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저녁 8시 목포항구 항동시장을 나와 영암으로 달린다.

어둔 창밖으로 멀리 호남평야와 오른쪽으로 월출산의 윤곽이 보인다. 이곳에서 나오는 무화과는 전국의 8할 정도를 차지하고 부인병과 변비 등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자가 면역성을 가져 농약을 잘 치지 않는다.

꽃이 없어서 무화과(無花果)이지만 봄, 여름동안 잎겨드랑이(葉腋) 열매 안에 작은 꽃이 있으나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뒤에 앉은 누군가 한 곡조 읊조리며 영암으로 가는 분위기를 돋운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

달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석산

가요 영암아리랑은 영암을 전 국민에게 알린 기폭제 역할을 했다.

월출산이 국립공원으로 거듭난 것도 이 노래 덕분 아니었을까? 내가 처음 이 노래를 안 것은 70년대 고향 방앗간 문짝에 붙어있던 하춘하 리사이틀 벽보를 본 이후다.

표석이 멋스러운 월출산 입구.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표석이 멋스러운 월출산 입구.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9시 못 되어 여장을 풀었으나 7월 장마에 밤새 천둥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코 고는 소리, 창문을 흔드는 비바람에 잠을 설쳤다. 아침 7시경 월출산 국립공원까지 가는 데 20분 거리 천황사 야영장 입구에 도착했다.

수 년 전 이곳에 왔을 때는 목포에서 산 조개를 굽고 기타 치며 야영하는데, 떼거리로 옆에서 떠들어 주눅 들던 곳이다.

안개는 돌병풍을 둘러친 바위산을 가렸지만 구름은 걷힌 듯 다시 드리우고, 8시에 산을 오르는데 월출산 표석 아래 박주가리 해맑다.

영어 이름이 우유 풀(Milkweed)인 박주가리는 여러해살이 덩굴식물로 7∼8월에 흰색 꽃이 한곳에 뭉쳐 핀다.

주로 들판에서 자라고 잎에서 나오는 유액(乳液)은 독성이 있어 벌레들이 먹으면 죽는다. 마주나는 잎은 긴 심장모양으로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끝이 뾰족하고 갈색 꼬투리 씨앗에 붙은 털은 옛날 솜 대신 도장밥과 바늘쌈지로 만들기도 했다. 이름도 모르면서 꼬투리를 벌려 하얀 털을 불어 날렸던 것이 박주가리였다.

눈부시도록 춤추며 하늘을 날던 깃에 소원을 실어 보냈던 아련한 시절, 열매가 박을 닮았다 해서 박주가리인데 박 쪼가리라 불렀던 것 같다. 봄에 잎과 줄기를 데쳐서 나물로, 고기와 같이 삶아 먹기도 한다.

하수오와 비슷하지만 울퉁불퉁 하수오 뿌리와 달리 긴 편이다. 씨를 찧어 바르면 지혈과 새살을 돋게 하고 강장·강정·해독제로 쓰며 젖을 잘 나오게 한다.

잎부터 뿌리, 씨까지 못 먹는 것이 없고 하얀 유액은 사마귀를 없애는데 노란 애기똥풀보다 효과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호랑나비 비슷한 왕나비 유충이 유일하게 독이 든 박주가리 잎을 먹는데 애벌레와 나비는 박주가리 독을 지니고 있다가 먹히면서도 천적을 죽인다.

저어새나 어치는 멋모르고 이들을 잡아먹다 깃털이 쭈뼛쭈뼛 해져 결국 토하며 죽는다. 북아메리카에도 비슷한 모나코 왕나비가 있다.

아무튼 박주가리와 왕나비를 통하여 자연의 절묘함과 생태계 연결고리를 다시 생각한다.

구름다리.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구름다리.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구름다리와 그곳으로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산 아래.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등산길에서 바라본 산 아래.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어젯밤 폭우로 불은 계곡물이 걸음을 붙잡는다. 나뭇가지는 비바람에 늘어져 모자와 옷깃을 다 적시고 벌써 등산화 발끝으로 물기가 느껴진다.

“물에 휩쓸릴 수 있으니 돌아갑시다.”

일행들은 어젯밤부터 비 핑계로 산에 가기 싫은 표정이었는데, 오늘은 날씨까지 어설프니 안 갔으면 하는 눈치다.

“좀 더 올라가 봐요.”

나는 밤새도록 비바람이 쳐서 비구름은 어느 정도 물러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멀리 왔으니 구름다리까지만 가기로 마음먹었다.

국립공원지역이라 안내판은 잘 만들어 놓았다. 대팻집·사람주·말오줌대·노각·때죽·사스레피·누리장·예덕나무……. 계곡물이 넘쳐 괜스레 겁나지만 어찌 여기서 멈출 수 있으랴?

올라갈수록 계곡물 무섭게 내려오고 일행들 말소리, 지팡이 부딪히는 소리도 거센 물소리에 묻히고 만다.

“흰 동백꽃 다 졌다.”

“처참하게 떨어졌어.”

풋풋한 노각나무.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풋풋한 노각나무.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하얀 동백을 닮은 노각나무 꽃이 비바람에 낙하유수(落花流水)를 연출하고 있다. 여기서 천황봉 2.7킬로미터, 잠시 갠 하늘은 산 아래 마을을 보여주는 듯하더니 안개로 확 덮어버렸다.

이번에도 심술궂은 월출산 안개 선물을 받으며 빗물과 땀을 섞어 오른다.

합다리나무, 물푸레나무 계곡으로 물안개 필 무렵 염려 했던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안개는 아득한 기억을 들춰내고 신비스런 천상의 세계를 만들어 준다. 8시 30분쯤 갈림길(구름다리0.3·천황산1.4·바람폭포0.2·천황사주차장1.6킬로미터)에서 왼쪽 구름다리로 오르자 정자 대피소가 무척 반갑다.

집중호우 걱정에서 이제 한 시름 놓아도 될 것 같다.

달을 가장 먼저 맞는 산, 넓은 평야에 홀로 솟은 월출산(月出山), 호남 5대 명산으로 꼽히면서 월제악, 월생산으로 불리어 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영산의 정기는 남으로 달리면서 해남의 두륜산과 장흥 천관산을 만들었고, 1988년 제일 작은 국립공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오늘은 안개를 먼저 맞았으나 어쨌든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린다. 남쪽에 무위사(無爲寺), 서쪽에 도갑사(道岬寺)가 있다.

영암의 북쪽은 날카로운 바위산(骨山)이지만, 강진군 남쪽은 완만한 흙산(肉山)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암의 지명도 월출산 바위에서 유래하는데, 움직이는 바위 세 개가 있어 산 아래로 떨어뜨리자 스스로 올라온 것이 영암이다.

백제의 왕인박사와 신라말 도선국사의 탄생지도 이곳이다. 도갑사 해탈문(국보50호), 구정봉 아래 최고도(最高度)의 명성을 자랑하는 마애여래좌상(국보144호)이 있다.

천황봉 1.8킬로미터 남은 사자봉 구름다리, 120미터 높이에 만들어진 52미터 다리가 아슬아슬하다. 아래서 기다리는 일행들에게 미안할 것 같아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노각나무 하얀 꽃 핀 정자에서 물 한 잔, 안개 속의 전화벨소리에 귀 기울인다. 밑에 있던 일행들은 바람폭포까지 왔으니 걱정 말고 도갑사 쪽으로 가라고 한다.

9시 20분 바위능선 말안장 부근(鞍部)에 다다르고 다시 내려가 오른쪽으로 올라선다. 여기서 1.3킬로미터 남은 우뚝 솟은 바위산은 흐릿하다. 바위절벽에 매달린 노란색 나리꽃들이 안개 속에 젖어있다.

9시 25분, 비옷 입은 중년 부부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하는 분들이 외딴 산중에 얼마나 반가운가?

“어느 쪽에서 오셨습니까?”

“경포대에서 6시 출발했습니다.”

“강진에서 오셨군요.”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라 인상이 좋다고 발이 가벼운 일행이 한마디 거든다.

“우린 도갑사로 갑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온산에 노각나무 꽃이 산길마다 하얗다.

“꽃이 흰 동백 같기도 하고 산목련도 닮았어.”

“군복나무.”

껍질무늬가 사슴(鹿) 뿔(角)을 닮아 녹각(鹿角), 노각나무가 됐다. 차나무과 큰키나무로 15미터까지 자라지만 생장이 느리다. 중부 이남에 잘 자라고 모과·배롱나무처럼 줄기가 미끈하나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다.

민간에서는 껍질·잔가지(帽蘭)를 늦가을 햇볕에 말려 간 질환에 달여 마셨다. 수액은 신경통에 물처럼 마시기도 했다.

100여 년 전 미국 식물학자 윌슨이 우리나라 구상나무를 가져 갈 무렵 노각나무 종자를 가져가 조경수로 개량했다고 알려져 있다.

물기를 한층 머금은 바위에 양지꽃, 돌 채송화꽃이 싱그럽다.

꿩의 바람꽃도 안개꽃처럼 더욱 흰빛이고 거무튀튀하지 않은 민달팽이 나무줄기에 붙어있다. 작은 능선 안부(鞍部)를 지나 까만 몸매를 가진 사람주나무를 만난다.

당단풍·조릿대·광대싸리·청미래덩굴·노린재·신갈·쇠물푸레·국수나무들과 각시나리, 까치수염도 안개와 어울려 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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