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의진의 유격장이 된 이강년이 참가한 첫 번째 작전은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그 무렵 충주 중앙탑면의 가흥과 충주 수안보면의 안보에는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을 잔인하게 진압한 부대였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유인석은 호좌의진의 근거지를 넓히기 위해서 가흥과 안보의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충주로 가는 길목을 지키던 부대에게는 가흥을 공격하도록 하고, 이강년에게는 안보를 공격하도록 했다.

3월 15일, 의병대를 이끌고 제천을 출발한 이강년은 나흘 뒤 안보의 남산에 도착했다. 맹렬한 기세로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적 두 명을 사살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산세가 험한 지역이어서 보급품을 조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이강년은 부대를 이끌고 덕주산성으로 물러났다.

가흥을 공격했던 의병대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열을 가다듬은 이강년은 다시 안보를 공격하기 위해서 제천의 동창마을로 이동했다. 그때 영남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던 소토장 서상렬이 지원을 요청했다.

안동, 예안, 풍기, 순흥, 영주, 봉화, 예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은 서상렬은 친일 관리를 처단하면서 용맹을 떨치고 있었다.

기세가 오른 서상렬은 상주의 일본군을 공격하려는데 조령의 일본군이 합세하지 못하게 막아달라고 이강년에게 요청을 한 것이었다.

이강년은 동창마을을 떠나 조령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강년의 의병대는 서상렬의 의병대가 상주를 공격하던 때에 맞추어 조령에 도착하지 못했다.

4월 3일, 이강년은 조령의 일본군 무기고를 습격해서 많은 무기를 획득했다. 그러나 서상렬은 이미 사흘 전에 상주를 공격하다가 실패를 한 상태였다.

조령에서 물러난 이강년은 안보를 드나드는 길목을 지키면서 일본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 전군장 홍대석이 안보의 일본군을 공격할테니 조령을 막아달라고 했다.

이강년은 부대를 이끌고 다시 조령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홍대석의 부대는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을 막느라 출동하지 못했다.

결국 여러 차례의 출동에도 불구하고 이강년은 끝내 조령을 점령하지 못했다.

그러나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늘 앞장서서 전투에 임하는 그의 자세는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모범이 되었다.

대장 유인석은 후군장 신지수와 더불어 유격장 이강년이 가장 믿을 만한 장수라고 칭찬했다.

그 무렵 중앙에서는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친러내각이 들어섰다. 새 내각은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단발령을 철회하는 한편, 각 지역으로 선유사(宣諭使)를 파견해서 의병 해산을 유도했다.

선유사는 재해나 병란이 일어난 지역의 민심을 달래고 주민을 위로하기 위해 임시로 활동하던 관리였다. 의병이 활동하는 지역에 파견된 선유사는 의병대 해산을 권유하는 선전활동을 주로 했다.

선유사들은 단발령이 철회되고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원흉격인 김홍집을 비롯한 친일파가 축출되었으니 의병을 해산하라는 논리를 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의병의 열기는 서서히 식어갔다. 선유사들의 선전선동이 효과를 발휘한 탓도 있지만, 많은 의병들은 이미 꽤 지친 상태였다.

잘 훈련된 일본군과 관군에 비해 민간인 위주의 의병은 전투가 거듭될수록 피로가 쌓이고 희생자도 늘어났다.

국가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관군에 비해 개인 돈으로 식량과 무기를 충당하는 의병은 시간이 갈수록 물자도 쪼들렸다. 결국 어명을 핑계로 의병대를 해산하는 부대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그러나 호좌의진은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은 임금의 올바른 뜻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따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예전의 제도를 모두 회복할 때까지 싸우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남한산성의 의병대를 제압한 관군은 그 기세를 몰아서 호좌의진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왔다. 5월 26일, 관군은 호좌의진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호좌의진은 맹렬하게 맞서 싸웠으나 현격한 전력의 차이로 인해 제천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제천을 빼앗기고 나자 수 개월 동안 호좌의진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거점을 상실한 호좌의진은 단양으로 물러나서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동안 계속해온 항전으로 많은 인력과 전투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항쟁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유인석은 국내에서의 항전은 잠시 중단하고 중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서 서북쪽으로 계속 이동한 유인석은 8월 28일에 압록강을 넘어서 중국 땅으로 망명했다.

이강년도 유인석의 뒤를 좇아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가려고 했으나 강원도 영월에서 길이 막히는 바람에 소백산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소백산으로 들어가자 보급품 조달이 어려워지고 이탈자가 늘어났다.

더 이상 의병대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이강년은 의병대를 해산하고 단양 금채동(지금의 단양 적성 상원곡 김치골)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은신하면서 자신이 따르던 유인석의 스승이었던 이항로의 시문집 『화서집(華西集)』을 간행하는 일을 도왔다.

1897년 4월, 서간도로 건너가서 유인석을 만난 이강년은 그와 함께 장백, 무송, 즙안, 임강 등지에서 조선인 이주민 자치단체를 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해 7월, 고국의 백성들에게 항일의식을 불어넣는 한편, 일본군과 직접 싸우면서 나라의 주권을 되찾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판단한 이강년은 다시 단양으로 돌아왔다.

한편, 서간도 회인현(懷仁縣)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항쟁을 준비하던 유인석은 조선인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것은 불법이라는 중국정부의 명령에 의해 눈물을 머금고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9월 28일, 혼강(琿江)변에서 그때까지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219명의 의병들과 함께 해산식을 거행했다.

고향 문경으로 돌아온 이강년은 한동안 침묵기를 가졌다. 손수 땔나무를 하고 멀리서 양식을 지고 오는 등 몸을 고달프게 하는 생활을 하면서 의병대의 실패를 잊지 않으려고 했다.

아울러 꼭 재기해서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을 와신상담하던 이강년은 1907년 8월 13일, 봉기를 알리는 「통고문」을 발표하고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대장으로 추대되다

1907년 봄부터 여러 지역에서 봉기한 의병대가 속속 제천으로 모여 들었다. 그렇게 모여든 의병대는 통일된 지휘체계 없이 느슨한 연대체제를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기개는 하늘을 찌를 듯 대단했다.

마을 주민들이 필요한 물자를 매일 지원하는 등 분위기도 좋았다.

이강년이 의병 봉기를 알리는 「통고문」을 발표하고 이틀 뒤, 일본군이 원주 쪽에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투가 임박하자 주민들은 피난을 가서 제천은 텅 비어버렸다. 이강년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대만이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다.

초반부터 의병대의 기세는 매서웠다. 네 시간 동안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지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일본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의병대의 협공에 빠진 일본군은 산속에 숨어 있다가 새벽이 되자 박달재를 넘어 충주 쪽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의병대는 일본군 5명을 사살하고 13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천남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해산된 관군과 의병이 연합해서 승리를 거둔 최초의 전투여서 의미가 깊었다.

게다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달아 승리를 거두고 기세가 오른 일본군을 무찌른 전투여서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운강 이강년기념관에 안치된 이강년의 영정. [사진=문경시청]
운강 이강년기념관에 안치된 이강년의 영정. [사진=문경시청]

천남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의병대는 제천 의림지에 모여 앞일을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논의된 것은 여러 의병대 사이에 통일된 지휘체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전력을 극대화해서 일사불란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많은 의병장들이 이강년을 대장으로 추천했다.

일찍부터 유인석의 호좌의진에 들어가 맹활약을 했으며 뛰어난 문장력으로 격문을 써서 의병 봉기의 당위성을 널리 알린 점 등이 고려되었다.

그러나 이강년은 한사코 사양하면서 예학(禮學)의 대가 김장생의 후손으로 고위관직을 역임한 김학수를 추천했다.

그 정도 인품과 경력이어야 여러 의병대를 효과적으로 통솔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학수는 의병대에 합류하지 않고 은거했다.

결국 여러 의병장들의 계속된 추천을 뿌리칠 수 없어서 8월 19일, 이강년은 의병대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의병대장이 된 이강년은 제일 먼저 충주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유인석의 호좌의진 때부터 충주는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있는 곳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이강년은 동문, 서문, 북문 등 충주성을 세 갈래에서 공격하기로 하고 8월 23일 출정했다. 원래 충주성에는 일본군 수비대 1개 소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강년이 출정하기 나흘 전에 다시 1개 소대가 충원되었다. 이강년이 이끄는 400여 명의 의병대를 맞이한 일본군 2개 소대는 강력하게 저항했다.

병사의 수는 의병대가 많았지만,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일본군 정예부대는 만만치 않았다.

결국 충주성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의병대의 사상자는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병사가 겁을 집어먹고 뿔뿔이 흩어졌다.

충주성 공격에 실패한 이강년은 의병대를 수습해서 제천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강년이 충주성을 공격하고 있을 무렵, 서울에서 출동한 일본군은 제천을 토벌하고 있었다.

제천이 의병대의 본거지라고 판단한 일본군은 의병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제천을 철저하게 파괴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만행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영국 『데일리 메일』의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밝은 햇살 아래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펄럭이는 일장기가 선명했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 또한 눈부셨다. 나는 말에서 내려 잿더미 위를 걸어서 거리로 들어섰다.

이렇게까지 완전하게 파괴된 광경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번화가였는데 지금은 시

커먼 잿더미와 타다 남은 잔해만이 있었다. 온전한 벽 하나, 기둥 하나, 항아리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천은 지도 위에서 완벽하게 지워져버렸다.”

제천이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은 이강년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의병대의 근거지가 없어졌다는 아쉬움보다 제천 주민들이 당한 피해와 고통에 대한 걱정이 컸다. 이강년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 땅에서 일제를 완전하게 몰아낼 때까지 절대로 싸움을 멈추지 않으리라.’

이강년은 제천으로 가려던 행로를 월악산으로 돌렸다. 이제 의병대의 본거지도 없어졌다. 막강한 일본군을 정면으로 상대해서는 승산이 없었다.

새로운 전략을 구사해야 했다. 결론은 유격전이었다. 기습적으로 치고 빠지는 유격전만이 전력이 월등하게 우월한 일본군을 상대하는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이강년은 유격전을 펼치기에 용이한 월악산으로 의병대를 이끌었다.

1907년 9월 7일, 월악산에서 의병대를 재정비한 이강년은 문경읍내를 장악하는 등 다시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영남과 충청도를 잇는 관문인 문경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일본군은 대대적인 작전에 나섰다.

남부 수비관구와 북부수비관구의 일본군이 각각 출동해서 문경의 의병대를 위아래에서 압박해왔다. 이강년은 문경읍으로 들어오는 털목고개에 병력을 배치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9월 9일 새벽, 안보 쪽에서 출동한 일본군이 조령을 지키고 있던 의병대를 습격했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조령의 의병대는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이강년은 의병대를 이끌고 일본군이 휴식을 하고 있던 문경읍 갈평리로 출동했다. 9월 10일, 갈평에 도착한 의병대는 일본군 40여 명을 포위하고 공격을 했다. 당황한 일본군은 군수물자를 포기한 채 뿔뿔이 흩어졌다.

이강년의 의병대는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한편, 도망가는 일본군을 끝까지 추적하여 섬멸했다.

이날 갈평전투에서 거둔 승리는 문경에 고립되어 있던 의병대의 사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갈평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일본군은 토벌대를 조직해서 이강년의 의병대를 추적했다. 9월 24일, 단양 쪽으로 북상하던 이강년은 일본군이 순흥 쪽에서 죽령을 넘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튿날 1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닥뜨린 이강년은 한 시간 동안 접전을 벌였으나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한 채 날이 어두워지자 물러섰다.

10월 4일, 일본군 30여 명이 영월읍에 병참기지를 건설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10월 6일 새벽, 이강년은 의병대를 이끌고 영월읍을 공격했다.

아홉 시간 동안 맹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은 요새에 숨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날이 저물고 탄환도 다 떨어지는 바람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뚜렷한 전공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영월전투는 이강년의 의병대가 일본군을 맞이해서 아홉 시간 동안 용맹스럽게 싸운 전투로 10월 12일자 『황성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다시 선유사들을 집중적으로 파견하여 의병과 민간인을 이간질시켰다. 이에 이강년은 선유사들의 잘못을 비판하는 「선유위원을 깨우치는 글(曉告宣諭委員文)」을 공표했다.

이 글에서 이강년은 ‘왕의 명령이 아닌데도 왕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반역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거짓 왕명을 내세우면서 의병을 해산하라고 선전하는 선유사들을 꾸짖었다.

10월 31일, 이강년의 의병대는 죽령을 지키고 있었다. 죽령 아래쪽으로 일본군이 진출한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11월 2일, 일본군 안동수비대 수십 명이 나타나서 이강년의 의병대는 열흘 동안 접전을 벌였다.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면서 일본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으나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의병대도 죽거나 다친 사람이 50명이나 되는 등 피해가 점점 늘어났다.

11월 11일, 일본군 지원병이 도착해서 이강년의 의병대를 압박해왔다. 결국 이강연은 의병대를 이끌고 소백산 너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죽령전투의 패배는 이강년의 의병대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적에게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힌 의병도 많았지만 후퇴하는 과정에서 초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으로 희생된 병사들도 적지 않았다.

예년보다 일찍 닥쳐온 추위는 이강년의 고민을 깊게 했다. 여름에 봉기한 이후 쉬지 않고 투쟁해온 터라 보급물자도 바닥이 난 상태였다. 이 상태로 추운 겨울을 넘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일본군의 공세는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이강년은 겨울을 나기 위해서 의병대를 이끌고 영월 산간지대로 이동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끈질기게 추격해왔다.

11월 25일, 이강년은 영월을 떠나 영춘 쪽으로 이동했다. 일본군 추격대는 서울과 대구 등지에서 병력을 지원받으면서 더욱 집요하게 쫓아왔다.

11월 26일, 대구에서 출동한 일본군과 수발에서 접전을 벌였다. 이강년은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섰으나 유인작전에 걸려들고 말았다. 빠져나온 의병이 수십 명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수발전투에서 참패한 이강년의 의병대는 사기가 크게 꺾였다. 병력도 많이 줄고 탄약마저 고갈상태에 이르렀다. 참모들과 회의를 한 끝에 안전한 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내년 봄에 다시 일어서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강년의 의병대는 일본군의 추격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행군을 시작했다. 낮에는 산속에 숨었다가 밤에 행군을 했다.

찬바람과 겨울비가 행군을 더디게 만들었다. 민가가 별로 없어서 식량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길을 잃고 헤매거나 낙오하는 병사도 생겼다.

12월 16일, 이강년의 의병대는 단양 어상천면 방북리에 있는 복상골에 도착했다. 마을에 부하를 보내 정탐을 하는데 갑자기 일본군이 기습을 해왔다.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의병대는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빴다.

산기슭으로 도망해서 일본군을 따돌린 이강년의 곁에는 겨우 네 명의 병사만이 있었다. 복상골 전투가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는 이강년이 강수명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하늘이 장차 이 백성을 모두 죽이려 하여 먼저 대의를 위하여 일어난 몸을 없애려는 것인가. (…) 지난 16일에 복상골에서 적의 습격을 당했으니 이것은 실로 하늘이 우리를 망친 것으로 통곡하고 또 통곡하노라.”

이강년이 이끌었던 의병대의 가장 큰 특징은 ‘전투의병(戰鬪義兵)’이라는 점이다. 당시 다른 의병대는 ‘시위의병(示威義兵)’이 많았던 것에 비해 이강년의 의병대는 매우 전투적이었다.

때문에 이강년의 의병대는 끊임없는 전투와 행군의 연속이었다. 이강년은 언제나 맨 앞에서 활동했다.

동지들과 함께 눈 덮인 산자락을 누비면서 일본군과 싸우고 추위와 싸우고 굶주림과 싸웠다. 그 와중에 이강년은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잃지 않고 모범을 보였다.

동지들을 따뜻하게 대해서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군령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백성들의 지지도 대단했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1월 5일자 기사는 이강년이 어떠한 의병장이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의병장 이강년 씨는 원래 을미년에 창의한 사람인데 지난해 7협약이 성립된 뒤에 다시 산속에서 궐기하여 의병의 깃발을 세우고 동지들을 모집한 지 지금까지 여러 달이다. 크고 작은 수십 차례 전투에서 언제나 사졸 앞에 섰고 포환을 친히 무릅쓰니 그가 쓴 갓은 적의 탄환에 부서져 형태만 남았고, 그 몸도 중상을 입은 곳이 무수하며, 휘하의 사졸과 감고를 반드시 함께하여 극도로 추운 날에도 늘 홀옷을 입었다. 그를 수행하는 사위가 추위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부하 병사의 솜옷을 빌려 입었더니 이강년 씨가 대노하여 군령으로 형벌을 가하였다. 행군하여 지나갈 때 털끝만큼도 범하는 것이 없기에 일본 사람들도 그의 사람됨에 대하여 혀를 차며 칭찬한다더라.”

(다음 회에 계속)

·사진 제공_ 문경시청, 상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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