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905년,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벌인 제국주의 전쟁(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을 침탈하기 시작했다.

7월 27일, 일본 수상 가쓰라는 미국 육군장관 테프트와 밀약을 맺었다. 주요내용은 ‘필리핀에서는 미국의 지배를 인정하고 대한제국에서는 일본이 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8월 12일에는 영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국제적으로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은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구체화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나다

11월 9일, 특명전권대신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에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統監府)의 지배를 받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 한때 을사조약이라고 했으나 조약 체결 과정의 강압성을 나타내기 위해 을사늑약으로 정리되었다.

늑약은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이다) 체결을 강요했다.

11월 17일 고종황제는 불참하고 8명의 대신이 참가한 가운데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 대신들과 무장한 일본 헌병들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속에서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끝까지 조약을 반대했다.

그러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찬성해서 조약은 통과되었다.

조약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은 ‘을사오적’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대한제국의 조약체결권자였던 고종황제는 끝까지 ‘을사늑약’을 반대하여 승인하지 않고 비준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무효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무력을 동원해서 조약을 강제로 집행했다.

외교권을 포함한 국권의 일부를 일본에 강탈당한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국가의 지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반도 전역은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였다.

시종무관 민영환은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작성하고 자결했으며,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는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항의서한을 작성한 다음 역시 자결하는 등 많은 애국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본에 저항했다.

『황성신문』의 주필로 있던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온 국민의 울분을 대신했다.

경북 문경에 살고 있던 이강년은 나라의 주권이 일본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나서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이강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을 거듭했다. 결론은 다시 의병을 일으켜서 일본과 싸우는 길밖에 없었다.

10년 전 충북 제천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호좌의진(湖左義陣)’에 가담해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강년은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갔다.

1907년 봄부터는 예전의 동지들과 함께 원주, 횡성, 강릉 등지를 은밀하게 돌아다니면서 뜻을 함께 할 사람들을 모았다.

그해 6월, 고종황제는 을사5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대한제국의 주권수호를 호소하기 위해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그러자 일본은 7월 20일,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그 소식을 들은 이강년은 “세상이 캄캄해지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고 하면서 통곡했다.

일본은 7월 24일에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내정을 장악했으며, 7월 27일에는 언론 탄압을 위한 광무보안법을 공포했다.

8월 1일부터는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드는 데 최대 장애물이었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자 시위대(侍衛隊: 임금을 호위하는 부대) 대대장이었던 박승환은 크게 반발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승환의 죽음을 도화선으로 시위대가 봉기했고, 강화와 원주에 주둔하던 진위대(鎭衛隊: 지방의 질서 유지와 변경 수비를 목적으로 설치된 최초의 근대적 지방군대)는 무기 반납을 거부하면서 역시 봉기했다.

얼마 전까지 의병 탄압에 앞장섰던 원주의 진위대가 봉기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강년은 그들과 합세하기 위하여 밤길을 달려 원주로 갔다.

진위대가 반납을 거부한 무기를 확보한 이강년은 의병대 모집에 박차를 가했다. 며칠 만에 수백 명의 지원자가 모여들었다.

다시 제천으로 돌아온 이강년은 8월 13일, 봉기를 알리는 「통고문」을 발표했다.

“아, 슬프도다. 오늘날 나라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하리오. 흉악한 칼날로 임금을 협박하여 그 지위를 폐하고, 수레에 태워 달아나 일본으로 납치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궁궐의 문을 닫다 걸어 안부를 통하지 못하게 하네. (…) 지나간 먼 세월에 어찌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었으며, 먼 뒷날에 어찌 다시 이런 일이 있을 것인가.

아, 슬프도다. 국가가 갑오년 이후로 문득 왜적에게 협박당하여 여러 차례 욕을 당하였으나 큰 원한을 씻지 못하더니, 오늘의 변고에 이르렀다.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변고의 망극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무릇 혈기 있는 무리라면 누가 피눈물을 흘리고 울음을 삼키면서 이 도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으랴!”

10년 만에 다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은 빼앗긴 조국의 주권과 산하를 되찾을 때까지 일본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호좌의진의 유격대장이 되다

이강년은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18대손으로 1858년(철종 9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 도태마을에서 아버지 이기태(李起台)와 어머니 의령 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낙인(樂寅)이고 호는 운강(雲崗)이다.

이강년이 태어난 도태마을이 있는 가은읍은 충청도 괴산과 경상도 상주가 만나는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희양산과 백화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대야산과 조항산 등이 둘러서 있는 아늑한 고장이었다.

이강년 집안이 영남지역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효령대군의 10대손 이성민 때부터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이었던 김자점이 숙청을 당하자 그와 가까웠던 이성민은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으로 은거했다.

12세손 이세형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정적들로부터 탄핵을 받아서 귀양을 가자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사간원 정언으로 있던 14세손 이윤욱은 ‘동궁을 잘 보필하여 이끌 것과 효의 이치로 다스릴 것, 백성들의 재물을 탐내는 벼슬아치들을 배척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처럼 노론 성향이 강한 왕족 집안에서 이강년은 태어났다.

이강년기념관 앞에 세워진 이강년의 동상. [사진=문경시청]
이강년기념관 앞에 세워진 이강년의 동상. [사진=문경시청]

이강년의 어릴 적 이름은 양출(陽出)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 때 꿈속에서 크고 밝게 빛나는 태양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강년은 세 살 때 천자문을 떼었으며 여덟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아이답지 않게 의연한 모습을 보여서 주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이강년은 큰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커가면서 여덟 자가 넘게 키가 자란 이강년은 점점 기골이 장대해지고 눈빛은 형형해지면서 위엄이 넘치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무인이었던 큰아버지의 영향으로 무예를 연마한 이강년은 1880년(고종 17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청 선전관이 되었다.

그 무렵 한반도는 외세의 물결 속에서 개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이강년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세상이 변해가는 것에 실망한 나머지 벼슬길에 올라 출세하는 것을 일찌감치 단념했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등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이강년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후 오랫동안 고향에 은거한 채 학문과 무예 단련에 몰두하면서 훗날을 대비했다.

1894년 가을, ‘척왜양이(斥倭攘夷)’를 내세우며 봉기했던 동학농민군은 일본의 탄압을 받고 실패하고 말았다.

우수한 무기를 갖추고 잘 훈련된 일본군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었다. 1년여 동안 이어졌던 동학농민혁명은 그렇게 막을 내렸으나, 이때 참가했던 동학농민군은 뒷날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으며 그 정신은 3·1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개입했던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다가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8월 20일 새벽,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이 한반도에서 저지른 가장 끔찍한 만행 중 하나로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1895년 11월, 일본의 후원으로 총리대신이 된 김홍집은 단발령을 선포했다. 유교사상이 뿌리 깊은 조선에서 상투를 자르는 것은 큰 불효였다.

백성들은 단발령을 심각한 박해로 받아들였다.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명성황후시해사건에 이어 단발령까지 선포되자 전국의 유생들은 크게 분노했다.

마침내 일본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남 북부지역에서도 명문가문이 주도하는 의병대가 일어났다.

이강년은 안동에서 권세연이 일으킨 의병에 합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에 의해 안동의 의병대는 이내 무너지고 말았다.

그때 충북 제천지방에서 일어난 ‘호좌의진’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이 중심이 되어 제천과 단양 지역에서 의병을 모은 호좌의진은 친일 관리를 처단하고 세곡(稅穀)을 군수물자로 확보해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친일파인 단양과 청풍의 군수를 처단하고 충주까지 나아가 관찰사를 처단하는 등 한창 기세를 올리는 중이었다.

유인석은 1842년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아버지 유중곤과 어머니 고령 신씨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이 되던 해 족숙(族叔) 유중선의 양자로 들어간 유인석은 유중선의 증조부 유영오와 교분이 있던 당대의 뛰어난 성리학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갔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유림의 대변자로 조정에 초청된 이항로를 모시고 서울에 온 유인석은 혼란한 정국과 어지러운 민심을 목격하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일어나자 경기도 지평과 제천 일대의 유생 수백 명이 의병을 일으키고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이에 유인석은 ‘복수보형(復讐保形: 국모의 원수를 갚고 의리를 지킨다)’을 주장하는 격문「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발표하면서 의병장에 올랐다.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영남의 유림세력은 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의진의 활약에 잔뜩 고무되었다. 침체한 영남지역의 의병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호좌의진이 남쪽으로 내려온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이 소식을 듣고 이강년은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1896년 2월 23일, 이강년은 완장리에서 괴산 삼송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주막에서 산포수 10여 명을 모았다.

그들과 함께 도태 장터로 가서 다시 장꾼들을 상대로 의병을 모집했다. 이어 문경시 가은읍에 있는 왕능 장터로 가서 마침내 봉기하니 그때까지 모인 의병대는 300여 명에 이르렀다.

이강년의 의병대는 도주하던 안동관찰사 김석중과 순검 이호윤, 김인담을 체포했다. 김석중은 일본군 앞잡이 역할을 하면서 단발령을 강행하고 의병을 토벌하는 등 동족에게 행패를 부려서 원성이 자자했다.

2월 25일, 이강년은 ‘난신적자(亂臣賊子: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부모를 괴롭히는 자식)는 누구든지 처벌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문경시 농암면의 농암장터에서 김석중을 효수했다.

기세가 오른 이강년은 호좌의진에 사람을 보내서 연합작전을 펼치고자 했다. 당시 호좌의진은 충주 부근의 10여 개 고을을 장악하는 등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강년의 연락에 호좌의진의 장수 하나가 부대를 이끌고 문경으로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강년은 문경시 마성면 모곡리에서 호좌의진 지원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도착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호좌의진은 일본군의 총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이강년의 의병대는 밤이 깊어지자 문경시 마성면에 있는 석현산성(石峴山城)에 들어가 은신했다.

이튿날 아침, 관군이 석현산성으로 쳐들어왔다. 갑작스런 기습공격에 이강년의 의병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의병을 일으킨 지 불과 5일 만의 일이었다. 이강년의 의병대를 무너뜨린 관군은 이강년이 김석중의 목을 내걸었던 농암 장터와 왕능 장터를 불태웠다.

문경의 의병대가 허무하게 무너져버리자 이강년은 안동 의병대에 합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안동 의병대 역시 봉기 초기에 무너진 책임 소재를 두고 논란이 벌어진 상태여서 어수선했다. 하는 수 없이 이강년은 충주로 가서 호좌의진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20여 일 동안 충주성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던 호좌의진은 제천으로 돌아와서 의병대를 재정비하고 있었다.

3월 14일, 호좌의진을 찾아온 이강년을 맞이한 의병대장 유인석은 그를 유격장으로 임명했다. 그때부터 이강년은 강원도 원주 출신의 의병을 이끌고 호좌의진이 펼치는 여러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사진 제공=문경시청, 상주시청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