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복상골에서 대패한 이강년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북쪽으로 향했다.

산을 넘어 영동 쪽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뿔뿔이 흩어졌던 의병들이 합류했다.

1909년 1월 8일, 경기도 북부지역의 가평에 도착하기까지 이강년은 고난의 행군을 했다.

눈보라가 앞길을 가로막았고 얼어붙은 계곡은 발목을 붙잡았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해서 굶주리기 일쑤였고 일본군의 눈을 피해 야밤에 이동하다가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다.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다

가평은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험준한 산악지대여서 은신하기에 알맞았다. 이강년은 가평 화악산에서 겨울을 나기로 했다.

약 2개월 동안 화악산에 머물면서 가평과 영평(지금의 포천 북부), 춘천지역의 마을에서 식량과 의복을 공급받았다.

또한 일본군의 동태를 주기적으로 보고받을 수 있는 체계도 갖추었다. 『창의사실기』에는 그 무렵 이강년의 의병대가 마을에서 공급받은 물자와 첩보 내용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강년은 마을 주민을 보호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의병대는 대장의 책임 아래 ‘적을 토벌하고 나라의 원수를 갚는 일’에 동원되는 것을 명분으로 마을마다 일정한 양의 물자를 부담시켰다.

그런데 일부 도망병이나 패잔병이 군수물자를 모은다는 핑계로 민폐를 끼치는 경우가 있었다. 이강년은 마을 책임자에게 ‘의병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나약한 백성을 수탈하는 행위’를 고발하라고 알렸다.

이강년이 화악산에서 겨울을 나고 있을 무렵 진동대장 황순일 휘하의 의병이 춘천 곡운면에서 많은 양의 물자를 약탈해갔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이에 이강년은 황순일에게 편지를 보내서 ‘요즘 의병은 많은데 나아가 싸우는 일은 적고 탐내는 것은 물자와 옷이요 피하는 것은 외적의 칼날과 포탄이구나’라고 비판하는 한편, 물자를 약탈한 의병을 붙잡아서 처형하고 빼앗은 물자는 돌려주었다.

문경시 가은읍 운강이강년기념관 전경. [사진=문경시청]
문경시 가은읍 운강이강년기념관 전경. [사진=문경시청]

2월로 접어들자 화악산의 매서운 추위는 한결 누그러졌다.

눈과 얼음이 녹으면서 막혀 있던 길이 뚫리기 시작하자 이동하기도 편해졌다. 그러자 일본군의 출몰도 잦아졌다.

2월 19일과 27일에 이강년 의병대의 근거지 가까이에 일본군이 나타났다. 3월 19일, 마을 주민을 앞세운 일본군 30명이 기습을 해왔다.

첩보를 통해 기습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던 덕분에 쉽게 물리쳤지만, 3월 22일에 다시 일본군이 습격해왔다.

이 전투에서 이강년이 한때 실종되는 바람에 대장이 전사한 줄 알고 의병들이 대성통곡을 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이강년의 의병대는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화악산을 떠난 이강년의 의병대는 백담사, 홍천, 양양, 삼척 등지로 이동해 다니면서 크고 작은 전투를 여러 차례 벌여서 승리를 거두었다.

5월 6일에는 다른 의병대와 연합해서 삼척을 공격했으며, 5월 9일에는 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양양에 나타나서 다섯 시간이나 전투를 벌였다.

원주지역의 일본 경찰은 복상골 전투에서 대패했던 이강년의 의병대가 부활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인제와 삼척을 거쳐서 남하한 이강년의 의병대는 5월 중순 영월에 도착했다. 이때 이강년은 삼척에서 합류한 김상인과 박흥록의 병력도 통솔하여 대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마침 이강년의 옛 동지들이 경북 봉화 북부의 서벽에 집결하여 일본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일 계획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강년은 영월의 천평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일본도 이강년을 비롯한 의병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서벽으로 의병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도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은 서벽에 집결할 의병의 규모를 1,500~2,000명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서벽에 의병대가 모두 집결하기 전에 기습공격을 해서 의병세력을 분산시키려는 작전을 짰다.

5월 17일 새벽, 한 무리의 일본군은 덕산 방면에서 주실령을 넘어서 서벽으로 향했고, 다른 한 무리는 내성 방면에서 가부치를 넘어서 서벽으로 진군했다.

가부치를 넘어서 오던 일본군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던 의병대의 맹렬한 공격에 내성 방면으로 물러났다. 주실령을 넘어서 오던 일본군도 의병대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덕산 방면으로 후퇴했다.

5월 18일, 이강년은 의병대를 이끌고 내성까지 진출해서 전투를 벌였다. 의병대의 기세가 대단하자 안동, 영천, 예천 등지의 일본군이 지원하기 위해서 달려왔다.

오전 9시에 시작해서 일곱 시간넘게 지속되던 전투는 의병대가 슬금슬금 물러서는 바람에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이틀 동안 벌어졌던 서벽과 내성의 전투는 여러 의병대가 합세해서 작전을 펼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게다가 기습작전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패배함으로써 일본군에게는 치욕을 안겨준 전투였다.

서벽과 내성에서 격전을 치른 이강년의 의병대는 영월과 광탄을 거쳐 6월 21일 제천에 도착했다.

그 무렵 이강년의 의병대는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탄환도 거의 다 떨어져가고 의병의 숫자도 크게 줄어서 전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이강년은 영춘과 청풍지역의 산간지대에 은신하면서 전열을 가다듬기로 하고 다시 이동을 했다.

7월 1일, 제천의 작성산을 지나는데 장맛비가 내렸다. 그 와중에 일본군 정찰대의 눈에 띄고 말았다.

다음날 새벽, 이강년과 70명의 의병은 작성산 절매재 고개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강년의 의병대는 화력도 바닥이 나고 몹시 지친 상태였다. 일곱 명의 의병이 전사하고 이강년도 발목에 총상을 입은 채 계곡으로 피신했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이강년은 일본군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충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강년이 지나가는 고을마다 많은 백성들이 뛰어나와서 눈물을 흘렸다.

당시 신문기사는 ‘붉은 얼굴에 흰 수염이 나부끼는데 좌우를 돌아보며 의기가 태연했다’고 이강년의 당당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수원의 일본군 수비대에 구류되어 있다가 7월 8일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된 이강년은 9월 1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을 받는 내내 이강년은 기세가 대단했다.

의병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도적의 무리를 쳐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라고 주장했으며 “선비는 죽일 수는 있으나 욕보일 수는 없다”고 끝까지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10월 13일 오전 서대문형무소에서 쉰한 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교수형 집행에 앞서 교도관이 술을 한잔 권하자 “내가 아무리 술을 좋아한다고 해도 어찌 왜놈의 술을 마시겠느냐”고 했다.

이강년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두 아들 이승재와 이긍재, 부하였던 도선봉장 권용일에게 인계되어 과천의 효령대군 묘소 부근에 묻혔다. 2개월 뒤 제천으로 옮겨졌다가 경북 상주군 화북면 장암으로 이장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이강년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1916년 한식날을 맞이해서 이강년의 묘소에 모인 14명의 옛 동지들은 이강년의 유족과 다른 동지들에게 은밀하게 연락을 해서 이강년에 관한 자료와 기록을 모았다.

일제가 무력으로 통치하던 시기에 의병활동에 관한 자료와 기록을 모은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수집한 내용을 바탕으로 3권짜리 『운강선생유고(雲岡先生遺稿)』가 만들어졌다. 이 중에서 의병활동 내용만 정리한 것이 『창의사실기』이다.

이 책들은 필사본으로 만들어져서 기왓장 속에 몰래 감추어져 있다가 3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세상에 빛을 보았다.

설경으로 빛나는 이강년기념관. [사진=문경시청]
설경으로 빛나는 이강년기념관. [사진=문경시청]

광복을 맞이한 지 3년째 되던 1948년, 『창의사실기』를 바탕으로 『운강선생창의일록(雲岡先生義日錄)』이 편찬되었고 『운강선생유고』를 바탕으로 『운강문집(雲岡文集)』이 편찬되었다.

1962년, 이강년에게 건국공로훈장 가운데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79년에는 문경시 완장리에 생가를 복원했다.

2002년에는 이강년의 구국 활동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에 ‘운강이강년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이강년은 단발령 이후 봉기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13년 동안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누가 내려준 것이 아니라 일본과의 투쟁과정 속에서 스스로 쌓아올린 지도력으로 의병장이 되었다.

크고 작은 의병대가 앞을 다투어 그의 휘하에 들어오고 연대할 정도로 깊은 존경을 받은 의병장이었다.

무너져 가는 조국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병사들과 한 몸이 되어 전투의 최전선을 달렸던 의병장으로 이강년의 이름은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다.

참고자료

『영원한 의병장 운강 이강년』, 『독립운동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네이버캐스트」

사진 제공=문경시청, 상주시청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