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1592년 4월 28일의 충주 탄금대전투 패배와 신립장군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임금은 한양을 떠나 개경으로 파천하고, 다시 평양으로, 의주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영의정 이산해를 파면하고 류성룡을 영의정 겸도체찰사 겸 병조판서로 임명하여 전쟁을 총지휘하게 했다.

류성룡의 지휘하에 조명 연합군은 이듬해 1월 9일 평양성을 탈환하여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고, 2월 12일 전라감사 권율의 행주대첩 승리로 한양을 탈환했다.

왜적이 남쪽으로 물러가자 의주로 피난 갔던 임금도 한양으로 돌아왔다.

정경세의 첩보전

정경세는 천연두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공주목사 나급(羅級)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났다.

정경세가 공주관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류성룡은 정경세를 홍문관수찬 겸 세자시강원문학에 천거하고 불러올렸다.

정경세는 소환에 응하였고, 각 도와 군영에서 올라오는 전황보고를 정리해 올리고 전략전술을 분석해서 올리며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필했다.

한편, 전라관찰사 권율의 행주대첩 승리 후 각 전장에서 속속 승전보가 올라왔다. 류성룡이 발탁한 이순신, 정기룡, 고언백 등이 모두 잘 싸우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러자 임금은 행주대첩에서 1만이 채 못 되는 군사로 왜적 3만을 맞아 싸우고 왜적에게 2만 4천의 사상자라는 엄청난 패배를 안긴 권율을 도원수로 삼았다.

그런데 조정의 관료들은 도원수 권율이 탈영한 군관을 처형한 것을 문제 삼아 탄핵했고, 그로 인해 권율이 도원수에서 해임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 관료들이 전장의 장수들을 헐뜯고 모함하여 임금의 심안을 혼탁하게 하자 류성룡은 정경세에게 조정 관료들의 공격으로부터 전장의 장수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래서 정경세는 사간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김우옹, 유영순, 이기(李墍) 등과 함께 류성룡이 세운 정책의 기본방침이 민몰(泯沒)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방어했다.

1596년(선조 29년) 적 제1군과 제2군 주력군이 왜국으로 철수했을 때였다.

“자네가 나를 대신해 영남 전장을 둘러보고 와야겠네. 주력군을 철수시킨 왜의 진의를 파악하고, 또 적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낼 방안도 찾아보도록 하게.”

류성룡이 정경세를 불러서 말했다. 정경세는 이때 이조좌랑의 벼슬에 있었으므로 업무와 관련 없는 임무였다. 류성룡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정경세라는 얘기였다.

“제가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경세는 어사에 임명돼 류성룡의 특별지시를 받고 영남지방에 파견됐다.

언제 어느 곳에서 왜적과 맞닥뜨릴지 알 수 없는 전장을 누비면서 남아 있는 왜적의 동태를 살폈고, 왜국 관백 풍신수길이 주력군을 철군시킨 진의를 알아보려고 정보를 수집했다.

또 장수들을 만나 애로사항과 전황을 들었고, 왜적을 완전히 몰아낼 계책을 물었다. 그 결과를 종합하고 정리해서 류성룡에게 보고했다.

1596년 8월 18일 조선 통신정사 황신과 부사 박홍장, 그리고 명나라 책봉사 앙방형과 부사 심유경이 왜국으로 건너가 풍신수길과 강화협상을 했다.

그러나 풍신수길은 다시 군사를 보내 전쟁하겠다고 위협했고, 황신과 박홍장을 숯불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조선의 항복을 요구했다.

황신과 박홍장은 풍신수길의 협박에 굴하지 않았고, 왜국이 스스로 전쟁을 끝내지 않는다면 더 이상 협상은 없다고 당당히 대응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됐고, 풍신수길은 조선을 재침략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했다. 1598년 7월 7일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 병선 500여 척이 바다로 나아갔고, 9일 대마도에서 온 왜적 병선과 합쳐 대대적으로 쳐들어왔다.

수군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전멸했고, 배를 버리고 도망쳤던 원균도 사망했다.

제해권을 확보한 왜적은 호남을 향해 수륙 병진했고, 남원성이 함락되며 주요거점이 왜적에게 넘어갔다. 왜적 좌우군은 전주로 진군하여 황석산성을 함락하고 전주성을 함락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정경세는 영서어사로 파견돼 영서지방의 군량미 조달을 감독했다. 류성룡은 오랜 전쟁으로 병을 얻어 건강치 못한 상태였다.

명나라 원병이 도착해 조명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류성룡은 영서어사로 파견된 정경세를 소환했고, 경상도관찰사에 임명해 보냈다.

수세에 몰린 왜적이 백성을 인질로 잡고 마구 해칠 것이 예상되므로 대책이 필요하고, 또 왜적의 약점도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정경세라면 우리 백성의 희생 없이 왜적을 몰아낼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이때 왜장 평청정(平淸正: ‘가등청정’이라고도 이름, 가토 기요마사)이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고언백을 통해 오만하기 짝이 없는 강화요청서를 보내왔다.

멀리 있어 만나지 못하고 있는데 안부는 어떠한가? 내가 지금 편지를 보내 오 노야(吳 老爺: 명나라 유격장 오유충)를 부르고 함께 3국의 화평에 대한 일을 의논하고자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년에 대군을 발동하여 조선을 정벌할 계획인 바, 올해는 잠시 휴식하였다가 내년에는 기필코 정벌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과 요동의 인민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나는 천성이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이를 가엾게 여기는 뜻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오 노야를 직접 불러 의논하여 강화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그대가 이러한 뜻을 국왕에게 고하여 오 노야로 하여금 오게 하면 좋겠다. 이만 줄인다. 고 총병(고언백) 창하(窓下)에 올린다. 평청정.

정유재란이 한창 진행 중이던 1598년 7월 중순에 평청정이 고언백에게 보낸 편지였다.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고언백은 그 편지를 경상도관찰사 정경세에게 보내 보고했다.

평청정의 강화요청서를 읽어본 정경세는 왜적이 전쟁에 이길 자신이 없어 철수하려는데 본국으로 돌아갈 퇴로마저 차단당하자 말도 안 되는 엄포를 놓으며 강화회담을 요청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정탐꾼 30여 명을 적진 깊숙이 들여보냈다.

조명연합군은 해상보급로를 차단하고 왜적이 차지한 울산성, 순천성, 사천성 등을 순차적으로 공격해 성을 탈환하며 왜적을 바다로 몰아갔다.

그러자 왜적은 부산에서 철수해 죽도로 집결했다. 이때는 이순신이 백의종군 후 수군통제사가 아닌 경상우수사로 강등돼 수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정경세는 우수사 이순신이 해상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러 예봉을 꺾었으므로 호남을 침범하지는 못할 텐데 무슨 의도로 죽도에 집결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조정에 치계를 올렸다. 그리고는 더 많은 정탐꾼을 적진에 들여보냈다.

정경세는 정탐꾼들이 보내온 정보를 종합해서, 왜적이 도망칠 궁리만 하며 이순신의 해상감시에 빈틈이 생길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지금 왜적은 싸울 여력이 전혀 없으므로 절대 왜국의 강화회담 요구에 응해서는 안 된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러자 전쟁이 왜국의 패전으로 끝나면 남인의 공이 높아질 것을 염려한 북인은 전쟁을 화친으로 끝내기 위해 정경세와 김수, 허성 등이 간사해서 왜국과 화친하려는 의논에 따르지 않고 전쟁을 오래 끌려 한다며 탄핵했다. 그러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

정경세는 명나라 마귀 등의 제독들을 만나 작전계획을 들었고, 조선군과의 연합작전을 상의하고 그것을 조정에 보고했다. 또 더 많은 정탐꾼들을 조선을 배반하고 왜적에 협조하는 척 위장시켜 적진에 들여보냈다. 그렇게 얻어진 첩보는 즉시 조정에 보고했다.

“왜의 관백(풍신수길)의 병이 중태라느니, 이미 죽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돌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구법곡의 적이 서생포로 옮겨간 것은 확실하며, 베어온 곡식과 말 등의 짐을 배에 적재했습니다.”

또 치계하기를 “왜적은 확실히 철군할 동태입니다. 항복한 왜적 하나가 진술하기를, ‘관백이 7월 7일 병으로 죽은 것이 분명하여 왜장들이 한창 철수하려고 할 즈음 왜국에서 기별이 오기로, 관백은 죽었고 그 아들이 이미 즉위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왜적 관련 정보를 수집해 조정에 올렸다.

이렇듯 경상도관찰사 정경세는 치밀한 첩보전으로 조선과 명나라 군사들의 작전을 돕고 조정의 전략전술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럼에도 북인은 정경세가 왜의 강화회담 요청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간사한 무리로 몰아갔고, 끊임없이 파직을 상소했다.

그때마다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해 8월 18일 왜의 관백 풍신수길은 병으로 눈을 감으며 조선 땅에서 철군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왜적은 철수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9월에 이순신 장군은 진린 제독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과 연합해 왜적 퇴로를 봉쇄하고 수 일간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다음 달,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진린, 그리고 유정 제독과 수륙협공으로 순천에 남아 있는 왜적을 모조리 쓸어버리기로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진린과 유정이 왜장 소서행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이순신 몰래 왜적의 퇴로를 열어주었다. 그러자 왜적은 소서행장의 군사가 안전하게 도망치도록 돕기 위해 병선 500여 척으로 깊은 밤에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주둔 중인 남해 노량을 급습했다.

정경세, 예학을 연구하다

이순신 장군은 한밤중에 왜적의 습격을 받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명나라 수군의 도움 없이 조선 수군만으로 왜적과 싸워서 왜의 병선 500여 척 중 250여 척 이상을 쳐부쉈다.

노량해전이었다. 왜적은 역시 이순신은 다르다며 혀를 내둘렀고, 두려워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단 한 놈의 왜적도 살려 보내지 말라며 추격을 명했고, 달아나는 왜적 병선을 뒤쫓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리고 전쟁은 끝났다.

1606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세워진 상주 도남서원.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의 위패를 모신 데 이어 류성룡, 정경세, 노수신 세 명이 추가 배향되었고 후일 사액서원으로 승격했다. [사진=상주시청]
1606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세워진 상주 도남서원.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의 위패를 모신 데 이어 류성룡, 정경세, 노수신 세 명이 추가 배향되었고 후일 사액서원으로 승격했다. [사진=상주시청]

전쟁이 끝나자 북인은 류성룡 탄핵을 추진했다.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응태의 무고사건 때 류성룡이 명나라로 가서 적극 해명하지 않았다는 것이 탄핵사유였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 그러니까 1598년 11월 19일에 있었던 일이었다.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는 조선에 파견됐을 때 조선 대신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본국으로 돌아가 명제에게 조선을 비방하는 글을 올렸다.

조선이 왜국과 손잡고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무함이었다.

이 말을 믿은 명제가 격노했고, 선조는 사신을 보내 해명하기로 했다. 그러자 북인은 류성룡이 가서 사죄해야 한다고 했다.

류성룡이 없는 틈에 전쟁을 끝내고 그 공을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류성룡은 그러나 해명하면 오히려 더 오해받을 것이라며 가지 않았다.

그러자 북인은 가지 않은 것을 트집 잡아 집요하게 류성룡의 파직을 상소했다. 류성룡은 결국 북인의 탄핵을 받고 삭탈관작됐다.

류성룡 중심의 남인이 집권한 시기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부터 정유재란이 끝난 직후까지였다. 정경세가 관직생활을 한 것도 대부분 이 시기였다. 류성룡과 남인이 전쟁을 치르고 끝낸 것이다. 그러나 북인은 전쟁 중에도 오로지 권력쟁탈에만 몰두했다. 그런데도 임금은 북인을 인정하고 남인을 배척했다.

정경세는 임금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류성룡과 남인의 수고를 인정하지 않고 북인과 함께 정사를 의논하자 크게 실망했다.

그래서 병을 얻었다며 사직을 청하고 물러났다. 고향에서 김각, 이준 등과 함께 존애원(存愛院)을 세우고 전쟁으로 병을 얻은 백성들을 무료로 치료했고,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지냈다.

근래에 시의(時議)가 다시금 바뀌어서 불꽃이 더욱 뜨거워지는 듯합니다. 이른바 당고전(黨錮傳)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격이니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영의정이 성 밖으로 나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근래에 얼마나 낭패를 당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상상컨대 역시 조정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 듯하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주역(周易)』 곤괘(困卦)의 단사(彖辭)에 이르기를, ‘말을 하면 사람들이 믿어 주지 않는다’고 하였고,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등용한 인물에 대해 임금이 일일이 다 허물을 지적할 수가 없으며, 잘못된 정사를 일일이 다흠잡을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생님께서 나랏일을 보실 때 이러한 것을 얻지 못하였음에도 충성과 정성을 다하였으니, 그 곧은 절개를 세상 사람들은 공경하고 또 공경할 것입니다.

1600년(선조 33년) 정경세가 유성룡에게 보낸 서찰을 보면 당시의 그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다음 회에 계속)

·사진 제공_ 상주시청

글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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