌/시음장에서의 시음 매너

【뉴스퀘스트=이철형 와인 칼럼리스트】 통상 가을이 되면 지구의 북반구에서는 본격적인 와인 페스티벌/시음 시즌이 시작된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다수가 모이는 과거와 같은 축제 분위기를 보기는 힘들 것 같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지만...

북반구의 와인 생산국에서는 지금부터 당분간 포도 수확과 양조로 잔뜩 긴장한 채 작업에 여념이 없지만 양조를 마치고 나면 한해의 수고로움에 대한 위로와 자축의 의미로 생산자의 와이너리나 마을 단위로 공동 시음회가 열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르고뉴에서 찾은 내 인생’이라는 타이틀로 상영된 영화에서 수확 후에 이런 와인 파티를 하는 장면이 등장했었다.

한편 와인 소비국에서는 가을, 겨울의 길목에서 생산자들이 개최하는 와인 시음의 장이 열리기에 와인을 즐길 기회가 많아진다.

와인 유통업자나 소비자 관점이 아니라 와인 생산자 관점에서 그들이 소비자들에게 바라는 와인 시음 매너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궁금하던 차에 2015년도에 필자가 미국 워싱톤주 와인 생산자 협회 초청으로 다녀온 와이너리 중의 하나인 헤지스 패밀리 이스테이트(Hedges Family Estate)에서 보내온 뉴스 레터에 이에 해당되는 재미있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것을 중심으로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것들을 배제하고 개인적인 설명과 사족을 달아 이번 칼럼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1. 와인 잔을 목에 걸어 두지 마라.

와인 페스티벌/시음장에 가면 대개 와인 잔을 하나씩 나누어주면서 보관용 목걸이까 지 주는 경우가 있다. 아주 고마운 일이다.

이것이 없을 경우 필기하거나 사진촬영을 할 때 잔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곤란할 때가 많다.

그런데 이 잔을 목에 걸어두지 말라는 이야기다.

왜? 다양한 와인을 가급적 많이 즐기려면 잔을 목에 걸어 놓을 시간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2. 조금만 달라고 하거나 따를 때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식으로 그만 따르라고 잔을 치켜올리지 마시라. 남으면 스핏통(와인을 뱉는 통)에 버리면 된다. 따라 주는 사람 맘이다.

미안해서인지 아니면 다양하게 다른 와인도 마셔보고 싶어서인지 손으로 ‘쪼끔’이란

표현까지 하면서 ‘쪼끔만 주세요’ 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되는데 이런 겸손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어련히 알아서 와인 생산자가 적당히 따라 준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기왕이면 충분한 양으로 충분히 테이스팅을 해보라는 생산자의 훈훈한 마음이 담겨있는 조언이기도 하다. 게다가 잘못 치켜올리면 잔을 깨거나 와인을 쏟을 위험이 있다.

단, 고가의 와인일 경우에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 또한 명심할 필요가 있다.

3. '여기 와인 중에서 제일 강한 와인. 혹은 부드러운 와인, 혹은 특정 품종의 와인, 혹은 생산자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와인을 주세요'라고 하지 마라.

시음장에서 다 마셔볼 수 없으니 시음 코너에서 선별하여 자기 취향에 맞는 와인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실제로 종종 있다.

와인 시음은 그 회사의 와인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기회도 되지만 자신의 취향의 지경을 넓히는 계기도 되니 골고루 다양하게 맛보라는 것이다.

4. 거칠게 다른 사람을 밀치지 마라. 와인 받겠다고...

때로 보면 와인 먼저 받겠다고 사람을 밀치고 들어와서 따라 달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반면에 와인을 받고도 코너에 바싹 붙어서 뒷사람에게 배려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지도 말라는 이야기다.

5. 자신이 방문한 적이 있는 와이너리들에 대해 만나는 모든 와인 메이커들을 붙들고 이야기하지 마라.

와인 생산자들은 각자 자신의 상품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다른 와이너리 이야기한들 관심 없다는 의미이자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는 더욱 발전되고 좋은 와인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6. 와인 점수가 몇 점인지 묻지 마라. 절대로!

남이 평가한 점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평가자들이 세상 모든 와인을 마셔보는 것도 아니니 그 자체를 자기의 시각으로 편견없이 즐기라는 것이다. 와인 생산자의 자부심도 지켜달라는 의미도 되겠다.

7. 몸짱인 30대 후반의 남자들! 데이트 상대를 감동시키기 위해 와인 생산자 앞에서 아는 척하려고 대들지 마라. 반드시 실패한다.

와인에 대해 좀 아는 지식을 가지고 전부인 양 와인 생산자와 논쟁을 벌이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나 여성 앞에서 폼 잡고 싶어하는 남자들! 조심하라는 이야기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꼴이 되니까.

8. 당신의 아황산염 알레르기에 대해 말하지 마라. 당신이 멍청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와인을 마시면서 아황산염 알레르기 있다고 말할 거면 와인 페스티벌엔 왜 왔나?라고 반발만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산화황 성분이 천식이나 호흡기가 약한 사람들에게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맞으나 즐겨야 하는 장소에까지 와서 그런 진부한 이야기로 생산자에게 이야기하면 도대체 어쩌라는 말이냐?

이미 오랜 역사가 문제없음을 입증했는데.. 소수에 속하는 개인의 체질상의 문제를 거론할 때와 장소는 가려달라는 의미기이도 하다.

9. 물병에 와인 버리지 마라, 그리고 물 마시기 전에 항상 물인지 살펴라. (누군가 와인을 버린 사람이 있다.)

잔을 헹구라고 놓아둔 물병에 착각하고 와인을 버리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따라서 남은 와인을 버릴 때도 조심해야 하지만 물병의 물을 따를 때도 잘 살펴보라는 이야기이다. 근데 사실 취하면 잘 구분이 되지는 않는다.

10. 집에서 와인 뱉는 연습을 해라. 익숙하게 된다.

와인 뱉는 연습을 하고 시음회에 나오라는 말이다.

사실 이거 잘 뱉기가 쉽지 않다. 와인 스핏 통에 가까이서 뱉게 되면 얼굴에 튀거나 옷에 튀기도 한다, 남이 뱉아 놓은 와인이 튄다는 상상만으로도 더 이상 말이 필요없지 않은가?

게다가 레드 와인일 경우엔 더더욱!

그런데 사실 필자는 이런 아픔을 아직도 겪고 있다. 그래서 시음장에서는 반드시 손수건이나 냅킨을 챙긴다.

11. 잔을 돌리고 나서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와인의 눈물에 대해 이야기 하지 마라. 와인의 눈물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느끼는 맛과 향이 중요하지...

와인의 다리 즉 와인의 눈물에 대해 논하면서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만이 좋은 와인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12. 힐을 벗지 말고 로비에서 토하지도 마라.

여성분들을 대상으로 한 말 같지만 사실은 남녀 모두에게 해당되는 매너이다.

와인 욕심이 지나쳐서 너무 많이 시음하고 마셔버려서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13. 잔의 입구에 음식이 묻지 않게 깨끗하게 유지해라. 묻었거든 닦아라.

잔 입구 주변에 음식이 묻어 있으면 미관상도 좋지 않지만 와인의 향과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 수시로 닦아주어야 한다.

14. 당신이 화이트나 로제 와인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당신이 떠난 후 우리는 당신에 대해 뒷담화를 할 것이다.

와인 생산자 앞에서 나는 화이트나 로제 와인 보다 레드를 더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결국은 놀림감밖에 안 된다. 이 역시 다양하게 즐기라는 충고로 받아들이면 된다.

15. 향수를 뿌리고 오지 마라, 립스틱도 가볍게 바르시라, 나중에 잔 닦을 때 힘들다.

이건 본인도 본인이지만 다른 참석자들이 와인의 향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게 만드는 최악의 민폐를 끼치게 되는 일이다.

와인 생산자는 자신의 와인이 제대로 평가받기를 원한다. 게다가 립스틱 묻은 와인 잔은 세제없이 뜨거운 물이나 스팀으로만 소독하고 닦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곤란한 존재다.

16. 자선단체에 와인을 기부해달라고 요청하지 마라. 살인 충동을 불러 일으킨다.

와인 페스티벌이나 시음장에 와서 와인 생산자에게 와인 기부부터 이야기하면 생산자는 어찌하란 말인가? 생산자 자신도 먹고살아야 기부도 하는 것 아닌가?

17. 잔 돌리는 법을 연습하라.

손목으로 까딱까딱하면서 멋지게 돌리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다. 전문가다워 보이고...

잔을 잘못 돌리면 쏟을 우려도 있고 하니 잔 돌리는 법을 연습하라. 와인은 돌릴 때 자신쪽으로 즉 오른손잡이의 경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려야 튀더라도 상대방에게 튀지 않는다.

18. 어떤 음식과 마시면 어울릴까를 연상해 보시라.

음식과의 궁합은 와인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때론 와인 자체만으로는 밋밋하던 와인이 음식과 먹을 때는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와인 시음을 하면서 궁합이 맞는 음식을 떠올려보는 것도 그냥 시음만 하는 것보다는 하나를 더 즐기는 셈이다.

19. 와인 생산자의 철학에 귀기울여 보라.

와인 생산자는 각자 자기 나름의 철학이 있다. 그 사람의 철학이 와인으로 표현되게 되어 있다.

모든 예술가가 다 좋은 작품을 내놓는 것은 아니 듯이 철학이 뚜렷하다고 좋은 와인이나 내 맘에 드는 와인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으나 최소한 그의 레시피는 엿볼 수 있다.

20. 더 나은 와인 더 좋은 와인을 찾기보다는 다양성에 주목하라.

와인을 즐긴다는 것이 다양함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시음장이나 페스티벌에서는 차이점을 느껴보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즐거움의 세계다. 차이의 발견에 주목하지 우열에 주목하지 말라는 말이다. 꽃이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듯이 와인도 각자의 장점이 있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것, 선호하는 것은 따로 기억해두는 것까지 말리는 것은 아니다.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서도 젓갈을 얻어먹는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와인 생산자 앞에서 솔직 담백하게 자신의 느낌과 감상을 털어놓으면 된다.

짧게는 1년 농사의 결과를 길게는 수십년의 기다림의 결과를 기다려온 순박한 그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면 그도 마음으로 응대를 해주게 마련이다.

어찌 알겠는가?

숨겨놓은 좋은 와인을 마지막에 따라 싸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생산자의 와이너리로 초대를 받거나..

코로나 19가 이래저래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다. 와인업계의 시음회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진행해야 하기에 최소한 두 가지 매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와인을 달라고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장면은 사라질 테니까. 그리고 잔을 목에 걸어만 두고 활용하지 않는 경우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생산자와 집중해서 단 둘이 보게 되는데 어찌 잔을 목에만 걸어 두고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비대면으로 가야 할 수도 있겠다. 와인을 앞에 두고 모니터에서 마주보는 낯선 시음 풍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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