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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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박민수 편집국장】 ‘술 권하는 사회’

2021년 새해 벽두, 현진건의 단편 소설을 100년 만에 다시 소환한다.

이 소설은 작가의 신변을 다룬 1인칭 소설로 1921년에 발표됐다.

현진건은 일제 치하 수많은 애국적 지성들이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 절망, 주정꾼으로 전락하지만 그 책임은 ‘술 권하는 사회’에 있다고 탄식한다.

정확히 100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여전히 술 권하는 사회다.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기부진으로 지난해 술·담배 소비가 사상 최대로 늘었다는 소식이다.

‘한잔 또 한잔을 마셔도 취하는 건 마찬가지지.~~’

기분이 좋아도 한잔, 슬퍼도 한잔 하는 게 술이다.

갈등과 반목,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술은 위안이자 독이다.

사람들은 독이 되는 줄 알면서도 삶이 팍팍하고 어려울 때 술을 더 많이 마신다는 게 그동안의 통계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술과 담배 소비가 20% 넘게 급증했었다.

지난해 술·담배의 소비 증가는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피로감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유난히 속에서 천불나는 장면을 많이 접한 덕에 술 마실 일이 잦았다.

사회적 부조리와 이에 저항할 힘이 없는 무능력한 현실에 맞닥뜨릴 때 사람들은 술에 의존하며 울분을 삭인다.

조국과 정경심의 딸 입시 비리,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의 ‘황제 휴가’ 논란은 엄빠 찬스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온 이 땅의 수많은 엄·빠와 아들·딸에게 술을 강권했다.

정경심 4년형 선고 판결에 대해 ‘가슴이 턱턱 막히고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라며 노골적 불만을 드러내며 닥치고 정경심 지지하는 ‘대깨문’들이 안타까워 또 한잔했다.

‘그래도 단단하게 가시밭길을 가겠다. 함께 비를 맞고, 돌을 맞으면서 같이 걷겠다’는 뇌구조 분석이 필요한 인사들의 궤변과 말장난은 통음으로 이어졌다.

위안부 할머니들 앞세워 돈을 끌어 모으고 의원 배지까지 단 윤미향의 뻔뻔스러움에는 마신 술마저 토악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특히 지난 한해는 코로나19로 다들 죽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런데  '머시 중헌지'도 모르고 지난 일년 내 이어진 추미애와 윤석열의 이전투구(진흙탕 개싸움)는 지켜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했다.

이 둘의  싸움은 늘 술상의 안주거리였고 급기야 친구들끼리도 목소리를 높이고 얼굴을 붉히면서 애꿎은 술에 화풀이를 해댔다.

이 땅의 ‘가붕개는 안되고 나는 괜찮다’며 술자리 인증 샷까지 찍어 올리는 완장 찬 나리들의 대담함과 무모함에는 술 맛도 달아났다.

친구 따라 강남 못가고 20년째 일산에 살고 있는 기자는 20억 30억이라며 집값 뛰는 소리에 땅을 치고 후회하며 하루걸러 폭탄주를 말면서도 그럭저럭 한해를 마무리 했다.

어제 떠오른 해가 오늘 해고 오늘 지는 해 역시 내일도 그 해 일터, 그래도 새 해라고 마음가짐을 다져보지만 연 초부터 술 권하는 일들이 여전할 것이라는 느낌이다.

우리사회 지도층의 위선과 언행불일치는 어제 오늘의 일로 그치지 않고  내일도 계속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 고작 16개월을 살다간 정인이 사건으로 온 나라가 우울 모드다.

뼈가 부서지고 췌장이 잘려 죽음의 문턱에 선 정인이를 살릴 수 있는 기회는 충분했다.

그러나 경찰은 세 번이나 신고가 접수됐지만 번번이 내사종결하거나 학대 증거가 없다고 판단하고 돌려보냈다.

어디 억울한 죽음이 정인이 하나 뿐일까.

방송을 통해 정인이의 안타까운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각 계 각 층에서는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다시는 제2의 정인이가 없도록 하겠다며 부랴부랴 뒷북 방지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대응이 즉흥적 졸속이어서 실효성은 의문이다.

국회는 법사위에 계류 중인 아동학대 방지법을 신속히 심사키로 하는 등 관련 법안만 8개가 발의 됐지만 여론무마용 보여주기식에 불과하다.

초기 대응 미숙으로 정인이 죽음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경찰도 청장이 나서 대국민사과와 재발방지를 다짐하며 담당 경찰서장을 대기발령하는 등 호들갑이다.

그렇지만 이 와중에 정인이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숟가락'을 얹어 개인적 이득을 취하려는 무개념 인간들의 등장에 또다시 절망한다.

박민수 편집국장.
박민수 편집국장.

이래저래 올해도 ‘몹쓸 사회’ 탓을 하며 술 마실 일이 많아질 것 같은 예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부가 저녁 9시 이후 함께 모여 술 마시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덕분에 술자리는 횟수와 양이 많이 줄어들었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가붕개’들이 올해만큼은 한탄과 분노 대신 즐거운 술 자리를 기대하는 무리일까?

술 마실 핑계와 건수만 늘어나는 세상, 우리에게 술 강권하는 ‘몹쓸 사회’에서 슬기롭게 사는 지혜가 필요한 한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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