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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1-03-04 15:03 (목)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5)] 조선의 마지막 여류시인 최송설당(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5)] 조선의 마지막 여류시인 최송설당(3)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12.05 0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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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최송설당은 그 이듬해인 1912년 무교동 94번지에 저택을 건립했고, ‘송설당’이라고 적힌 현액을 내걸었다.

그리고 순헌황귀비를 대신해 영친왕의 무사를 기도하며 전국 사찰 30개 본산에 상당금액을 시주했다.

경남 창녕의 화왕산 기슭에 있는 도성암(道成庵) 아래의 바위에 새겨진 ‘최송설당’ 각석과 청암계곡 각석, 북한산 각석 등은 그때 절에서 감사의 뜻으로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여성교육자의 길을 걷다

송설당은 그 후 자주 고향 김산에 내려갔다.

양동생 최광익의 맏아들 최석태(崔錫台)를 보내 선천(宣川) 오목동(梧木洞)에 있는 고조부 최천성(崔天成)의 묘를 찾아낸 후 혼유석(魂遊石)과 망주석(望柱石), 장대석(長大石), 향로석(香爐石) 등을 안치했다.

8대조부터 5대조까지의 묘소를 찾아 석물을 안치했다.

1914년, 김산군은 지례군, 개령군 일원과 성주군 일부를 병합해 김천군으로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졌다. 송설당은 김천과 서울을 오가며 의연금을 내 자선사업을 했다.

김천의 교동 빈민을 구제하라며 벼 50석을 희사했고, 김천공립보통학교에 장학금 40원을 기부했다.

서울로 올라가서 경성부인회에 상당금액을 기부했고, 1917년 김천공립보통학교, 김천 금릉유치원, 금릉학원 등에도 기부금을 냈다.

이듬해에도 김천공립보통학교 신축에 쓰라며 50원을 기부했다. 1919년에는 김천시 부곡동 고성산록에 재실 ‘정걸재(貞傑齋)’를 짓고 김천 거처로 삼았다.

1923년 김천에서 고등보통학교 설립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이듬해 고등보통학교설립기성회 발기인대회를 개최해 30만 원을 목표로 기금을 모금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에 모금운동은 지지부진했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단됐다.

1925년 고덕환(高德煥) 등이 다시 기성회를 추진했으나 여건이 여의치 않아 또 중단됐다. 송설당은 이때 유치원과 여자보통학교 설립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1929년 이한기(李漢騏)가 찾아와서 유치원과 여자보통학교보다는 김천고보가 오랜 군민의 숙원이니 김천고보 설립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부탁했다.

“김천고보? 그렇지만 내가 가진 재산으로 고보 설립은 어림도 없을 것 같소.”

예순다섯 살의 할머니 송설당은 고보 설립에 관심이 있었으나 자신의 능력으로는 무리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예상 설립비용은 약 30만 원가량이지만, 얼마가 되던 일단 시작을 할 수만 있다면 지역의 유력자들이 성의를 보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학교 문은 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요. 이미 해인사에 시주하기로 약속한 것도 있고….”

“해인사야 선생님 도움이 없더라도 망하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망했습니다. 그런 우리나라가 장차 일본과 싸워 이기고 독립을 이루려면 미래의 청년들에게 희망을 걸어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젊은이들의 교육사업에 투자하는 것은 독립운동에 투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한기는 송설당을 설득했다.

송설당의 해인사 시주는 사실 핑계였을 것이다. 영친왕이 귀국할 경우에 대비해 사놓은 토지였기에 쉽게 손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친왕이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 한국명 이방자)와 결혼해 일본 왕족 대우를 받게 되고, 1926년 순종이 서거하여 이왕(李王)의 위를 계승한 후에도 일본에 머물게 되자 송설당은 영친왕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송설당은 자신의 재산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 결정하기로 하고 이한기에게 재산조사와 가치평가를 위임했다. 이한기가 재산을 조사하는 동안 송설당은 한해를 입은 이재민 구제의연금으로 벼 100석을 내놓았다.

이한기가 조사해서 평가한 결과 송설당의 재산은 30만 원이 넘는 것으로 나왔다.

“30만 원이면 된다고 했지요?”

“예, 그렇습니다.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기성회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대가 내 재산을 정리해서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에 필요한 절차를 밟아주세요.”

1930년 송설당은 재산정리와 함께 30만 원으로 김천고보 경영을 위한 재단법인 설립을 이한기에게 위임한다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양동생 최광익의 맏아들 최석태를 비롯해 7촌 조카 최동열(崔東烈), 이한기, 김천고보 기성회를 이끄는 고덕환, 경성의전을 졸업한 회생의원 원장 김종호(金鍾鎬), 두 여동생의 아들인 조상걸(曺相傑)과 문창영(文昌永), 이렇게 이사 7명이 선출됐다.

이 사실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보도됐고, 송설당은 전재산 302,100원을 김천고보 설립에 내놓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어서 ‘재단법인 송설당교육재단 김천고등보통학교 창립사무집행자’ 7인의 포고문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1930년 3월 5일과 5월 18일자에 실렸다.

그러자 김천군민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송설당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김천고등학교 내에 마련된 송설역사관 전경. [사진=김천시청]
김천고등학교 내에 마련된 송설역사관 전경. [사진=김천시청]

일제는 조선인의 인문교육을 몹시 못마땅해했다.

일본이 지식적 우위를 차지해야 식민통치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경북도청 학무과는 김천고보 설립을 인가하지 않고 상업 또는 농업의 실업학교로 전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송설당은 인문계 고등보통학교가 아니라면 기부를 취소하겠다고 선언했다.

송설당교육재단의 김천고보 설립추진은 신문보도로 이미 전국에 알려졌다. 그런데 고보학제를 변경하면 기부를 취소하겠다는 송설당의 선언이 다시 신문에 보도됐다.

그러자 전국에서 경북도청 학무과로 항의와 진정이 밀려들어 정상업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학무과에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허가를 미뤘다. 이에 송설당은 직접 해결에 나섰다.

상경해서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아내 사이토 하루코(齊藤春子)를 만나고, “경상북도 학무과에서는 김천고보 인문계 설립을 반대할 이유가 없는데, 총독부 지침이라 허가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소. 김천고보 설립은 김천군민뿐 아니라 주변 군민들의 숙원이기도 하오. 내가 기부를 거두어 들이면 그 원망이 조선총독부로 향할 것이오. 정녕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총독부가 방침을 바꿔야 할 것이오”라고 하며 총독을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다.

총독부는 송설당의 요구를 수용하여 방침을 수정했고, 10월 말 김천고보 설립이 허가됐다. 그러나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송설당재단의 예산안회계를 문제 삼으며 또 다시 김천고보 설립에 제동을 걸었다.

필요경비가 32만 원으로 증액됐는데, 1930년도 재단수익이 예상금액 2만 6천 원 중 1만 원밖에 확보되지 않아서 1만 6천 원의 부족분이 생겼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자 송설당은 즉시 평가액 2만3000원인 서울 저택 ‘송설당’을 처분해 부족분을 매우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해서 이듬해인 1931년 2월 5일에서야 정식으로 ‘재단법인 송설당교육재단’이 인가를 받고 사업에 들어갔고, 3월 17일 총독부 학무국에서 김천고보 설립을 정식 승인했다.

김천고보는 1931년 3월 27일과 28일 양일간 입학시험을 치렀고, 30일 안일영(安一英)을 초대교장에 초빙했다.

서울지역 교사보다 2배나 많은 급여를 지급하며 우수교사도 초빙했다. 5월 9일 강당을 준공했고, 신입생을 받아 입학식을 거행하고 5학급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1932년 1월 정열모(鄭烈模) 교무주임이 승진해 2대 교장에 올랐고, 8월 3일 본관 교사(校舍)가 준공됐다.

1935년 송설당의 만 여든 살을 기념해 김천고보에서 대규모 행사를 거행했고, 5월 9일 개교 4주년을 맞아 교기 ‘청송백설기(靑松白雪旗)’가 제정됐으며, ‘김천고등보통학교 교주 최송설당 여사 기념동상 건설기성회 발기300·경북 인물 기행 2 서부권 준비회’가 결성됐다. 전국에서 1천 명이 넘는 단체와 개인이 보내온 성금으로 동상이 제작됐고, 11월 30일 동상제막식이 열렸다.

송설당은 정걸재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39년 6월 16일 오전 10시 40분 여든다섯 살로 생을 마감하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순헌황귀비 곁으로 갔다.

장례는 학교장으로 진행돼 7일장으로 치러졌다.

전국에서 몰려온 인사들이 애도의 물결을 이루었고, 각 신문이 그 공을 기리는 특집기사를 내보냈다.

1950년 윤효중이 제작한 최송설당의 조각상으로 김천중고등학교 내 송설역사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김천시청]
1950년 윤효중이 제작한 최송설당의 조각상으로 김천중고등학교 내 송설역사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김천시청]

1981년 김천중고등학교 동창회에서 교주 송설당 흉상을 건립했고, 2001년 3월 17일 송설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조직 현판식을 가졌으며, 5월 8일 송설역사 사진전이 개최됐고, 5월 13일 송설역사관 기공식이 거행됐다.

2003년 최송설당 기념사업회가 창립됐고, 2004년 6월 26일 최송설당 기념학술대회가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에서 개최됐다.

2005년 최송설당기념사업회에서 『송설당집』 1·2권을 출간했다.

송설당의 시(詩)세계

송설당은 ‘조선의 마지막 여류시인’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글솜씨를 자랑했다.

순헌황귀비의 묘소 영휘원을 참배하고 지은 「감은(感恩)」, 그리고 난초의 군자다운 자태를 예찬한 「난초(蘭草)를 비롯하여 「석류」, 「춘풍억향원(春風憶鄕園)」, 「파초」, 「희우(喜雨)」 등의 한시 259수를 남겼고, 부모님을 생각하며 지은 「사친(思親)」을 비롯하여 「월야」, 「봉선화」, 「심야독좌(深夜獨坐)」, 「영와(詠蛙: 개구리를 노래하다)」 등의 국문가사 50편을 남겼다.

외람되게 송설당이라 칭한 나를 비웃는가(笑我濫稱松雪)

이내 마음은 뭇 꽃들과는 짝하기 싫었던 것(此心不欲伍群芳)

세월 겪으며 푸름이 우거지는 성질과(可期經歲靑蒼質)

티 없이 맑고 깨끗함을 사랑했을 뿐이지(秖愛無塵皎潔光)

가업이 기울고 실추해 망극한 심정 가없을 때(業墜箕裘情靡極)

여자로 태어난 죄로 한은 길기만 했지(身爲巾幗恨長)

인간 세상 많은 풍상 겪은 액운을(人間多風霜劫)

이다음에 옥황상제 만나면 하소연하리(他日吾訴玉)

송설당은 「송설당원운」에서 자신의 호 송설당의 의미를, ‘세월 겪으며 푸름이 우거지는 성질(松)’과 ‘티 없이 맑고 깨끗함(雪)’이라고 밝혔다.

빈한한 집안의 무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생업에 뛰어들어 힘든 나날을 보냈고, 어른이 되어서는 조상들의 신원을 위해 온몸으로 겪어온 그 풍상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옥황상제만이 그 심정을 알아줄 것이다.

1922년 12월 1일, 송설당은 자신이 그동안 지은 한시와 가사를 모아 『송설당집』을 발간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을 비롯하여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쌓은 실력이었다. 운양 김윤식은 서문에서, “율시 및 절구의 여러 작품은 곱고, 아름다움과 예스러움과 우아함을 겸하여 한 점의 속된 기운 없이 마치 봄꽃이 활짝 피어 흐드러지듯 인공을 거치지 않고도 홍백의 무늬를 이루었다”고 평했다.

여자로서의 삶과 한,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순헌황귀비에 대한 그리움 등을 표현한 시들을 모아 엮은 이 문집은 국내의 인사들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유력인사들에게도 발송됐다.

깊고 깊은 한강물(深深漢江水)

높고 높은 삼각산(高高三角山)

넓고 큰 하늘 그 이상의 존재(昊天在其上)

두 손으로 부여잡아도 오르지 못하리(雙手遠難攀)

「사친(思親: 부모님을 생각함)」이라는 한시다. 결혼을 하지 않고 친정을 돌보며 일생을 헌신한 것은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조상들 신원을 평생의 임무로 삼았고, 궁녀가 되어 그 뜻을 이루었다. 그 효심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득히 생각나네, 동쪽 뜰아래(遙想東庭下)

한 그루 능금나무가 있었지(一樹有林檎)

자애롭기도 하여라, 그 과일 엄히 지키시는(慈兮嚴護實)

까닭은 바로 자식에게 먹이시려는 마음이었네(知是飼子心)

송설당의 한시 「林檎(능금)」이다. 부모의 자애로운 마음을 회상하며 지은 이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어버이의 그 깊은 사랑에 눈시울 뜨거워지게 한다.

하나 버릴 것 없는 시어들로 집약하여 만들어낸 시세계는 정갈하고 넓으며 깊이 있다.

꾸밈없이 절제된 시어를 선택한 송설당의 간결한 한시는 당대의 문인들이 그 작품성을 높이 평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좌산(左山) 이영구(李英九)는 「송설당명」에서, “문장은 절로 베 짜듯 나와 문장가와 여사의 명예를 겸하였다.

한 덩이 정신의 원기는 우뚝하여 격류와 맞선 지주(砥柱: 격류에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황하강의 돌기둥) 같고, 백 편의 아름다운 글은 밝기가 모래를 헤쳐 금을 제련하는 것 같다”고 찬했다.

그리고 송설당의 서정가사는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차별과 한, 고난 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규방가사의 흐름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규방가사는 영남지방 양반가의 부인들을 중심으로 지어졌는데, 이현보의 어머니 권씨가 지은 「선반가(宣飯歌)」와 허난설헌이 지은 「규원가(閨怨歌)」 등이 이에 속한다.

송설당이 고향 김천의 명승지 약수동의 약수가 영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아흔 살 어머니를 모시고 찾아가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은 시 「약슈동」이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효심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그녀의 시에는 이렇듯 어버이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는 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추야감회(秋夜感懷)」라는 시다. 잡념에 사로잡혀 잠 못 이루는 가을 밤, 귀뚜라미, 외기러기소리가 잠을 아주 쫓아버렸다고 푸념하고 있다. 송설당의 가사 또한 한시처럼 문장이 단정하고 간결하다.

참고문헌

『한국 육영사업의 어머니 최송설당』(김창겸. 2008. 3. 25. 경인문화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김천문화원.

·사진 제공_ 김천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