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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11-30 15:49 (월)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5)] 조선의 마지막 여류시인 최송설당(1)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5)] 조선의 마지막 여류시인 최송설당(1)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11.21 0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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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886년(고종 23년) 6월, 서른한 살의 최송설당(崔松雪堂)은 임종이 임박한 아버지 손을 잡고 처연히 눈물 흘렸다.

그 옆에는 송설당의 두 여동생과 양동생 최광익(崔光翼)이 앉아 있었다. 최광익은 원래 송설당의 육촌동생이었는데, 송설당의 아버지 최창환(崔昌煥)의 대를 잇기 위해 1882년에 입양됐다.

최창환과 부인 경주 정씨(慶州鄭氏) 정옥경(鄭玉瓊: 호적명 鄭台浩) 사이에 아들 없이 딸만 셋이었기 때문이다.

“내 평생 부끄럽지 않은 선비로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으나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였으니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구나.”

아버지 최창환은 힘없이 눈을 깜박이며 눈물지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원(伸寃: 누명을 벗는 일)을 끝내 이루지 못한 한(恨)의 눈물이었다.

“제가 여식으로 태어난 탓에 아버지의 짐을 나누어 지지 못하고 나이 서른을 넘겨버렸으니, 제가 죄인입니다.”

아버지의 소망

맏딸 송설당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최창환으로부터 “네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꼬”라는 얘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다.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가문의 일을 의논할 수 있는 아들이 필요했기에 딸로 태어난 송설당을 바라보는 그 눈길이 더욱 쓸쓸할 수밖에 없었다.

송설당은 맏딸로 태어났기에 아버지로부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괜히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최창환은 머리가 비상해서 학문에 뛰어났다. 그러나 조부 최봉관(崔鳳寬)이 대역죄인으로 몰려 옥사하고, 아버지 최상문(崔翔文)은 형제 셋과 함께 전라도 고부(古阜: 지금의 전북 정읍시 고부면, 덕천면, 부안군, 백산군 일대) 땅에 유배됐다.

부호군(副護軍)이었던 할아버지 최봉관이 1811년(순조 11년)에 일어난 농민반란인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러 평안도 선천군으로 나갔지만 난군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함락당하고 말았는데, 그 책임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최봉관의 외가 강릉 유씨(江陵劉氏)가 난군에 가담했던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최봉관은 외가와 결탁해 고의로 난군을 진압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받고 고문을 받다가 옥사했다.

최창환은 아버지의 배소(配所)인 고부에서 태어났다. 역적의 손자로 태어난 것이다. 때문에 과거를 볼 수도, 떳떳하게 세상을 살 수도 없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며 귀가 따갑도록 들은 것이 “우린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렸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최창환은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복권을 이루리라 다짐했다.

최창환의 아버지 최상문은 유배 중에 세상을 떠났다.

최창환은 아버지가 유배된 것이지 자신이 유배된 것은 아니었기에 배소를 떠날 자유가 있는 몸이었다.

그는 선조들이 김천에 세거했다는 사실을 알고 김천으로 가리라 결심했다. 먼저 배소를 떠난 사촌들도 김천에 가서 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청년 최창환은 1849년경 김천으로 이주했고, 그 후에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몰락가문 화순 최씨(和順崔氏)의 장손으로 태어난 최창환은 김천에서 제2의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역적의 후손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으므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자신이 못하면 후손이라도 그 일을 하게 해야 하는데, 야속하게도 하늘이 돕지 않아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했다.

“우리 집안은 대사성을 지낸 최사로(崔士老)의 후손으로, 명문가 중 명문가였느니.”

최창환은 다른 사람들처럼 바깥에서 아들을 보거나 후처를 들여 아들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적 집안임을 알면서도 시집을 와서 고생해준 아내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맏딸인 송설당에게 귀가 따갑도록 억울한 누명을 쓴 할아버지와 아버지 얘기를 들려주며 자신의 무능함을 긴 한숨으로 탄식하곤 했다.

그 한이 가슴에 맺혀 죽음이 임박했음에도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김천 불영산에 위치한 청암사. 최송설당의 시주에 크게 힘입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사진=김천시청]
김천 불영산에 위치한 청암사. 최송설당의 시주에 크게 힘입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사진=김천시청]

송설당은 선대의 신원복권을 아들만이 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생각에 반박할 수 없었다. 여자는 정치를 할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늘 아버지를 위해 자신이 꼭 그 일을 해내고야 말리라 다짐했다.

아버지 최창환은 그렇게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송설당은 아버지 유해를 전라도 함평 신광면 삼천동(三泉洞)까지 운구해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르면서 아버지가 가여워서 울고 또 울었다.

역적 후손의 설움을 온몸으로 견뎌온 아버지의 삶을 나이 서른이 넘도록 곁에서 지켜보았던 송설당이기에 자기 한 몸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데 바치겠노라 다짐했다.

현몽

송설당은 호이고, 본명은 미상이다.

그녀는 개화기의 파랑 속에서 궁녀가 되어 고종으로부터 송설당이라는 당호를 받았고, 역모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조상들의 사면과 관작복원을 이루었으며, 교육사업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뛰어난 글솜씨로 많은 시와 시가를 남기도 했다.

최송설당이 활동한 시기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였다. 말년에 사학건립에 전 재산을 바쳤지만 신학문을 접하지는 않았고, 아버지가 훈장이어서 유교적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고 자랐다.

송설당은 1855년(철종 6년) 8월 29일 김산군 군내면 문산리(지금의 문당동)에서 무남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두 여동생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지만 송설당은 혼자였다.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인지, 결혼을 했다가 혼자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혼인한 적이 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어쨌거나 자녀는 없었다.

송설당은 1930년 발간된 『삼천리(三千里)』(초하호 初夏號)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상로에 나서서 여러 방면으로 천행만고를 하여서…”라고 말했다.

김희곤 교수는 논문 「최송설당연구」에서, 가난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던 어머니를 도와 억척스럽게 살았고, 한때 장사를 해서 집안 살림에 보탬을 주었으며, 재산도 제법 축적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김천고등학교 뒷산 정걸재(貞傑齋)에 위치한 최송설당 생가. [사진=김천시청]
김천고등학교 뒷산 정걸재(貞傑齋)에 위치한 최송설당 생가. [사진=김천시청]

송설당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김천의 모든 재산을 처분했다. 그러고는 1895년 전후 한양으로 올라갔고, 대궐이 가까운 적선동에 집을 얻었다.

목적은 오로지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신원을 이루어 아버지의 원혼을 풀어드리려는 것이었다. 송설당의 머릿속에는 몇 가지 구상이 있었다.

고종임금은 이때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이 고종마저 해하려 하고 나라를 강탈하려는 야욕을 드러내며 무력으로 위협하자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있었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송설당은 궁궐에 들어갈 방도를 찾아 궁궐 사람들과 연을 맺으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래서 러시아공사관에서 음식을 담당하던 엄상궁(嚴尙宮: 귀비 엄씨, 순헌황귀비)이 고종의 성총(聖寵)으로 잉태를 했는데, 엄상궁의 여동생이 언니의 왕자 출산을 기원하기 위해 봉은사(奉恩寺)에서 백일기도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송설당은 부처님이 기회를 주시는 거라고 생각해 봉은사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한을 품고 돌아가신 아버지 원혼을 달래기 위해 기도를 온 척하며 엄상궁의 여동생 가까이에서 불공을 드렸고,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엄상궁의 여동생이 송설당에게 언니의 왕자 출산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얘기를 한 후로는 자신도 왕자 출산을 빌며 백일기도에 동참했다.

그렇게 백일기도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이렇듯 정성으로 기도를 올리시니 부처님의 감명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송설당은 아침기도를 마친 후 엄상궁의 여동생에게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제가 간밤에 아주 좋은 꿈을 꿨습니다. 부처님께서 꿈에 나타나시어….”

“부처님께서요?”

“예, 온몸이 황금으로 빛나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참말 눈이 부셨지요.”

“그래서, 그래서요?”

엄상궁의 여동생이 혹해서 물었다.

“너무도 고고한 귀상이고 환한 빛에 둘러싸인 갓난아이를 엄상궁으로 보이는 분의 품에 안겨드리는 꿈이었습니다.”

“정말인가요?”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제가 장차 태어나실 왕자님을 위해 해산준비물품을 몇 가지 준비할까 합니다. 허락해주세요.”

송설당이 말했지만 엄상궁 여동생은 선뜻 허락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마침 궁궐에 과장(전화과장 이규찬으로 추정)으로 근무하고 있는 엄상궁의 제부가 아내를 만나러 봉은사에 왔다. 엄상궁 여동생은 송설당에게서 들은 얘기를 남편에게 했다. 그러나 이 과장은,

“우리에게 접근해서 뭔가를 뜯어내려는 수작이겠지”

라고 하며 믿지 않았다.

“저도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지만 진솔한 여인 같으니 어떤 사람인지 알아나 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부인의 말에 이 과장은 고개를 주억거렸고, 사람을 풀어서 송설당에 대해 알아보았다. 큰 문제가 될 것 없는 인물인 것 같아서 직접 송설당을 만나보았다.

“나는 주상을 대신해 여기 앉았소. 그러므로 그대는 지금 왕자를 두고 임금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만에 하나 거짓이 있을 땐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는 뜻이오. 정말 현몽을 꾸었소?”

이 과장은 싸늘한 눈초리로 송설당을 쏘아보며 물었다.

“미천한 제가 어찌 감히 왕실을 상대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저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제가 내뱉은 말은 제가 책임을 질 것입니다. 어떠한 벌도 달게 받을 것이니 믿어주십시오.”

엄상궁이 딸을 낳는다면 임금을 능멸한 죄로 큰 대가를 치러야 함에도 송설당은 떨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 과장은 아내에게, 무작정 믿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일단은 송설당을 믿어보자고 말했다.

이에 엄상궁의 여동생은 송설당에게, “부처님께서 내가 아닌 그쪽에 현몽을 주셨을 땐 그쪽이 장차 태어나실 왕자님께 큰 복을 가져다줄 귀인이기 때문일 것이오”라고 하며 해산물품을 준비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송설당은 태어날 왕자가 입을 최고급 배냇저고리부터 발싸개, 이부자리, 기저귀, 목욕용품 등을 자비로 구입했고, 엄상궁 여동생에게 건넸다.

“이것이 다 무엇이냐? 모두가 아들의 것이구나.”

엄상궁은 여동생으로부터 송설당이 준비한 해산준비물품을 전달받고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여동생은 엄상궁에게 송설당이 꾼 현몽을 이야기했고, 정말 열심히 헌신적으로 기도하던 모습이 감명적이더니 그 여인의 정성이 부처님께 미친 듯하다고 말했다.

“현몽이 맞고 아니고를 떠나, 주상의 힘이 없어 아무도 왕실을 위해 몸 던져 충성할 사람 없는 때에 그런 여인이 스스로 찾아와주었으니 귀한 인연일 것이다. 그 여인의 정성이 내 몸 속 태아에게 미쳐 정말 왕자가 태어난다면 틀림없이 부처님이 보내주신 인연일 것인즉, 연을 끊지 말고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

엄상궁이 말했다.

그날 이후 엄상궁의 제부 이 과장은 송설당에게 사람을 붙여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송설당은 도망을 치려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고, 열심히 절에 기도를 다닐 뿐이었다. 엄상궁의 뱃속 왕자가 건강하게 세상에 나오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대한제국 광무(光武) 원년인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을 나와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엄상궁도 고종을 따라서 경운궁으로 들어갔고, 얼마 후 해산했다. 딸일까 아들일까. 모든 이들의 관심이 엄상궁에게 쏠렸다.

송설당에게는 ‘죽음일까,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는 날일까’의 갈림길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