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천상에 백옥 같이 흰 옥황상제 딸이 있었는데, 어쩌다 북쪽의 바다 신을 사모하다 죽고 말았다.

공주의 무덤에 하얀 목련꽃이 피었는데 모두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남쪽의 꽃잎은 햇볕을 받아 잘 자라서 상대적으로 덜 자란 쪽보다 커 북쪽으로 치우친다.

이른 봄에 피는 백목련과 목련, 5∼6월경 피는 후박나무라 부르는 일본목련, 6~7월의 산목련나무가 있다.

일본목련은 꽃이 커면서 위를 향하고 산 목련은 아래로 핀다. 북한에서는 나라꽃으로 돼 있다.

역사의 고비마다 한 남긴 고갯길

정상의 미역줄나무는 찬바람 맞고 자란 탓인지 잎을 크게 펴지 못하고 방패막이가 된 병꽃나무가 벌써 꽃 대신 호리병을 달았다.

한자로 주흘산(主屹山), 우뚝 솟은 산이라는 뜻이다. 사진 찍고 멀리 바라보아도 발아래는 안개에 갇혀 무인지경을 연출해 내고 있다.

안개 산을 걸어 다시 영봉으로 걷는다. 스치는 쇠물푸레와 까치수염, 미역줄 나뭇잎에 신발 젖어도 산길은 즐겁다. 물푸레나무가 다양한 색깔을 띠는 건 쉽잖다.

습기가 많아선지 이곳의 나무껍질은 마치 후리후리 하게 커서 벽오동 색깔을 닮았다. 암석지 능선의 껍질은 하나같이 바위색인데 비해 악천후 지대에선 딱딱한 껍데기가 악어등 마냥 울퉁불퉁하다.

산목련 봉오리.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산목련 봉오리.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잘 생긴 물푸레나무.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잘 생긴 물푸레나무.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영봉(靈峰) 1,106미터에 닿으니 거의 40분 정도 걸렸다. 뒤에 오는 일행들을 위해 우리는 미리 점심준비를 한다.

집에서 별 맛 없어도 산중음식은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무색할 정도다. 풋고추에 너나없이 감탄한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안개 덮인 산이 조금씩 햇살을 보여준다.

땀을 많이 흘리고 밥까지 먹었으니 체온이 떨어져 빨리 이동해야 한다는 것 뿐, 두 팀으로 갈라지기로 했다.

2조는 제2관문, 1조는 능선길 따라 조령산으로 가기로 했다. 12시 30분, 지금부터 부지런히 걸어도 4시간 이상은 족히 걸릴 것이다. 보폭을 넓히면서 다시 걷는다.

군데군데 산목련이 눈에 띄지만 꽃은 참으로 귀하다. 귀할수록 까다롭고 절개가 있다 했지 않은가?

그래선지 옮겨 심는 것을 싫어하고 오로지 깊은 산속에 자라길 고집하는 정결한 나무.

수줍음이 꽃말이듯 소복한 여인 불쑥 나올 것 같아 발길을 멈춘다. 앞서 가는 두 사람 간격은 자꾸 벌어지고 부봉으로 걸음을 옮긴다.

마패봉은 충주, 괴산, 문경과 경계를 이루는데 암행어사 박문수가 마패를 걸어놓고 쉬어 갔다는 데서 비롯됐다.

하늘재(525미터)는 충주와 문경을 잇는 고개로 넘으면 바로 충주 남한강에 닿는다. 신라 아달라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처음 뚫은 백두대간 고갯길, 죽령은 2년 뒤 개척 됐다고 한다.

신라 때는 계립령(鷄立嶺), 이후 대원령, 한티, 천티 등으로 불리다 하늘재로 굳어졌다. 죽령이나 계립령을 넘어서면 남한강 물길을 만날 수 있으니 영토다툼이 치열했던 요충지였다.

고구려 온달을 비롯해서 궁예가 상주를 칠 때도 이 고개 넘었고,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가 금강산으로 갈 때 고갯마루에서 울었다.

홍건적을 피해 공민왕 행렬도 여기 거쳐 청량산으로 갔다. 태종 때 문경새재가 열리면서 민초들은 관리의 횡포를 피해 꾸준히 하늘재로 오갔으니 한(恨)이 서린 길이다. 추풍령에서도 큰길을 두고 괘방령으로 다녔다.

“산길이 아니라 역사며 애환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지만 우리나라는 산길로 통한다.”

“제법 하네.”

소원성취 탑.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소원성취 탑.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영남지방에서 한양 가는 과거 길은 남쪽 추풍령과 북쪽에 죽령, 가운데 새재가 있었는데 대개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추풍낙엽 추풍령이요, 대나무에 미끄러지는 죽령의 금기(禁忌)가 있어 새재는 과거급제 길로 이름났다.

문경새재를 넘으면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대서 문희경서(聞喜慶瑞), 문경이 됐다. 경상·충청 경계 조령관 용마루 빗물이 남으로 흐르면 낙동강, 북쪽을 타면 한강이 되었다.

부봉으로 오르기엔 시간이 바쁠 것 같아 동암문으로 직진이다.

동암문은 조령산성의 동쪽 문으로 성문 쌓기에 썼던 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는 산 꾼들의 말에 귀동냥 한다. 동암문 삼거리에서 동화원으로 내려간다. 계곡으로 다래넝쿨이 터널을 만들었다.

물박달나무 껍질이 종이처럼 일어나서 기세를 뽐내고 우리는 고개를 숙이며 내려간다. 발밑에 물이 비치고 낙엽송 군락이 좋다.

숲의 천국 여기가 낙원 아닌가? 웬 산중에 낭만적인 노래가 흐른다. 동화원 휴게소 가까이 왔다는 것이리라.

새재 길과 만나는 지점이 휴게소. 산길에서 흙길로 바뀌었을 뿐 길은 그대로다. 소원성취 돌탑 나무 정자에 앉았다. 조령산까지 갈 길이 아직 멀었으니 짐을 확인한다. 물 두병, 비상용 사탕과 도시락 한 개 있으니 다행.

제3관문을 두고 우리는 조령산으로 오른다. 관문 왼쪽에 산신각이다. 장계(狀啓)를 가지고 새재를 오르던 사령이 호랑이에게 물려죽었는데, 화난 임금은 호랑이를 잡아들이라고 명을 내렸다.

군사들은 호랑이를 잡지 못하고 어명을 놓고 돌아갔는데 나중에 와보니 호랑이는 스스로 죽었다 한다. 새재에는 호환(虎患)이 없어지고 산신과 호랑이 넋을 기리기 위해 산신각을 세웠다.

신선암봉 가는 길, 왼쪽이 주흘산이다..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신선암봉 가는 길, 왼쪽이 주흘산이다.. [사진=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조령산신각을 끼고 나무계단을 한참 오르는데 등산객들이 내려온다. 여기서 조령산 정상까지 4~5시간, 지금 2시 반이어서 중간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오른쪽이 괴산 연풍 방향,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데 건너 산에는 우리가 두고 온 부봉, 주위의 무수한 봉우리는 저마다 우뚝 서서 난형난제(難兄難弟)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신선암봉(神仙巖峰 937미터)은 조령산 종주길 가운데 바위 길로 눈앞이 시원하다. 내려다보니 그야말로 그칠 것 없는 천연요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상주에서 북쪽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권율 사위이자 여진족을 물리친 신립을 보내지만 요새인 새재를 두고 충주 탄금대에서 싸우다 죽는다. 전설에는 한을 품은 여인의 복수에 의해 탄금대로 갔다 한다.

우리가 걷는 1시 방향으로 돌아앉은 주흘산이다.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니 한양에 궁궐을 지켜줄 산이 없었다.

전국에 주산(主山)을 모집했는데 앞 다퉈 모여들었다. 뒤늦게 주흘산도 한양으로 가던 길, 삼각산이 먼저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해 돌아오는 길에 신경질 나서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고 한다.

한 사람은 저 산을 닮아 투덜대니 어찌 산행이 즐거울까? 돌아오며 신선암봉으로 흘러 온 봉우리 하나 신경질봉이라 불러주었다.

<탐방로>

● 정상까지 5킬로미터, 2시간 45분 정도

*전체 13킬로미터 8시간 45분

제1관문 주차장 → (25분)제1관문(주흘관) → (25분)여궁폭포 → (30분)혜국사 → (50분)대궐샘 → (30분)대궐터 능선 → (5분)제2관문 갈림길 → (10분)정상 → (40분)주흘영봉 → (1시간 15분*점심 휴식 포함)삼거리(하늘재·마패봉·부봉) → (15분)부봉삼거리 → (20분)동암문 갈림길 → (40분)소원탑 → (15분)제3관문(영남제일루) → (50분)제2관문 갈림길 → (50분)제2관문(조곡관) → (5분)산불조심표석 → (30분)제1관문 → (20분)주차장

* 바위구간 많은 곳으로 3~8명 정도 걸은 평균 시간(기상·인원수·현지여건 등에 따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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