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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1-03-04 17:37 (목)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9)] 아버지의 유산(1)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9)] 아버지의 유산(1)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1.02.20 0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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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686년 경주 분황사.

이미 날이 어두워졌지만 법당 안에 있는 사람은 불을 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달빛은 법당 안을 어른거리다 솔거의 관음보살상을 비추었다.

관음보살상의 눈은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음보살의 시선을 따라가자 법당 한쪽에 조각상이 서 있었다.

조각상과 떨어져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는 학자 설총(薛聰)이었다.

고승의 아들

설총은 얼마 전 스승이자 아버지인 원효를 잃었다.

만년에 원효는 분황사로 거처를 옮겨 『화엄소(華嚴疏)』 편찬에 몰두했다.

설총은 근처로 집을 옮겨, 연로한 아버지가 경전의 주석을 다는 것을 옆에서 도왔고 아버지의 원고를 정리하고 필사했다.

설총은 아버지에게서 불교 경전을 풀이하고 방대한 참고문헌을 활용하는 방식에서부터 사람들을 공경하고 하루하루를 새롭게 살아가는 태도를 배웠다. 

설총은 맑은 저녁 하늘이 되어 아버지가 풀어놓는 석양의 아름다운 빛깔을 흡수했다.

그러나 설총은 아버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원효는 끝내 『화엄소』를 완성하지 못하고 근방의 혈사(穴寺)에 들어가 열반했다.

분황사에서 원효의 다비식이 치러졌다.

분황사에 원효를 추모하는 인파가 꾸역꾸역 모여들어 주위 마을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런데 말을 탄 한 무리가 인파를 뚫고 절에 들이닥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들은 원효의 유골을 모셔가겠다고 했다. 다급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 유골을 지킬 수 있을까.’

그때, 한 가지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쳤다.

문무왕이 토함산 신으로 추앙받던 석탈해왕의 유골을 파내어 조각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한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룬 문무왕은 600여 년 전 황산진에서 가야군과 싸워 크게 이긴 석탈해왕의 유골을 파내어 고증을 받아 생전의 모습을 되살려 조각상을 만들었다. 

죽은 석탈해왕이 조각상의 몸을 빌려 살아나던 순간의 감동을 그는 잊지 못하고 있었다. 설총은 원효의 피를 이어받아 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구도자였던 아버지가 지녔던 영적 직관력이 설총에 이르러서는 어머니 요석공주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예술가의 성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설총은 밖에서 분황사 승려들이 말을 탄 무리들을 상대하고 있는 사이, 아버지 제자의 도움을 받아 원효가 열반한 토굴로 유골함을 옮겼다.

불을 켜고 유골을 향해 절한 뒤 유골함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유골함 속에서 은은히 퍼지며 설총을 감싸 안는 듯했다.

설총은 떨리는 손으로 유골을 빻아 흙과 섞어 반죽했다.

그때 밖에서 다급히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설총은 토굴 구석으로 반죽을 치우고 흙 묻은 두 손을 옷소매 안에 숨긴 채 단정히 앉았다.

말을 탄 무리는 끝내 진흙 속에 섞여 있는 원효의 유골을 찾지 못했다.

그들이 돌아간 뒤 설총은 생전의 아버지 모습을 본떠 원효의 조각상을 빚었다. 유골을 흙에 섞어 반죽했다는 사실은 일반에는 알리지 않고 비밀에 부쳤다.

원효는 열반했지만, 설총은 여전히 아버지와의 인연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설총은 어머니 손에 자랐다.

어린 시절 설총이 학당에 공부하러 집을 나서면 어머니는 일주문이 있는 곳까지 함께 걸어왔다.

일주문에 이르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있는 자재암(自在庵)을 향해 세 번 절을 하게 했다.

설총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지만, 친구들의 아버지와는 다른 아버지에 대해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친구들이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설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왜 아버지를 볼 수 없을까? 아버지가 없는 게 아닐까? 어머니가 나를 안심시키려고 거짓말을 하시는 건 아닐까? 왜 나는 친구들처럼 아버지와 함께 있을 수 없을까?’

한번은 학당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단정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스님은 소년에게 어디 가는지 물었고 그는 학당에서 공부하고 오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소년이 물었다.

“스님, 여기서 자재암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그건 왜 묻느냐?”
“아버지가 자재암에 계세요.”
스님은 잠시 놀라는 듯하더니 물었다.
“네가 총이냐?”

설총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우리 아버지를 아세요?” 
“암! 아다마다.”

설총은 자재암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건 왜 묻느냐?”
“….”

조금 뒤 스님이 말했다.

“아버지를 찾아갈 생각은 아예 말아라. 네가 열심히 공부하면 반드시 훗날 아버지를 만나게 될 게다.”

소년은 일주문에서 스님과 헤어졌다. 방금 헤어진 스님이 아버지와는 평생의 도반이며 훗날 화엄종을 우리나라에 들여오게 될 의상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알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며 소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길에서 만난 스님은 왜 아버지를 만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는지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소년은 친구들의 아버지처럼 그를 안아주지도 않고 무등을 태워주지도 않는 아버지에게 서운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원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커져갔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소년은 일주문까지 어머니와 동행했다.

어머니와 헤어진 뒤 학당에 가던 소년은 갑자기 발걸음을 돌렸다.

소년은 아버지가 계신다는 자재암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단 한 번이라도 아버지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

가는 길에 나무꾼을 만나 자재암이 있는 곳을 물었다. 나무꾼은 길을 가르쳐주면서도 길이 험해 아무나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었다고 단념할 소년이 아니었다. 깎아지른 바위가 나타나고 가시나무숲에 맞닥뜨렸다. 소년은 여우를 만나기도 하고 발을 헛디뎌 바위에서 미끄러지기도 했다. 

소년이 자재암을 찾은 것은 해가 저물고 길이 어둑해진 뒤였다.

불빛을 따라가니 큰 바위에 자재암이라는 현판이 붙은 작은 암자가 나타났다.

막상 암자에 이르렀지만 소년은 아버지를 부르지 못했다. 그는 이제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불러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소년이 한참을 암자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려니 한 노스님이 밖으로 나왔다.

“한 걸음 늦었구나.”

소년은 얼마 전 아버지가 의상이라는 스님과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년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어린 소년은 자라 학자가 되었다.

말년에 아버지가 모든 짐을 내려놓고 나서야 그는 아버지와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릴 때와는 다른 이유로 아버지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원효는 큰스님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 큰 인물에게는 파계의 증거였다. 

그에게 아버지라는 말은 금기어였다. 출가자인 아버지가 계율을 어기고 파계했음을 확인해주는 이 말을 그는 아버지에게 누가 될까 두려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설총은 주위에 아버지의 적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명성이 중국과 일본에서 높아지는 것을, 민초들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은 길지 않았고 예고도 없이 삶과 죽음으로 길이 갈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났다. 그리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졌다.

마침내 조각상이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설총이 되살려낸 원효 조각상을 보며 살아 있을 때의 원효를 보는 듯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조각상이 아니라 마치 살아 있는 원효를 만나는 것 같다고 했다. 원효상은 분황사에 안치되었다.

달빛이 다시 솔거의 그림 속 관음보살의 광배에 머무르다 원효 조각상을 비추었다. 바람소리에 길게 드리워진 조각상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때 인기척이 났다. 설총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설총은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만 품어왔던 말을, 차마 입 밖에 꺼내 지 못했던 말을 어둠을 향해 외쳤다.

“아버지!”

깊은 곳에 박혀 있던 이 한마디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러자 그의 부름에 대답하듯 조각상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와 아들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설총은 모든 의문이 눈 녹듯 사라졌다.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너무나 생생해 도무지 꿈같지 않았다.

그는 법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밤이 지나고 동이 트고 있었다.

법당 앞으로 탁 트인 산야가 펼쳐져 있었다.

설총은 법당 주위를 서성거렸다.

법당 뒤를 돌아가는데 한겨울에 땔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설총은 불현듯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유산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는 조용히 법당으로 돌아왔다.

강렬한 꿈의 여운 때문인지 조각상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만져보니 아직 흙이 굳지 않았다.

그는 꿈에서 본 것처럼 조각상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 뒤를 돌아보게 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탄탄대로가 놓인 밝은 앞쪽을 걷기보다 그늘진 뒤쪽을 돌아보라고 했다.

그곳에 놓인 장작더미가 되라고 말하고 있었다.

눈앞의 성공에 연연하지 말고 훗날 추운 한겨울 구들을 덥힐 장작이 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곳에 정토가 있다고 아버지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설총이 돌아간 뒤 아침 법당에서는 소란이 일어났다.

스님들이 법당에 들어왔다가 깜짝 놀랐다. 어제 저녁까지도 멀쩡하게 앞을 향하고 있던 원효 조각상이 하룻밤 사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각상은 뒤를 돌아본 채 그대로 굳었다.

500여 년이 흘러 일연이 분황사에 왔을 때도 설총이 만든 원효 소상은 뒤돌아본 채 서 있었다.

뒤돌아보는 원효상에 영감을 받아 일연은 절창을 남겼다.

원효가 삼매경 두루마리를 처음으로 여니(角乘初開三昧軸) 
박 들고 춤추며 거리마다 교화를 베풀었네(舞壺終掛萬街風) 
달 밝은 요석궁에 봄꿈은 가고(月明瑤石春眠去)
문 닫힌 분황사엔 뒤돌아보는 모습만 남았네(門掩芬皇顧影空)

김유신 장군과 최치원, 설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경주 서악서원 전경. 매년 2월과 8월에 제를 지내고 있다. [사진=경산시청 제공]
김유신 장군과 최치원, 설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경주 서악서원 현판. [사진=경산시청 제공]

압독국의 후예

설총의 집안은 압량국(또는 압독국) 왕실의 후예이다.

압량국은 경산 일대에 3세기까지 400여 년 동안 고유문화를 발전시켜왔던 소국이다.

독자적인 문화의 꽃을 피웠던 압독국의 도읍지, 경산에서 원효와 설총, 일연과 같은 뛰어난 인문학적 통찰력을 지닌 사상가와 문장가, 학자가 배출되었 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82년 경산에서 도굴된 유물이 해외로 밀반출되려다 적발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산 일대 고분군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압독국 유적임이 밝혀졌다.

『삼국사기』를 통해 전해져왔을 뿐 실체가 불분명했던 압독국의 타임캡슐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일대는 2천여 년 전 경산 최초의 고대국가인 압독국의 근거지였다.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수천 기의 고분이 한 지역에 밀집해 있는데,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유적지이다.

임당고분에서만도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주는 철기류와 왕관을 비롯해 1만 3000여 점이나 되는 유물이 발굴되었다.

고분에서는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많게는 5명까지 함께 순장한 흔적이 있어 왕의 권위가 절대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압독국의 토기는 세련되고 정교해 상품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서 경북 일대에 넓게 유통되었다.

유약을 바른 토기도 많이 출토된 것을 보면 당시 압독국은 신라에 복속된 소국들 중에서 최고 수준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음 회에 계속)

·사진 제공_ 경산시청, 삼성현 문화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