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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1-01-22 11:34 (금)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5)] 조선의 마지막 여류시인 최송설당(2)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5)] 조선의 마지막 여류시인 최송설당(2)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11.28 0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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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보모상궁이 되다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왕자이옵니다.”

그 기쁜 소식은 측근인 이 과장에 의해 고종임금에게 가장 먼저 전달됐다.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 영친왕(英親王: 아명은 유길酉吉, 호는 명휘明暉), 또는 영왕(英王) 이은(李垠)의 탄생이었다. 영친왕은 후에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젖히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된다.

고종은 매우 기뻐했고, 이 과장 권유에 따라서 산실로 달려갔다. 엄상궁 손을 꼭 잡고 수고를 격려한 후 조심조심 산파가 건네주는 아들을 받아 안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을 꼭 닮은 아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는데, “전하, 실은 왕자가 태어나시기 전 부처님께서 전하께 아들을 점지해주시는 꿈을 꾼 여인이 있나이다.”하고 산모 곁에 앉았던 엄상궁 여동생이 말했다.

“그 여인이 누구인고?”

고종이 엄상궁 여동생을 돌아보며 물었다. 엄상궁 여동생은 최송설당에 대해 아뢰었고, 왕자의 보모로 그 여인을 들이는 것이 어떻겠냐고 여쭈었다.

고종은 좋은 인연의 여인이라면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하면서 그 일을 이 과장 부부에게 위임했다. 이 과장 부부는 엄상궁과 상의한 후 송설당에게 사람을 보내 입궁하게 했다.

“아들이오. 왕자께서 탄생하셨소.”

엄 상궁의 여동생이 보낸 사람이 달려와서 송설당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초조히 소식을 기다리던 송설당은 아들이라는 소식에 긴장이 풀리며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짙게 드리웠던 죽음의 그림자가 걷히는 느낌이었고, 저승사자에게 잡혔던 손목이 풀려나는 느낌이었다.

송설당은 엄상궁 여동생이 보낸 사람을 따라 경운궁으로 달려갔고, 엄상궁을 만났다. 이젠 왕자를 낳았으므로 엄상궁이 아닌 경선궁(慶善宮) 엄귀인(嚴貴人: 1897년 9월 27일 봉작)이었다.

엄귀인은 송설당을 만나 이야기해보고, 그 착실함과 진솔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송설당은 훈장이었던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익히고 한글도 익혀서 글재주도 뛰어났다. 인간성과 실력 모두에서 합격점이었다. 엄귀인은 내명부(內命婦)에 명하여 송설당을 이유길(영친왕의 아명)의 보모상궁으로 임명했다.

송설당은 궁궐에 들어가 궁인이 되는 데 성공했다.

왕자의 보모상궁이 됐다는 것은 그만큼 임금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는 얘기였다.

생전의 최송설당 모습. [사진=김천시청]
생전의 최송설당 모습. [사진=김천시청]

그해 10월 고종은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랐다.

송설당은 경선궁 소속의 황자보모상궁으로서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다. 그 정성은 엄귀인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린 황자에게 책을 읽어주고 황자로서의 기초적 품위를 심어주는 것에서도 엄귀인을 감동시켰다. 엄귀인은 그런 송설당을 어여삐 여겨 평생 자기 곁에 두기로 결심했고, 경선궁에 딸린 토지와 재물의 관리까지 맡겼다.

그만큼 신임이 두터웠던 것이다. 엄귀인은 또 송설당의 헌신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제법 많은 재물을 사례비로 건넸다.

“저는 보모상궁으로서 내명부로부터 정당한 녹봉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사례는 충분하니 거두어주십시오.”

송설당은 정중히 사양했다.

“내 정성을 거절하는 것인가?”

“황송하오나 정성으로 여기기엔 너무 많습니다.”

“자네 수고비로만 주는 것은 아니라네. 지금 시국이 어지러워 황실의 안녕을 담보할 수 없으니,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아니 되겠으나 장차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겨 자네에게 의지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않겠나. 그때를 대비하려는 뜻도 있으니 일단 받아두게.”

송설당은 엄귀인의 뜻을 읽고 그 돈을 받았다. 그녀는 엄귀인의 측근인 상주 출신 이용교(李瑢敎: 최송설당의 남편이라는 설도 있다) 오위장과 친했다.

이용교가 1897년 창원군수로 나가자 송설당은 엄귀인에게서 받은 재물을 이용교에게 맡기고 좋은 토지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이용교가 김해군수, 진주군수로 있을 때도 그랬다.

1900년에 황자 이유길은 영친왕에 봉해지고, 엄귀인은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에 봉해졌다. 순헌황귀비는 그것이 다 송설당의 공이라며 송설당에게 소원이 있는지 물었다.

송설당은 당연히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형제들의 신원복권을 이야기했다.

순헌황귀비는 황제를 알현하고 송설당의 가문이 멸문하게 된 이유를 말하며 그 억울함을 풀어주었으면 한다고 청했다.

황제는 그 청을 받아들여 송설당의 증조할아버지 최봉관이 역적으로 몰리게 된 과정을 다시 조사하라고 하명했는데, 조사를 해보니 참말 억울한 면이 있었다.

황제는 1901년(광무 5년) 최봉관과 그 자손의 죄를 사면하고 복권할 것을 명했고, 송설당의 양동생 최광익을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했다.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한 최상문의 형제들 후손인 최한익(崔漢翼)과 최해익(崔海翼)도 관직에 등용하라고 하명했다.

최송설당은 그토록 소원하던 가문의 신원을 이루어 아버지 한을 풀어드렸다. 궁궐에 들어온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하지만 송설당에겐 아직 궁궐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궁궐에 들어온 목적은 이루었지만 순헌 황귀비에게 입은 은혜가 너무도 컸다.

송설당은 그 은혜를 한순간도 잊지 않고 더욱 지극정성으로 황귀비를 섬겼다.

최송설당은 영친왕궁과 경선궁을 자유롭게 오가며 영친왕과 순헌황귀비의 심부름을 했다.

또 순헌황귀비의 두터운 신임하에 경선궁의 안살림을 맡아 했고, 예전 장사할 때의 경험과 수단을 이용해 경선궁의 재산을 불리는 데에도 일목했다.

그런데 순헌황귀비가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1904년(광무 8년)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고 서울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에 넘겼고, 이듬해 11월에는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고 외교권을 박탈했다.

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해 고종황제의 통치권을 모두 빼앗고 허수아비황제로 만들었다.

고종은 을사늑약을 인준하지 않고 반대친서를 해외의 유력인사들에게 보내 조약반대운동을 벌여달라고 요청했다.

190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Nicholas) 2세가 만국평화회의 제창자 자격으로 극비리에 고종황제에게 초청장을 보내왔고, 고종황제는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하기 위한 밀사를 파견했다.

특사단의 정사(正使)는 전(前) 의정부참찬 이상설(李相卨)로 삼고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삼아 일본 몰래 헤이그에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세계 각국 대표는 대한제국정부의 자주적 외교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했다.

헤이그특사단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세계 각국 외교수장들과 언론을 상대로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침략현실을 폭로하며 국권회복을 위해 분투했다.

특히 이준 부사는 회의장 앞에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마흔여덟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1907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헤이그특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명성황후의 몸에서 난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 이척(李坧: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을 황위(皇位)에 올렸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 재위 1907~1910)이었다. 순종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태황제(太皇帝)로 물러난 고종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영친왕을 황태자로 세웠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동궁(東宮)의 권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황태자의 통치자금으로 이용될 가능성 있는 영친왕궁의 재산을 몰수하려고 했다.

당황한 태황제(고종)는 영친왕궁의 토지와 재물을 경선궁으로 이관할 것을 분부했고, 태황제궁 주도로 영친왕궁의 토지와 재물이 경선궁으로 이관됐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즉각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경선궁의 토지와 재물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했다.

순헌황귀비는 어쩔 수 없이 영친왕궁의 토지와 재물을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황실재정을 해체시켜 통치자금을 차단할 목적으로 가장 먼저 영친왕궁의 재산을 모두 국유화했다.

그리고는 아무 재산 없는 가난한 동궁 살림을 걱정해주는 척 자신이 후견인을 자처하여 자기 돈으로 황태자를 일본에 유학 보냈다.

명목은 유학이었지만 실은 볼모로 잡아간 것이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순헌황귀비는 최송설당을 불러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이등박문이 곧 우리 경선궁의 재물도 빼앗을 것이야. 숨기려야 숨길 수도 없을 것이니 처분할 수 있는 것은 처분해서 교육사업에 투자하고, 나머지는 사찰에 시주하고 싶네”하고 말했다.

이에 송설당은 여러 사찰을 찾아가 순헌황귀비의 뜻을 전하며 시주했고, 신식교육으로 일제에 맞설 인재를 양성하려는 순헌황귀비의 뜻을 받들어 양정의숙(養正義塾)과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설립 준비를 도왔다.

그 과정에서 많은 스님들과 친분을 쌓았고, 또 교육사업에도 눈을 뜨게 됐다.

순헌황귀비의 예상대로 일제는 황실재산을 국유화하며 경선궁도 국유화했다. 그리고는 궁내부(宮內府) 등의 황실부속기관 관료들을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정리했다. 경선궁 궁녀 송설당도 정리대상에 포함됐다.

더는 순헌황귀비 곁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송설당은 순헌황귀비와 눈물로 작별하고 경선궁을 나왔다.

이때가 1908년 1월경이었다.

궁녀에서 일반인으로 돌아온 송설당은 국동(무교동) 누룩골에서 지내며 수시로 순헌황귀비를 찾아뵙고 그 쓸쓸함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짬을 내 아버지 묘소를 새로 손질했고,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토지와 현금을 종친장학금으로 내놓았다.

대한제국 황실에 드리워진 먹구름은 걷힐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점점 짙어갔다. 일제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피탈했다.

일제강점이 시작된, 이른바 경술국치(庚戌國恥)였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이에 강력 반발하고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순종은 황제의 위에서 강등돼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으로 불렸고, 황태자 영친왕 역시 왕세제(王世弟)로 격하됐다.

1911년 순헌황귀비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는 아들을 그리워하다 병을 얻었고, 끝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쉰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송설당은 귀비의 마지막 가는 길을 눈물로 배웅했고, 청량리 영휘원(永徽園)에 묻히자 몇 날 며칠을 떠나지 못하고 엎드려 통곡했다.

태산갓치 놉흔덕택

해수갓치 깁흔은혜

차세앙보(此世仰報)

래생(來生)으로 기약ᄒᆞ야

가이없이 애통(哀痛)ᄒᆞ나

적막황원(寂寞荒原) 뿐이로세

순헌황귀비를 보내며 눈물로 가사를 지어 바쳤다.

최송설당은 당시 김해지역에 쌀 500석 소출이 가능한 땅을 매입했는데, 그 자금의 출처는 경선궁으로 보인다.

순헌황귀비는 궁궐을 나가게 된 송설당에게 상당금액을 쥐어주며 감사를 표했던 듯하다.

그러나 송설당은 그 돈을 자신이 마음대로 쓰지 않고 장차 영친왕을 위해 쓰기로 하고 땅을 매입해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송설당은 양동생의 둘째 아들 최석두(崔錫斗)를 양자로 맞아들였고, 최석두와 함께 자주 순헌황귀비의 능을 찾아 참배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