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정월대보름, 겨울 하늘은 푸르게 시려 더 춥게 느껴진다.

아침 8시 반경 울산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리지만 중간에 절집에 들러 보름 밥을 먹고 왔으니 벌써 오후 1시가 됐다.

산불감시초소엔 사람대신 입산자 기록부만 남아있고 온천수 저수조에는 하얀 김이 설설 피어오른다.

추운데 산에 가지 말고 온천에 몸이라도 담갔으면 좋겠지만 마음먹고 왔으니 걸음을 재촉한다.

매를 닮은 봉우리

20분 정도 올라 계곡방향으로 온천장 내려가는 길인데 앞서가던 친구는 벌써 보이지 않고 사진 찍느라 하마터면 모랫재에서 다른 길로 내려갈 뻔 했다.

오른쪽으로 다시 오르는데 황토색 흙냄새와 소나무 향내. 걷기 좋은 소나무 호젓한 오솔길 정겹게 구부러졌다.

얼추 20미터쯤 되는 금강소나무가 호위무사처럼 섰고 계곡너머 서쪽 산에는 해가 만든 실루엣, 햇살과 어우러진 산의 외곽이 부신 듯 흐릿하다.

코르크층이 발달한 굴참나무 숲.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코르크층이 발달한 굴참나무 숲.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여흥 민씨 묘지에서 정상까지 3.6킬로미터인데 갈 길이 바쁘다. 군데군데 물통 몇 개씩 산불방지에 쓰려고 놓은 듯하다.

마치 고로쇠 수액통 같지만 비상시 목마른 사람들에게 목을 축일 수 있을 테고, 불도 끌 수 있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라 생각된다.

10분 더 올라가는데 남쪽 경사지에는 줄기 두꺼운 굴참나무 군락지다. 껍데기 통째로 뜯긴 나무들이 애처롭다.

수십 년 전 피해를 입은 것인지 밑둥치 부분은 오래되어 까맣고 위쪽은 겨우 목숨만 붙어있다.

과거에는 코르크층이 발달한 굴참나무줄기를 벗겨 바다그물을 띄우거나 표시하는 부표(浮標), 낚시찌·방수재료·병마개·탄약통마개 등으로 다양하게 썼다.

그러나 와인 마개만큼은 아직도 굴참나무 코르크를 채취해서 쓴다.

스티로폼 종류로 바꾸고 있지만 술맛이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생나무 껍데기를 벗겨 가공한 코르크는 자연을 배려하지 못한 비윤리적이므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코르크(cork)는 식물의 줄기나 뿌리부분에 만들어지는 보호조직으로 단열·방음·전기절연·탄력성이 뛰어나다.

이베리아반도의 스페인, 포르투갈, 지중해에 상록교목 코르크나무는 따로 있다.

와인을 세워두면 주둥이 부분에 틈이 생겨 맛이 떨어진다.

코르크가 마르지 않도록 눕혀 보관하는데 산화를 막기 위해 산소를 차단하는 것이다.

오후1시 40분 4번 구조지점 팻말 있는 헬기장이다. 정상까지 3.1킬로미터, 10분 더 올라 6번 구조지점엔 소나무가 더 좋다. 보폭을 넓혀 걸으니 땀이 뚝뚝 흐르고 연신 코를 푼다.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긴 하지만 격렬하게 운동을 하거나 뜨거운 음식을 먹으면 콧속의 모세혈관이 넓어져 콧물이 자주 나오게 된다.

바위, 돌, 오솔길, 소나무, 진달래, 신갈나무, 각자의 이웃들이 어우러져 자연을 연출하고 있다.

햇볕이 내려 금수강산에 꽃을 덧댄 것처럼 찬란하게 비추니 금상첨화(錦上添花)요, 소나무, 기암괴석에 햇살을 얹어 놓으니 비로소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산 아래 계곡으로 골이 깊어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다람쥐, 텃새, 겨울잠 자는 이 산 주인들을 깨우고 싶진 않다.

“남원산성 올라가 이화문전 바라보니 수지니 날지니 해동청 보라매 떴다 봐라 저 종달새 석양은 늘어져 ~ ”

해 기우는 산과 딱 어울리는 노랫가락 한 구절 읊조린다.

무덤 한 개 또 지나자 소나무 껍데기는 확실히 각양각색이다.

나무에 타일을 붙여 놓은 듯 삼각, 오각, 거북등, 갈라져 잘고 촘촘한 것, 다이아몬드형 등 다양한 예술작품을 마주한다.

오후 2시 무렵, 서산의 해를 막고선 소나무, 그야말로 곧게 뻗어서 통직(通直)하다. 모자 벗고, 장갑 벗고, 땀 닦고, 코 닦으며 기록하고 바쁘다.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 같아 친구에게 지팡이를 건넨다.

걸어온 뒤쪽 바라보니 온천 너머 푸른 동해, 원자력단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흰색 돔(dome)모양으로 만들어진 발전소는 1981년부터 공사비 2조 원 정도를 들여 1990년 2월에 완공되었다. 한국전력·프랑스알스톰·한국중공업·동아건설 등이 설계·시공했다.

우리나라 전력은 30%를 원자력에, 나머지는 화력발전소 등에 의존하는데 이곳에서 약13% 정도를 공급한다.

현재 6기의 상업용 원자로가 가동되고, 앞으로 4기가 추가 건설 중이거나 예정되어 있다. 1978년 양산 고리1호기를 시작으로 20개 정도가 운전중이다. 미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독일 다음으로 원자력 강국이나 유사시 외곽으로 긴급 대피할 자동차도로가 부족한 실정이다.

2시 15분, 소나무 줄기는 위로 올라갈수록 금빛을 띄는데 10미터 위쪽은 살결마냥 색깔이 고와서 미인송이다.

거꾸로 선 늘씬한 다리는 햇살 받아 관능적이다. 정상까지 1.6킬로미터 30분 거리. 길가에 놓인 나무 팻말이 돋보인다.

북사면의 그늘마다 흰 눈이 군데군데 남았는데 어두운 숲의 그늘과 대조적이다.

확실히 명암이 뚜렷한 겨울 산, 동해를 굽어보는 응봉산은 산세가 험하다. 매사냥을 하던 곳이어서 매봉산, 봉우리가 매를 닮았다고 응봉산(鷹峯山), 가곡산(可谷山)으로도 불린다.

동쪽 기슭에 덕구온천·온정골, 서쪽 덕풍계곡은 폭포와 원시림이 비경이다. 온천에서 원점회귀 구간을 많이 이용한다.

응봉산에서 바라본 동해.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응봉산에서 바라본 동해.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응봉산 정상 표지석.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응봉산 정상 표지석.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올라가는 왼쪽 봉우리 쳐다보니 매를 닮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맨 처음 산 이름 붙인 사람은 매를 다루던 응사(鷹師)가 아니었을까?

보는 이에 따라 주관이 개입됐을 것이다. 기원전 초원에서 시작된 매 사냥은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때 응방(鷹坊)이 있었을 정도로 성했다.

칭기즈칸이 사냥하다 물을 마시려는데 하얀 매가 날아와 손을 쳐서 세 번이나 못 마시자 활을 쏴 죽였다.

나중에 보니 샘물에 독사가 죽어 있었다. 후회한 칭기즈칸은 목숨 구해준 송골매를 국조(國鳥)로 섬겼다.

송골매(숑홀)는 흰색 매, 보라매(보로)는 가슴털이 붉은 매, 길들인 사냥매를 수지니, 야생매는 날지니다. 이러한 매들을 아울러 해동청(海東靑)이라 불렀다. 여러 가지 매 이름은 몽골에서 온 것이다. 매봉·응봉의 산 이름은 서울, 인천, 삼척, 남해를 비롯해서 꽤 많다.

두 번째 헬기장에서 눈을 밟으니 오후 2시 20분이다. 10분 더 지나 검푸른 바다가 눈에 잘 들어온다. 얼음으로 덮인 가파른 길 오르기엔 미끄럽다. 눈 쌓인 바닥을 조심스레 딛느라 종아리가 당기지만 넓은 세상이 시원하다.

푸른 물결 넘실넘실 동해를 창파라 부르니 2천여 년 전 울진 파단국(波但國·波朝國), 강릉의 예국(濊國), 삼척 실직국(悉直國)을 창해삼국(滄海三國)이라 했다.

이들은 자주 전쟁을 벌였는데 실직국이 파단국을 침략하나 예국으로부터 실직국도 공격당해 안일왕(安逸王)은 울진으로 피난하였다. 소광리에 안일왕산성이 있다. 예국은 고구려에, 실직국은 사로국에 합병된다.

2시 45분, 해발 998.5미터 정상에 닿는다. 뒤쪽으로 칼바람이 세차게 불던 어느 한겨울에 왔을 땐 추워서 덜덜덜 떨었다.

두 팔을 올려 만세를 부르면 1천 미터 되는데 999인가? 양수의 으뜸인 9로 맞추려 했을 것이다.

멀리 서북쪽으로 백암·통고·함백·태백·검봉산이다. 동해를 보니 원자력단지, 왼쪽 삼척으로 유류저장소 둥근 지붕이 흐리고 정상 표지판 뒷길은 가곡·풍곡이다.

주목·단당풍·쇠물푸레·졸참·신갈·진달래·철쭉·소나무들이 같이 자란다. 여기서 오른쪽 1시간 더 내려가면 원탕(源湯), 2.9킬로미터다.

둘이 번갈아 사진을 찍는데,

“셔터 눌러 드릴게요.”

조금 전 만났던 부부다.

두 사람을 위해 나도 몇 번씩 셔터를 눌러 주었다. 산은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착하게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산에 들면 영감을 받을 수 있다.

오후 3시 얼어붙은 눈길 내려가는데 굉장히 미끄럽다. 3시 45분, 붉은 금강소나무에 멋지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굴참나무 군락을 만나고 길바닥에 반짝이는 것이 석영이라 했더니 운모라 한다.

“반짝이는데 수정 아닌가?”

“유리 같다.”

맞다, 아니다. 티격태격하다 더 이상 확전은 자제하기로 했다. 석영(quartz 石英)은 수정, 운모(mica 雲母)는 얇게 벗겨지는 유리에 가까워서 내가 진 것 같다.

제1헬기장 부근에는 황토색 흙인데 탐스럽다. 민씨묘 지난 4시경 원탕 갈림길 모랫재에 선다. 바위와 오래된 소나무 능선길이 걷기엔 좋다.

4시 15분 원점회귀. 전체 13킬로미터 3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먼지떨이 기계 덕분에 흙먼지 묻은 신발과 옷을 잘 털었다.

3월에 오른 산꼭대기는 울진·삼척 경계지점, 등산길은 삼척 가곡면 풍곡리와 울진 북면 덕구리 쪽이 대다수다. 우리는 능선을 두고 계곡의 온정골 원탕 길로 내려간다. 원탕이 중간지점인데 원탕에서 온천입구까지 4킬로미터 정도다.

급한 경사길 바람에 잔설이 날린다. 멀리 동해는 흐려서 잘 보이지 않고 신갈나무들이 산비탈에 서서 바람을 맞는다.

10시 15분경 대왕소나무라 불리는 거대한 몸집들의 원시림이다. 어젯밤 비에 잘 씻겨선지 향긋한 솔 내음이 상쾌하다.

숲이 만드는 살균물질 피톤치드다.

심리적 안정감, 말초혈관 단련, 심폐기능 강화, 피부병 예방, 항암, 항산화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피톤치드 발산은 산중턱이 최고다. 내려오면서 숲의 공기를 깊이 마셨다가 천천히 뱉으며 배로 숨 쉰다. 복식호흡이다.

언제부턴가 편백나무는 피톤치드의 상징이 됐다. 일본원산 히노끼(Hinoki)로 부르는 편백나무에 열광하며 숲 치유의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굳혀놓았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 상실과 지나친 상업화에 밀린 것이 아닌가?

다행히 국내대학에서 소나무 피톤치드 함량이 편백나무보다 높다고 증명했지만 섭섭함이 남아 있다. 소나무에 관심과 애정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

이쪽 구간은 오르기엔 숨차고 힘들므로 하산 길에 봐야 멋진 소나무를 관찰할 수 있다. 이산에 와 보지 않고서 원시림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산불로 그을린 심재부, 소나무는 속까지 다 보여준다.

10시 45분 넋을 놓는데 어느덧 계곡 물소리에 섞인 새소리다. 진달래 흐드러진 무인지경, 소나무에 1시간 동안 넋을 뺏겼다.

바람은 여전히 모자를 벗긴다. 11시경 포스교. 정상까지 2시간 거리, 내려오는데 1시간 걸렸다. 산괴불, 생강나무 꽃도 노랗게 폈다.

어젯밤 내린 비에 계곡물 넘쳐흐르니 물소리에 귀먹겠네. 바위에서 떨어지는 하얀 물빛, 연못은 마치 온갖 산속의 약초를 달이는 약탕기처럼 부글부글 끓는다. 기화이초(奇花異草)를 달인 누런 보약이다.

덕구온천 원탕.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덕구온천 원탕.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11시 10분경 원탕에 닿는다. 고려말엽, 활 잘 쏘는 사냥꾼이 멧돼지를 쫓는데 찾을 수 없었다. 계곡 쪽을 내려오자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고 화살 맞은 멧돼지가 온천수에 들어갔다 나오니 금방 상처가 나아 달아났다고 한다.

그렇게 발견한 것이 덕구온천이었다. 1970년 이후 본격적으로 개발했지만 교통은 여전히 불편하다. 오히려 접근성이 떨어져 그나마 수질이 덜 변했다.

섭씨35도 알칼리성으로 피부병, 신경통에 효과가 있다. 여기서 4킬로미터의 송수관으로 온천수를 송출, 아래쪽의 온천탕, 호텔, 콘도 등에 공급한다.

1980년 초까지 칸막이 포장만 둘러친 노천탕이었으나 지금은 족욕탕(足浴湯)이다. 5~6시간 산을 돌아 발을 담그니 신선이 된 듯 기분도 날아간다.

웃통 벗고 배불뚝이 자랑하는 몰상식 한 것보다 낫지 않나. 송수관에 손을 얹으니 따뜻하다.

11시 25분 출발, 효자샘에서 물 마시고, 10분 더 내려가서 연리지(連理枝)를 만난다. 하나 된 남녀의 사랑으로 비유해서 흔히 사랑나무로 부른다.

두 나무가 맞닿아 가지가 붙으면 연리지(連理枝), 줄기가 붙으면 연리목(連理木)이다. 바람에 흔들리기 때문에 가지가 이어진 연리지는 잘 보기 어렵다.

“애틋함은 얼마나 남아있나?”

“살기 바쁜데 무슨?”

“나무가 사람보다 낫네. 저렇게 밤낮 없이 붙어살고 있으니…….”

11시 45분 모랫재 갈림길(덕구온천·원탕 2킬로미터)이다. 모릿재까지 오르막 0.5킬로미터. 5분 지나서 청운교, 백운교, 취향교…….

곳곳에 간이철교, 철제난간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볼거리와 편의를 위하는 것은 좋지만 세계의 다리라는 주제도 거슬린다.

이런 아이디어를 낸 공무원들은 애를 먹었을 테고 주변 자연경관과 어울리지 않아서 이질감을 준다.

산조팝나무는 바위에서 새순을 달고 나오려 하고 정오 무렵 용소폭포다. 용이 놀던 폭포라는데 우리나라 어느 폭포든지 용이 살지 않은 곳이 없다. 하늘로 올라간 그 많은 용들은 어떻게 됐을까?

12시 15분 덕구온천 대중온천탕까지 내려왔다.

차를 가지러 다시 아스팔트길 거슬러 오른다. 전체 13킬로미터 12시 30분 원점회귀. 자동차 연료가 바닥나서 부구까지 8킬로미터를 겨우 왔다. 하마터면 견인차를 부를 뻔 했지만 내리막길이라 다행스러웠다.

덕풍계곡.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덕풍계곡.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7시 40분, 덕풍계곡에 아침 안개가 다 걷히지 않았다. 고향산장 주인 심씨네 형님은 이곳에서 태어나 여러 해 도시로 전전하다 정착했다. 등산객을 상대로 민박과 안내자 역할도 한다.

“차가 없던 시절엔 대여섯이 어울려 계곡으로 응봉산 넘어 덕구까지 걸어 다녔어.”

“그랬었군요.”

계곡에 물이 불어 멀리 올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일러준다. 20분가량 앉아 안부 얘기며 커피 한 잔 마시고 우린 산으로 걸어간다. (다음 회에 계속)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