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박록주를 사랑한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에 서 2남 6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어머니 청송심이 세상을 떠났고, 아홉 살 때 아버지 김춘식도 세상을 떠났다.

천석꾼 지주집안의 차남이었지만 유산 대부분을 물려받은 형 김유근이 술과 여자로 재산을 다 탕진했고, 1928년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김유근이 일제 모르게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을 대느라 주색으로 재산을 날린 척 위장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김유근이 파산한 후 김유정은 작은아버지 김정식과 누나들에게 의지해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복한 신세, 엇갈린 사랑

박록주는 부자의 첩으로 사느니 가난해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와 백년해로하고 싶었다.

그래서 원산의 남백우에게 결별을 통보했고, 열 살 연상의 신모 씨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신 씨는 그녀가 생각했던 다정하고 알뜰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돈을 벌어오면 그 돈으로 사업을 해서 날렸다.

그녀는 그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영화 「킹콩」 수입에 몽땅 투자했다. 수입한 「킹콩」은 조선극장에서 상영됐지만 변사가 총독부 관리를 험담하고 돌아다니다가 경찰에 잡혀가는 바람에 큰 손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었다.

신 씨는 그녀의 돈으로 여러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다. 심지어는 박록주와 동거하는 집에까지 여자를 불러들였다.

어느 날 박록주가 지방에 내려갔다가 올라와서 아침 일찍 집에 들어갔는데, 일하는 할머니가 문을 빨리 열어주지 않고 몹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불길한 예감을 받은 박록주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안방에서 젊은 여자가 뛰쳐나와 허둥거리며 양말을 신고 있었다.

박록주는 회고록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에서 그 젊은 여자가 어느 여학교 교사였다고 말했다. 박록주는 그 여자 뺨을 후려치고 신 씨와 심하게 다투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족들 또한 ‘말 못할 어떤 사정’으로 그녀를 힘들게 했다. 그녀는 박복한 자신의 팔자를 한탄했고, 세상이 다 싫어져서 죽을 결심을 했다.

그래서 위스키와 수면제 서른여섯 알을 모두 삼키고 긴잠에 빠져들었다. 다행히 가족들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실려 갔다.

만 이틀이 지나 깨어난 박록주의 눈앞에는 김유정이 서 있었다. 김유정이 그녀가 입원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사건이 『대한매일신보』에 대서 특필됐기 때문이었다.

신문기사를 읽고 놀라서 달려갔는데, 신 씨와 남백우 씨가 먼저 와서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신 씨와 남백우 씨를 외면하며 김유정에게 왜 왔느냐고 물었다. 김유정은 씩 웃으며, “장사지내러 왔습니다”하고 농담했다.

신 씨와 남 씨는 물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박록주도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박록주는 퇴원 후 신 씨와 차렸던 살림을 정리해 수화동으로 이사했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이제 김유정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당시 박록주를 사랑하다 속이 상해 과음한 술이 몸을 크게 상하게 해서 늑막염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녀를 향한 사랑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리움에 이끌려 그녀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녀는 집에 없었다. 일하는 할머니는 그녀가 아무도 집에 들이지 말라고 했다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사정사정해서 겨우 집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기다릴 수 있었다.

박록주는 외출에서 돌아와 김유정을 보고는, 일하는 할머니를 향해 누가 사람을 들이라 했느냐고 호통쳤다.

김유정은 할머니 잘못은 아니니 할머니를 나무라지 말라고 했고, 그녀와 살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고, 오랫동안 타이르고 또 타일렀다.

“나는 나이도 돈도 아무것도 필요 없소. 단지 당신에게 마음 가지 않는 것도 내 잘못이오?”

청계천 수포교까지 걸어가며 계속 얘기했다. 그러나 주로 말하는 것은 그녀였고, 김유정은 야시장의 물건들을 둘러볼 뿐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학생이 이러면 나도 가슴 아프오. 공부를 끝내면 다시 나를 찾아주오.”

박록주가 말했고, 김유정은 아무 대답 없이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쓸쓸한 모습으로 돌아섰다.

축 처진 어깨로 힘없이 걸어가는 김유정을 바라보며 그녀는 이제 다시 그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박록주의 이력서

박록주는 1934년 순천의 갑부 김종익과 결혼한다. 낙담한 김유정은 방안에 틀어박혀 폐인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낙향했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소낙비」를 응모해 당선되고,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노다지」도 당선됐다.

이상,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이태준 등과 함께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했다.

실례마을에 야학을 설립하고 가난한 고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일제에 의해 야학이 강제해체되자 창작에만 열중해서 단편 「봄봄」, 「동백꽃」, 「봄과 따라지」, 「슬픈 이야기」, 「금 따는 콩밭」, 「만무방」 등의 토속적이며 해학이 담긴 작품을 다수 남겼다.

박록주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상처를 안고 술에 의지해 아픔을 달래다가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악화됐고, 1937년 3월 29일 우리 나이로 서른에 세상을 떠났다.

김유정이 죽은 후 친구 안회남이 만취해서 박록주를 찾아갔고, “친구는 당신이 죽인 거요. 죽을 때까지 당신을 잊지 못하고 갔소” 라고 원망했다고 한다.

아마 내가 그이에게 너무 박절하게 대했던 벌을 늦게 받아서 평생 가난하고 기를 거(자식) 없이 살았지 않았나 싶소.

박록주는 평생 김유정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가슴에 품고 살았다. 비록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어도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은 잊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1930년대 경성방송국에 모인 연예인들, 왼쪽에서부터 김소희·박록주·정정렬·이화중선·임방울·한성준. [사진=구미시청]
1930년대 경성방송국에 모인 연예인들, 왼쪽에서부터 김소희·박록주·정정렬·이화중선·임방울·한성준. [사진=구미시청]
박록주가 판소리를 열창하는 모습. [사진=구미시청]
박록주가 판소리를 열창하는 모습. [사진=구미시청]

박록주는 판소리 동편제(東便制)의 대가이다. 본명은 명이(命伊)이고, 호는 춘미(春眉)이며, 예명이 록주이다.

박재보(朴在甫)와 권순이(權順伊) 사이의 3남2녀 중 맏딸로, 1905년 구미시 고아읍 관심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재보는 박수무당이면서 소리선생도 했다. 주로 기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쳤는데, 박록주도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박록주가 명창으로 활동한 시기는 일제강점기 중기에서 1969년까지였다.

전통춤과 국악은 흔히 호남지방에서 전승되어온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영남지방도 해방 직후까지는 국악인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판소리의 고장이었다.

구한말의 가선이자 동편제의 마지막 종장 박기홍과 그 제자 조학진, 정춘풍, 유성준, 김창환, 이화중선, 권금주 등이 영남에서 활동했고, 크고 작은 소리판도 자주 열렸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대구극장에서 김여란이 데뷔공연을 하고, 김창환, 정정렬, 한성준 등이 1932년 조선악정회를 창립하고 3일간 대구공회당(지금의 대구시민회관)에서 창립기념 대연주회를 열 정도로 당시 영남지방의 국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남달랐다.

그 영향으로 기생출신 강소춘, 김초향, 김소향, 김추월, 김녹주, 이소향, 임소향, 박귀희 등의 명창들도 여럿 배출됐다.

그들, 즉 기생명창들은 기생조합인 권번(요즘의 소속사)을 통해 교육을 받고 그 관리 하에 요정에 나가 소리를 했는데, 그들을 권번예기(券番藝妓)라 했다.

박록주도 권번 소속 예기였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본격 소리꾼으로 이끈 사람은 동편제 「적벽가」의 대가인 명창 박기홍이었다. 박록주는 1916년 선산군 해평면에 살고 있던 명창 박기홍을 찾아가 판소리를 배웠다.

박기홍은 엄격한 소리선생이어서, 남포등을 켜놓고 기름이 다 닳을 때까지 소리를 하게 했다.

남포기름이 다 닳으면 새벽 첫 닭이 우는데, 그제야 잠자리에 드는 것을 허락했다. 소리를 할 때 무릎을 세우고 허리와 목을 꼿꼿이 세운 자세로 목소리를 뽑아내도록 지도했다.

박록주는 참기름을 먹어가며 하루 스무 시간을 목에서 피가 나도록 소리 질렀다. 겨우 열두 살의 어린 여자아이로서는 견뎌내기 쉽지 않은 강습이었다.

그렇게 두 달을 『춘향가』와 『심청가』 일부를 배워 동편제의 기틀을 닦았다.

1918년 열네 살에 김창환이 이끄는 기녀단체 협률사를 따라다니며 김창환과 김봉이로부터 단가와 토막소리를 배웠고, 대구 앞산 강창호에게 가서 『심청가』 중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데」와 단가 「고고천변」을 배웠다.

또 경상감영 행수기생 출신의 앵무에게서 춤과 시조를 배우며 기생수업을 받았다. 김점룡, 임준옥, 지진영 등에게서 남도민요와 「화초사거리」, 「육자배기」 등을 배웠다.

1921년 원산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하면서 장래가 촉망되는 명창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남백우의 후원으로 국창 송만갑에게서 판소리를 전수받을 수 있게 됐다.

그녀가 열일곱 어린 나이에 남백우의 소실이 된 것도 명창의 길을 걷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남백우는 그녀를 무척이나 아껴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녀를 서울로 보내 소리공부를 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을 평생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서울에 가서 신 씨와 정분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신 씨를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1년이 넘도록 모르는 척해주다가 두 사람이 살림까지 차리자 서울로 올라왔고, 종로 3가 ‘열별루’라는 중국집으로 불러냈다.

2층 방에서 문을 잠근 채 돈을 훔쳐서라도 행복하게 해줄 테니 신씨와 살림을 그만두라고 설득했다. 그녀는 그러나 사랑을 선택하고 남백우를 버렸다. 첩으로 사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송만갑에게서 『춘향가』뿐만 아니라 「적벽가」도 배웠고, 정정렬에게 『춘향가』와 『숙영낭자전』을 배웠다. 또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배우고 김창환에게 「제비노정기」를 배웠다.

이때부터 이름이 알려지면서 1926년 9월 16일 경성방송국 국악방송에 출연하여 방송활동을 시작했다.

그후 해방 전까지 100여 차례 국악방송에 출연했고, 조선음률협회에 참여해 여러 명창대회에 출연했다.

일동축음기주식회사 제비표레코드에서 『한송정』, 『꽃사거리』, 『소상팔경』 등의 음반을 취입했다. 또 소설가 최서해(본명 최학송)가 주간을 맡은 동인지 『장한』 창간호에 글을 싣기도 했다.

1931년 우리 나이 스물여덟에 박록주는 집안의 복잡한 문제 때문에 잠시 활동을 중단했고, 바람이나 쐴 겸 스승 송만갑의 수제자인 김정문이 있는 남원으로 내려갔다.

김정문에게서 『홍보가』의 「초앞」부터 「제비 후리러 나가는데」까지를 배웠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신 씨가 젊은 여교사를 집으로 불러들여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코리아레코드, 폴리돌레코드, 시에론레코드, 콜럼비아레코드 등의 회사와 계약하고 음반을 취입했고, 1933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 결성 및 발족을 주도했다.

박록주와 결혼한 김종익은 국악발전을 위해 공평동 29번지에 성악연구회 사무실을 차려주었다.

박록주는 동양극장에서 열린 조선성악연구회 창립 1주년 기념공연에서 창극 『춘향가』 전편을 공연했다. 이 공연이 폭발적 인기를 얻어 전국 순회공연으로 이어졌고, 성악연구회 창립 2주년 기념공연에서 『심청가』의 심청 역을 맡아 명성을 떨쳤다.

1936년 본격적으로 창극운동을 전개하여 성악연구회 직속 창극단 창극좌를 창단했다.

창극좌는 제1회 『흥보전』을 시작으로 『숙영낭자전』, 『별주부전(수궁가)』, 『배비장전』, 『옹고집전』 등을 공연했는데, 박록주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인공 역을 맡아 창극계의 여왕이 됐다.

해방 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창립하고 창극 『옥중화(獄中花)』를 공연해 큰 호평을 받았는데, 이것이 여성국극(女性國劇)의 창시였다. 그 외에도 『어촌야화』, 창작창극 「편시춘」 등에도 출연했다.

한국전쟁 때는 국민방위군 정훈공작대에 편입돼 「열녀화」로 군 위문공연을 다녔고, 1952년엔 창극단체 국극사(國劇社)를 재건하고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전쟁 중 한쪽 눈을 실명했고, 때문에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다.

전쟁이 끝난 후 「애모랑과 더벅머리(김향 작, 신마산극장)」, 「월하삼경」, 「유관순전」, 「산호거울」, 「임 따라 가오리」, 「한양은 천리원정」 등의 국극 안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1960년 급성폐렴으로 경찰병원에 입원했다.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홍보가』 기능보유자(1979년 6월 26일, 사망해제)로 지정됐는데, 『홍보가』 중에서도 「제비노정기」와 「비단타령」에 특출했다.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은퇴공연을 했다. 이후 후배들을 지도하여 박귀희(본명 오계화), 조상현, 박송이, 조순애, 박초선, 성창순, 한농선 등의 명창을 배출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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