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원효가 혈사(穴寺)에서 입적한 뒤 13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원효의 행장을 기록한 전기나 비석은 거의 사라졌다.

9세기 초에 기록되어 가장 신빙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되는「서당화상비」는 다행히 깨어진 비석 조각이 일부 발견되면서 파편으로나마 원효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게 되었다.

「서당화상비」

이 비석이 서 있었던 고선사 터는 1975년 경주에 덕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됐다.

원효가 “태어나지 말지니,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를 말지니, 태어나는 것이 괴롭다.”라는 말을 남긴 고선사 터는 덕동호에 수장된 원효의 자취와 함께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원효는 어릴 때 이름이 새털이라는 뜻의 서당(誓幢)이어서 서당화상이라고도 불렸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서당화상비」를 세운 사람은 원효의 손자 설중업(薛仲業)이다.

원효가 열반에 든 지 약 100년이 흐른 8세기 후 반, 설중업이 사신으로 일본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한 일본 관리가 설중업이 원효의 손자임을 알고 기뻐하며 극진히 그를 환대했다.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던 삼층석탑으로, 현재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국보 제38호. [사진=경산시청]

이 일본 관리는 천황의 손자이며 도다이지(東大寺) 출신의 승려로, 환속한 뒤 고위관료로 있던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 722∼785)였다. 그는 설중업이 귀국할 때 아쉬워하며 시를 써주었다.

일찍이 원효거사가 지은『금강삼매경론』을 읽고 감동을 받았으나(嘗覽元曉居士所著金剛三昧論)
그를 만나지 못해 한으로 여기다가(深恨不見其人) 
이제 그의 후손을 보니(而喜遇其孫)
기꺼이 시를 써서 전한다(乃作詩贈之)

『속일본서기』에는 780년(선덕왕 1년) 설중업이 사신으로 갔다가 일본 광인왕으로부터 종5품하의 일본 관직을 받고 이듬해 귀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효의 학문이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이를 계기로 뒤늦게나마 신라왕실에서도 원효를 새롭게 평가하려는 변화가 일어났다.

「서당화상비」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세워졌다.

설중업은 훗날 헌덕왕이 되는 각간 김언승(金彦昇)의 후원에 힘입어, 원효가 머물렀던 고선사에「서당화상비」를 세웠다.

승려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으로는 신라 역사상 유일한 이 기념비는 원효에 관한 기록 가운데 오늘날에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전체 모습이 남아 있지 않고 깨어진 일부 파편만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원효와 관련된 자료는 우리나라보다는 오히려 일본이나 중국에서 잘 보관되어 왔다.

일본 교토에 있는 유서 깊은 사찰, 젠린지(禪林寺)에는 원효가 쉰다섯 살 때 쓴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필사본이 전해진다.

일본 정토종 본사인 젠린지를 중흥시킨 승려가 800년 전 직접 붓으로 옮겨 썼다는 이 책은 사찰 수장고에 귀중하게 간직되어 왔다.

1206년 묘에(明惠)가 창건한 교토 외곽의 고잔지(高山寺)에는 원효와 의상의 행적을 실은, 일본국보『화엄연기(華嚴緣起)』를 보관해왔다. 

고잔지를 창건한 묘에가 원효를 강의했다는 일본 화엄종 본산인 도다이지는 8세기 신라 승려 심상(審祥)이 원효의 책을 가져와 원효의 학풍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던 사찰이다.

설중업을 환대했던 오미노 미후네가 원효의『금강삼매경론』을 읽었던 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가장 오래된 원효의 초상화가 소장돼 있다.

거칠고 숱 많은 수염과 햇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는 저잣거리를 떠돌아다니며 대중교화를 펼쳤던 원효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그림은 1300여 년이란 시간을 넘어 여전히 살아 있는 원효와 마주 대하는 듯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뒤돌아보는 원효

그런데 젠린지에는 천 년이 된 특별한 부처님상이 있다.

본존불 <뒤돌아보는 아미타여래상(回顧阿彌陀如來像)>이 그것이다. 서쪽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는 이 불상은 특이하게도 머리를 남동쪽으로 돌리고 있다.

젠린지의 <뒤돌아보는 아미타여래상>을 연상시키는 기록이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조에 나온다.

원효가 입적한 뒤 설총은 원효의 시신을 다비해 유골을 수습했다. 그런데 말을 탄 무리가 와서 원효의 유골을 내놓으라고 했다.

설총은 지혜를 발휘해 아버지의 유해를 부수어 뼛가루를 갈아 흙과 섞어 반죽해 소상(燒像: 화장 후 뼛가루를 갈아서 물로 반죽해 만든 상)을 빚어 분황사에 봉안했다.

그런데 설총이 예를 올리자 원효상이 홀연히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뒤 조각상은 뒤를 돌아보는 자태로 굳었다는 것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원효상이 뒤돌아보는 형상을 한 채 분황사에 안치돼 있었다고 기록한 것을 볼 때, <뒤돌아보는 원효상>은 고려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대각국사 의천이 분황사에 들렀다가 원효 조각상을 보고 “이제 계림의 옛 절에서/ 마치 살아 있는 원효를 뵙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今者鷄林古寺 幸膽如在之容)”는 시,「제분황사효성문(祭芬皇寺曉聖文)」을 남긴 것으로 보아 조각상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뒤를 돌아보는 독특한 형태의 불상의 효시가 될 수 있었던 이 <뒤돌아보는 원효상>은 안타깝게도 분황사와 함께 불에 타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기림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인도 스님 광유가 세운 절인데 원효대사가 새롭게 고쳐 지었다. 보물 제833호. [사진=경산시청]

그런데 원효가 입적하고 400년이 흐른 일본 가마쿠라시대(1192~1330 년)에 원효의 학풍을 이어받은 일본 젠린지에서 뒤를 돌아보는 부처님 상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신라 분황사의 <뒤돌아보는 원효상>과 일본 젠린지의 <뒤돌아보는 아미타여래상>은 모두 뒤돌아보는 조각상이라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젠린지뿐만 아니라 일곱 군데 사찰에서 뒤돌아보는 형태의 불상이 조각이나 고려 탱화로 전해지고 있다.

뒤돌아보는 불상은 다른 불교문화권에서는 찾을 수 없고 오직 동북아시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뒤돌아보는 불상을 보관하고 있는 일본 사찰은 원효와 관련이 있는 곳이어서, 분황사의 <뒤돌아보는 원효상>과 일본의 <뒤돌아보는 아미타여래상>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분황사의 원효상은 왜 정면을 향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는 형상을 하고 있었을까?

분황사에서 원효상이 설총을 뒤돌아보았던 것처럼 1300여년이 흐른 오늘날, 원효가 우리를 향해 뒤돌아보며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전쟁이 일상이 된 시대

원효가 살았던 7세기는 삼국이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던 시기였다.

신라는 법흥왕 때 삼국전쟁에서 패권을 차지하지만, 이때부터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는 고구려와 백제의 반격을 받으면서 고전하고 있었다. 신라는 670년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약 100년에 걸쳐 150여 차례에 이르는 전쟁을 치렀다. 

국토는 피폐해지고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졌지만, 귀족 출신 인 승려들은 민중의 삶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

대사원에 거주하며 왕실과 귀족을 위한 법회를 열고, 지배이데올로기인 호국불교 이념에 기울어져 있었다.

반면 민초들은 전쟁에 징발되고 부역에 시달렸으며 무거운 조세 부담을 지고 있었다. 전장과 부역에 끌려간 장정들을 대신해 노인과 여인들이 수레를 끌고 아이들이 농사를 지었다.

당시 신라는 전쟁이 일상 이 된 사회였다.

굶주림에 지쳐 아이를 사고팔기까지 했다고 하니 민초들의 삶은 말 그대로 아수라지옥이었다.

사회갈등이 깊어지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부처의 가르침과 귀족 불교의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며 이를 반성하려는 움직임이 신라 불교계 안에서 자생적으로 싹텄다.

혜공(惠空)과 대안(大安)과 같은 비주류 승려 들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 깨달음을 실천에 옮기려 했다.

대중교화의 선구자인 혜공은 취해서 등에 삼태기를 지고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며, 대안은 저잣거리에서 동발(銅鉢)을 치면서 “크게 평안하여라. 크게 평 안하여라” 하며 외쳤다.

그들은 신라 민중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었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수도하기 위해 토굴의 형태로 세운 적천사의 대웅전. [사진=경산시청]

특별한 출생

원효를 임신했을 때 어머니는 유성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아이를 낳을 때는 상서로운 오색구름이 땅을 덮어 귀하고 재주 많은 아이가 태어날 것을 예시했다.

그러나 이런 좋은 조짐에도 불구하고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이 아이는 길바닥에서 태어났다.

만삭의 몸으로 친정에 출산을 하러 가던 어머니는 경산현 불지촌(佛地村) 밤나무골을 지나다 갑자기 산기를 느꼈다.

다급한 와중에 아버지는 입고 있던 털옷을 벗어 밤나무에 걸어 바람을 막았다. 

변방의 작은 마을 밤나무 아래서 장차 동아시아를 아우를 대사상가가 될 아이가 태어났다.

부드러운 비단 이불이 아닌 길바닥 밤나무 아래서 태어났다는 원효의 출생설화는, 마야 왕비가 길에서 태기가 있어 급히 나무 아래 휘장을 치고 아기를 낳았다는 붓다의 탄생설화를 연상시킨다.

길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왕자의 신분으로 보장 된 앞날을 버리고 중생을 제도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게 될 범상치 않은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그래서 원효가 태어난 밤나무는 붓다의 열반을 지켰다는 사라수라고 불렸고, 훗날 원효가 출가해 밤나무 근처에 법당을 세웠는데 이 절을 사라사라 했다.

6두품

원효는 귀족 신분으로 6두품 출신이다. 원효의 선조는 본래 압량국(押 梁國: 오늘날의 경상북도 경산)의 왕족이었는데, 압량국이 신라에 복속하면 서 6두품에 편입되었다.

신라는 골품제도가 굳어진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6두품은 성골과 진골귀족 다음 가는 하위귀족으로 중앙관직에 임명될 수는 있었지만, 오를 수 있는 관직에는 한계가 있었다.

6두품 중에는 학문과 종교에 두각을 나타내며 신분적 한계를 극복해보려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골품체제와의 갈등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시험에 합격해 당나라 관리가 되는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12살 어린 나이의 최치원이 유학을 떠날 때 아버지 견일이 “10년 안으로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했을 만큼 6두품에게는 당나라 유학이나 당나라 과거급제가 절박한 문제였다.

당나라에가 유학하거나 과거에 합격해야 비로소 신라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당나라 유학은 큰 붐을 이루었고 신분적 한계를 뚫으려는 6두품에게는 최치원 집안처럼 가문이 사활을 걸기도 했다.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분황사화쟁국사비부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 [사진=경산시청]

그중에는 원효와 같은 설씨이며 동시대인인 설계두(薛罽頭: ?~645)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장군이 될 수 없는 6두품 신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신라는 사람을 등용하는데 골품을 따진다.”며, 원효가 다섯 살이던 621년(진평왕 43년) 당나라에 건너갔다. 

그로부터 20여 년 이 지난 645년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치러 출정할 때 설계두는 스스로 종군을 청해 선봉에 서서 싸우다 전사했다.

당 태종은 그가 외국인인 데도 목숨을 바쳐 싸운 것을 알고는 어의를 벗어 시신을 덮어주고 대장군의 관직을 내려 장사를 지내주었다.

설계두의 고단한 삶은 당시 신라의 골품제도가 하급귀족인 6두품에게 얼마나 높은 장벽이었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6두품의 신분적 한계를 안고 있던 원효의 집안은 일찍부터 원효의 교육에 매진했다.

원효는 어릴 때 한학을 배우다 태학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했다. 소년이 화랑이 되자 집안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출가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은 영적인 직관력을 지닌 이 소년을 삶과 죽음의 근원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했다.

소년은 출가해 구도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실망이 말로 할 수 없었지만, 원효의 결심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끝내 출가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소년의 나이는 열다섯 살 즈음이었다.

그는 스스로 첫 새벽을 뜻하는 원효(元曉)라고 법명을 지었고, 황룡사에 들어갈 때는 그가 살던 집을 희사해 초개사(初開寺)를 세웠다. 원효는 눈의 먼지를 닦아 진리를 보게 해줄 스승을 찾아 나섰다.

(다음 회에 계속)

사진 제공_ 경산시청, 삼성현 문화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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