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류성룡은 과거 퇴계 이황에게서 물려받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정경세에게 물려줬다. 『주자대전』의 중요한 부분을 뽑아서 이황이 편찬한 책이었다.

류성룡이 그 소중한 책을 정경세에게 물려줬다는 것은 정경세를 수제자로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이황의 학문이 류성룡을 통해 정경세에게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퇴계학의 적통을 계승한 정경세는 『주자서절요』의 모자라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주문작해』를 편저했다.

이황의 『주자서절요』와 자신이 편저한 『주문작해』를 간행해 제자들에게 배포하고 가르쳐 퇴계학을 크게 확산시켜나갔다.

퇴계학의 적통을 잇다

정경세는 리기설(理氣說)에서 리(理)와 기(氣)의 차이점을 강조했고, 격물치지에서도 격물(格物)은 손님을 청하는 것이며 물격(物格)은 손님이 스스로 오는 것에 비유해 퇴계의 리도설(理到說)을 계승했다. 사단칠정론이나 공부론에서도 퇴계학을 충실히 계승하여 발전시켜나가는 연구를 했다.

정경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퇴계 이황의 제자인 한강 정구가 연구하던 성리학에서의 『주자가례』와 『삼강행실』, 『소학』과 『향약』 등의 예학(禮學) 연구를 이어받아 학문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성리학적 사회질서의 이론을 확립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정경세는 아버지로부터 『소학』을 배울 때 배운 바를 그대로 실행하려 애썼지만 다 이행하지 못한 것을 늘 안타까워했고, 그래서 「양정편(養正篇)」을 지었다.

『향교예집』 중 「동자예편(童子禮篇)」을 보완해 지은 글이었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몸에 익지 않으면 고치기 힘들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이었다. 정경세가 예학에 얼마나 열정을 보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양정편」은 어린아이들의 가장 기초적 일상규범을 28개 조항 3개 영역으로 나누어 가르치고 있다. 1영역은 몸과 마음을 검속하는 예절 12개 조항이고, 2영역은 집에서 부형을 섬기고 밖에서 스승과 장로를 섬기는 예절 11개 조항이며, 3영역은 서당에서 학업을 익힐 때의 예절 5개 조항이다.

세수하고 머리 빗는 법: 새벽에 일어나면 곧바로 세수하고 머리를 빗어 용의를 단정히 해야 한다. 얼굴을 씻을 적에는 수건으로 옷깃을 가리고 양쪽 소매를 걷어서 물에 젖지 않게 해야 하며, 며리를 빗을 때는 반드시 먼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가다듬어서 흐트러지지 않게 해야 한다.

옷 입는 법: 옷을 입을 때는 옷깃을 잡아 세우고 곧게 하여 띠를 묶고 단단하게 한다.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어지거나 느슨해져 용모가 흐트러지면 안 된다. 음식물을 먹거나 마실 때도 조심해 잘 살펴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할 것이며, 길을 갈 때도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아 옷에 흙이나 오물이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양정편」은 이렇듯 세수하고 옷 입는 것부터 손을 교차시키는 법, 읍을 하는 법, 절을 하는 법, 무릎을 꿇는 법, 서 있는 법, 앉아 있는 법, 걸음을 걷는 법, 말하는 법, 보는 것과 듣는 법, 음식을 먹는 법 … 스승에게 수업 받는 법 등 어린아이가 가져야 할 몸가짐과 예절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렇기에 정경세의 「양정편」은 조선시대 아동교육 연구에 중요한 문헌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정경세는 예학을 연구하면서 수시로 정구에게 편지를 보내 조언을 구했다.

(전략) 『오례의도』에 나오는 주석은 너무 초략하여 그것만으로는 징험하기에 부족하고 『의례』를 상고해보고자 하였지만 이곳에는 그 책이 없어 대사에 미진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이 일을 위해 두 서생을 보냈으니 삼가 하나하나 자세하게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정경세가 1606년(선조 39년)에 정구에게 보낸 편지이다. 정구에게 예법을 묻고 조언을 구했다는 것은 정구가 연구한 예학을 정경세가 따르며 이어갔다는 증거가 된다.

정경세는 예학과 예론을 학문적 연구로만 그치지 않고 실천하는 데 큰 의의를 두었다.

그래서 그 부인과 자손, 문도들과 유생은 물론이고 백성들에게도 이를 가르치고 보급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것은 후일 정인홍과 이이첨 중심의 대북파가 소북파를 숙청하기 위해 조작한 ‘김직재의 옥사’때 정경세 부인의 한글편지를 읽은 광해임금의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복 정경세 종가로 대산루 남쪽 언덕에 자리잡아 팔경을 굽어보는 곳이다. [사진=상주시청]
우복 정경세 종가로 대산루 남쪽 언덕에 자리잡아 팔경을 굽어보는 곳이다. [사진=상주시청]

임금은 1607년(선조 40년) 정경세를 대구부사에 제수했다. 정경세는 이전에도 청송부사, 영해부사, 좌승지, 예조참의 등에 제수된 적 있었지만 나아가 사은하지 않았다.

여러 번 사양했기에 더 이상 사양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대구부사에는 부임했다.

그리고 1608년 선조임금이 붕어하고 광해임금이 즉위했다.

정경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작심하고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대북이 장악한 광해임금 조정의 도덕성을 정면 비판했다.

20여 년 전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남 몰래 궁궐을 들락거리는 자가 있으면 청론(淸論)이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겼고, 자신들을 더럽힐까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10여 년 이래 조정에는 청의(淸議)가 없어지고 요행이나 바라는 풍조가 크게 일어나 이러한 짓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대부 집안은 극히 조금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에 궁궐은 저자거리 같이 되어 각기 문호를 세우고 뇌물을 받고 있는데, 변장(邊將)과 수령 자리도 모두 정해진 가격이 있고, 표창과 형벌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에는 군신의 상하가 서로 인의를 저버린 채 이기심으로만 맺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리하여서는 아랫사람이 임금의 잘못을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윗사람도 신하의 죄악을 바로잡지 못한 채 아첨하고 의심하는 더러운 풍조가 성행하여 선왕 말년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혼탁함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정경세의 「만언소」에는 정인홍과 이이첨 등의 간신 무리가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힘을 북돋워주며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민생정치가 아닌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권세를 부림으로써 결국은 나라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강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정인홍 이이첨의 대북은 즉각 반발했다. 사헌부 장령 윤양과 유경종 등은 정경세의 교체를 청했고, 정홍익은, “말을 너무 심하게 해 자기 직분을 잃었습니다”라고 성토했다.

광해임금도 격분해서는, “정경세를 잡아다 국문한 뒤 율에 따라 처단하고자 한다. 나의 이러한 뜻을 대신들에게 물어보고 아뢰도록 하라!”라고 하교했다.

그러나 사간원에서는 정경세의 말이 심하긴 하지만 지금은 임금이 막 즉위해 민심을 다독일 때라며 만류했다.

오히려 정경세를 용서해서 새 임금의 넓은 포용심을 보여주면 신하들이 감복할 것이라고 간했다.

정경세가 유자로서 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웠고, 전쟁 후엔 ‘존애원’을 설립해 운영하며 병든 백성들을 무료로 치료했으므로 사림과 백성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는데 그만한 일로 벌하면 민심이 등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광해임금은 정경세에게 경고하는 선에서 만언소 사건을 마무리했다.

1609년(광해군 1년) 정경세는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명나라에 가서 염초(焰焇: 화약 원료) 수입을 예년의 갑절로 해달 라고 요청하여 명제의 허락을 받았다.

그 공으로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지만 정경세는 정인홍과 이이첨 등의 간신들이 꼴 보기 싫어서 외직을 자청해 나주목사로 나갔고, 곧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했다.

정인홍은 남명학파로서 북인이었고,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진 후에는 대북파로 활동하며 광해군 대에 정권을 잡았다.

그는 퇴계학을 흠집 냄으로써 자신의 스승 남명 조식의 학문적 위상을 높이려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퇴계의 제자이기도 하면서 남명의 제자이기도 한 정구가 예학을 연구해 새로운 길을 개척함으로써 퇴계학의 위상을 더욱 높여놓았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정인홍은 정구에게 대놓고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중 어느 쪽인지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정구는 오히려 정인홍 같은 제자 때문에 조식이 이루어놓은 학문적 성과가 빛을 바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김우옹과 함께 정인홍과의 절교를 선언했다.

그랬는데 그 정구의 예학을 퇴계학파의 적통을 계승한 정경세가 이어받아 연구해서 더욱 높여놓고 있었다. 정인홍으로서는 속이 쓰라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인홍은 대북파를 움직여 정경세를 모함했다.

“정경세는 어미가 적의 칼날에 죽었는데도 타향에 우거하며 즉시 염하여 장사지내지 않았고, 상복 입은 몸으로 관문에 드나들며 고기를 먹고 여자를 가까이했으며, 의병에 가담했을 때도 소모장으로서 군량과 의병을 모집한다는 명분으로 돌아다니며 보란 듯이 기생과 놀았다고 합니다.”

사간원의 상소였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다. 정경세는 상복 입은 몸으로 의병을 일으켰고, 왜적의 칼에 아우와 어머니를 잃었지만 상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왜적과 싸워야 했다.

화살에 맞아 부상당한 몸으로도 함창의병 소모장을 맡았고, 군량을 구하러 호서로 가다가 천연두에 걸려 죽게 생긴 것을 공주목사 나급이 구료하여 겨우 살아났다.

이에 대해 사관은 『조선왕조실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정인홍이 평소 그(정경세)와 그 가문(퇴계학파)을 원수 보듯 했는데, 이로 인해 비방을 지어냈다.

임인년에 정인홍이 대사헌으로 있으며 그(정경세)를 탄핵했는데 선조께서 윤허하지 않았던 것을 이때 와서 다시 한 것이다.

경세가 호남에 있으면서 『오현종사제도(五賢從祀祭圖)』를 사적으로 편찬했는데, 그 중에 ‘성대한 전례가 거행되자마자 사특한 설이 곧 떠돌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인홍의 무리인 유활, 강익문, 손척 등이 그를 미워하여 마침내 극력 공박했던 것이다.

‘사특한 설이 곧 떠돌았다’는 것은 아마도 정구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렇게 오현의 문묘종사를 추진할 때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을 비방하며 문묘종사가 부당하다고 극론한 일을 두고 한 말일 터였다.

남명 조식은 제자들에게 어떤 물건을 주기를 좋아했는데, 김우옹에게는 차고 있던 방울을 건네며 항상 깨어 있는 선비정신을 강조했다.

그런데 정인홍에게는 경의검(敬義劒)을 주었다고 한다. 과연 조식은 선견지명이 대단하거나 사람 보는 눈이 남달랐던 모양이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조식의 칼이 나라를 지킨 것일까?

정인홍이 남인과 소북세력을 향해 무자비하게 휘두른 숙청의 칼에서 도학의 근본인 ‘경외(敬畏)’를 찾아볼 수 없다.

혼자 있을 때마저 삼가 조심하고 조심하여 본래의 규범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내심(內心)을 늘 경외 상태로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수양해야 하는 것이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의 기본이었음에도 정인홍은 칼로 퇴계학을 베어 쓰러뜨리는 것으로 자기 스승의 남명학을 높이려 했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해서 이기려 하지 않고 남을 깎아내리고 짓밟아서 이기라는 것이 조식의 가르침은 아니었을 것이다.

1603년 우복이 지은 초가집 가옥인 대산루와 계정(溪亭)을 중창한 곳으로 그 소박함에 따라 청간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진=상주시청]
1603년 우복이 지은 초가집 가옥인 대산루와 계정(溪亭)을 중창한 곳으로 그 소박함에 따라 청간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진=상주시청]

정인홍 무리의 모함으로 정경세는 파직됐다.

그리고 1612년(광해군 4년) 마침내 정인홍에게 정경세를 완전히 파멸시킬 기회가 왔다.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조작한 ‘김직재의 옥사’가 그것이었다.

1612년(광해군 4년) 정인홍과 이이첨은 영창대군을 지지한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해 모반사건을 조작한다.

군역을 피하려고 문서를 위조한 김경립을 협박해 정인홍과 이이첨에게 불만 많은 성균관 학유 김직재와 그 아버지가 모반을 계획한다는 소문을 내게 했고, 그 소문을 빌미로 김직재를 잡아들였다.

그리고는 김직재를 고문해서 광해군의 형인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을 받들어 난을 일으키고 대북 일파를 제거하려 했다는 허위자백을 받아낸 것이다.

대북파는 그렇게 조작한 모반사건에 진릉군 등의 소북파 100여 명을 엮어서 처벌했다.

정인홍은 정경세도 그 사건에 엮어 넣었다. 모반사건에 연루되면 죄가 있든 없든 살아남은 사람이 몇 되지 않았다.

정경세는 무함을 받고 잡혀가 국문을 받았고, 가택 수색으로 집안에 있던 모든 서책과 문서를 압수당했다. 그런데 그중에 정경세의 부인이 쓴 한글편지가 섞여 있었다.

광해임금은 정경세가 평소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해서 압류한 서책과 문서를 읽어보던 중 부인의 한글편지를 발견했다.

그것을 읽어본 임금은, “사적인 편지글 중에는 부인이 언문으로 쓴 글도 있었는데, 임금을 언급할 땐 반드시 줄을 따로 잡아서 존대하였더라. 부인과 어린아이까지 임금을 존중하는 의를 아는 집안인데, 이런 집안 가장이 과연 반역을 생각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는 친히 정경세를 국문하는 자리에 가서 지켜보았다.

임금이 관심을 갖고 사건을 들여다보자 정인홍은 부담을 느낀 나머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정경세를 풀어주었다.

정경세의 누명을 벗겨준 것은 부인의 예의바른 편지글이었다. 이씨 부인은 이황의 스승 이우(李堣)의 증손녀이다.

부인의 예의가 정경세를 반역자로 의심하고 있던 임금마저 감동시키고 그 의심을 거두게 만들었다.

정경세가 예학을 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그 자손과 부인들 또한 철저히 예의범절을 지키게 유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전례(典禮: 왕실의식) 등의 국가적 행사뿐 아니라 사당의 행사 등이 있을 때면 반드시 정경세에게 예법을 물어서 행했다고 한다.

이렇듯 영남의 주리적 예학은 퇴계학파의 정구에서 시작돼 정경세가 가례(家禮)와 의례, 고례(古禮)를 연구하여 발전시키고 실천함으로써 영남학파의 예론으로 뿌리내렸다.

정인홍의 마수를 벗어난 정경세는 1613년(광해군 5년) 강릉부사로 나가선정을 베풀었다. 그리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임금이 폐위됐다.

계축옥사로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 유폐사건으로 정적을 제거하며 좌의정, 영의정에 올라 권세를 누리던 정인홍은 반정 후 참형됐다.

광해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조임금은 정경세의 학문을 높이 사서 홍문관부제학에 제수하고 불렀다.

정경세는 그 후 의정부참찬,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한 후 병이 들어 휴직하고 상주로 내려갔다.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633년(인조 11년) 6월 17일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문장(文莊)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우복집』, 『상례참고(喪禮參考)』, 『주문작해』가 있으며, 상주 도남서원과 강릉의 우복사에 제향됐다. 정경세의 부인이 1633년 막내딸(송준길의 부인)에게 쓴 흘림체 한글편지가 대전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우복집』(정경세 저, 정선용 역, 한국고전번역원), 「영남예학의 종사 정구·정경세」(최완기,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우복 정경세의 예학 연구-禮 관념의 분석-」(류권종, 중앙대), 『실천적 예학자 정경세』(윤천근 저, 한국국학진흥원, 2007. 1. 25.), 「임진왜란시기 일본의 병량미 보급과 그 정책-1차 침략전쟁의 초기를 중심으로」(이종봉, 부산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사진 제공_ 상주시청

글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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