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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1-04-22 08:39 (목)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9)] 아버지의 유산(2)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29)] 아버지의 유산(2)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1.02.27 0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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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설총은 범상치 않은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그는 고승과 전쟁미망인인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제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6두품인 아버지와 진골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비범한 출생

요석공주가 전 남편인 김흠운과 사이에서 낳은 설총의 누이는 내물왕의 후예인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훗날 신문왕과 혼인해 신목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설총은 어머니의 신분이 누릴 수 있는 사회적 특권이나 특혜를 물려받지 못하고 평생 6두품의 신분적 한계를 안고 살았다. 

설총이 만년에 「감산사 아미타불 조상기」를 썼는데, 이때 그의 벼슬이 나마(奈麻)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마는 골품제의 17등급 가운데 11번째 등급으로 5두품 이상이 오를 수 있는 벼슬이었으니, 그가 신라에 남긴 업적을 생각하면 매우 초라한 벼슬이었다.

설총이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는지는 사서(史書)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설총은 어머니 요석공주의 슬하에서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궁궐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리라는 게 상식적인 추론일 것이다.

그러나 경산에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요석공주는 원효의 고향인 경산에 와서 설총을 낳아 길렀다고 한다.

경산에는 원효와 요석공주, 설총이 등장하는 설화가 고을고을 깃들지 않은 곳이 없고, 그 이야기들을 풀어보면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만큼이나 많다.

마을 촌로들은 어릴 때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원효와 요석공주, 설총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마을의 오래된 나무와 절, 암자에는 으레 세 사람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경산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전승되어 내려온 설화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남아 있는 유물과 유적에는 설총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130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설총의 탄생과 성장 설화가 경산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끊어지지 않고 내려왔다는 사실이 설총이 경산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반증한다.

설화에 따르면, 요석공주는 만삭의 몸으로 장거리 여행을 마다하지 않고 경산을 찾아왔으나 원효를 만나지 못한 채 그곳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원효의 생가 터인 초개사에서 멀지 않은 유곡동 지름골(기름골) 민가가 설총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설총은 어린 시절을 경산에서 보냈으며, 무열왕 내외가 딸과 외손자를 보러 경주에서 청도를 지나 구룡산 왕재를 넘어와 반룡사에 와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신분제의 벽이 난공불락의 성과 같이 공고하던 신라에서 6두품 승려가 공주와 결혼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무열왕은 궁의 관리에게 명령을 내려 남산에 있던 원효를 불러 공주가 거처하던 요석궁에 머물게 한다.

무열왕은 왜 원효를 사윗감으로 내정했을까.

주요 군사거점지역인 원효의 고향, 압량주가 전쟁의 최전선이 된 것은 642년(선덕여왕 11년) 백제가 대야성(오늘날의 합천)을 공략해오면서였다.

신라가 이 전투에서 패배해 대야성이 백제 영토가 되면서, 신라 국경은 원효의 고향인 압량으로 축소되었다.

이 일로 김춘추는 정치적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압량의 도독으로 온 사람이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압량에 군사훈련장을 만들어 경산과 청도 일대에서 군사를 모집했다. 김유신은 이때 압량 출신으로 천촌만락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던 원효를 알게 되었다.

김유신은 그 뒤로 대야성을 되찾았고, 김춘추도 외교력을 발휘해 당나라 원군을 약속받는데 성공함으로써 정치적 위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진골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 무열왕 김춘추는 민심을 결집해 삼국통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설총이 태어난 시기는 김유신이 압량을 전초기지로 해 일대의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대야성을 되찾았을 무렵이었다.

무열왕은 주류 불교계에서는 해내지 못했던 대중교화로 민심을 얻은 원효에게 주목했다.

민심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원효의 영입이 절실했다.

선덕여왕 때 정치에 관여했던 고승 자장을 축출하기도 했던 무열왕은 김유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원효를 적극 그의 정치적 후광으로 삼으려 했다.

신라 골품제를 넘어 요석공주와 원효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주려 했던 것이다.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불렀다는,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는 노래를 무열왕은 구혼가로 해석해 경주 남산에 있던 원효에게 관리를 보내 내려오라는 왕명(勅)을 내렸다.

설총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성장

고승 원효와 과부인 요석공주의 만남은 당시 신라의 윤리규범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설총은 이 운명적 굴레를 안고 태어났지만, 그는 뛰어난 문장과 학문으로 이를 극복했다. 

경산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요석공주는 유곡동에서 설총을 낳은 뒤 한동안 반룡사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설총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반룡사(盤龍寺)는 661년(문무왕 1년) 원효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는데, 해질 무렵의 저녁노을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한 곳이다.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가 반룡사에 머물며 「산거(山居)」라는 시를 남겼다.

봄은 갔지만 꽃은 여전히 피어 있고(春去花猶在)
하늘은 개었지만 골짜기는 저 홀로 어둡구나(天晴谷自陰) 
한낮에 울어대는 두견새 소리에(杜鵑啼白晝)
깊은 산중에 산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네(始覺卜居深)

구룡산 골짜기에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한낮인 것을 모르고 야행성 두견새가 울어대는 바람에 깊은 산중에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는 이 시는 당시 반룡사가 늦게까지 봄꽃을 볼 수 있는 깊은 계곡 속의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설총이 어린 시절 공부에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 그가 땀을 흘리며 공부했다는 유곡리 나무 부근에는 지금도 개미가 살지 못할 만큼 땅이 짜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설총은 나면서부터 총명해 스스로 깨우치는 ‘생이지지(生而知之)’였다고 한다.

『논어(論語)』에는 ‘생이지지’와 함께 배워서 안다는 ‘학이지지(學而知之)’, 막힌 다음에야 비로소 배운다는 ‘곤이학지(困而學之)’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들이 공자에게 ‘생이지지’의 성인이라고 하자, 공자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오히려 배워서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시경을 얼마나 읽었던지 소가죽 끈으로 묶은 책이 세 번이나 끊어져 다시 매어 읽었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 일화까지 전해진다.

설총이 쏟은 땀의 결정이 지금도 경산 땅에 스며들어 있다는 설화는 그가 배워서 아는 ‘학이지지’를 넘어 어렵게 공부한 ‘곤이학지’를 실천한 노력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설화가 경산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어 내려오는 동안 수많은 학생들이 설총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스스로를 채찍질했을 것이다.

설총이 공부하러 가던 고도박골 고개를 넘으며 소년들은 꿈을 키웠고, 설총이 서울 경주에 끼친 학문적 성과를 큰 자부심으로 여겼을 것이다.

원효가 소요산에 머물면서 수행하고 있을 때도 요석공주는 아들 설총을 데리고 소요산을 찾아갔다.

요석공주는 남편을 만나러 가는 대신 산 아래에 별궁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원효가 수도하는 자재암을 향해 설총에게 절을 하게 했다고 한다.

그것은 설총이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주변 눈초리에 기가 죽지 않고 훌륭한 아버지가 있다는 자긍심을 아들에게 심어주려는 요석공주의 가정교육이었을 것이다.

설총은 총명해 스스로 깨쳤다고 할 뿐 어떤 스승에게 배웠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배웠다고 하나 알 수 없다.”는 여운이 남는 언급이 붙어 있다.

이것이 그의 공부 이력을 알려 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설총이 당나라로 건너갔다면, 국내파인 원효와 달리 당나라에 가서 중국어와 선진문물을 배워왔을 것이다.

국내에 머물러 있었다면 당시 유학자이며 문장가인 강수(强首)에게 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강수와 함께 국학에서 강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강수는 당대의 대유학자이면서 최고의 문장가였다.

강수

원효에게 평생의 도반인 의상이 있었다면, 설총에게는 스승이면서 동료였던 강수가 있었다.

강수와 설총은 신라에서 유학이 널리 퍼지던 시기에 동시대를 살며 함께 유학의 기틀을 잡았다.

두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유학을 학문으로 시작한 최초의 학자들이다.

이전에도 유학적 소양을 지닌 사람이 있었지만, 학문의 경지에 이른 학자는 이들이 처음이다.

설총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데 비해, 강수는 그가 산 시대와 인간적 면모를 살필 수 있는 단편적 자료들이 남아 있다.

설총과 동시대에 6두품 출신의 유학자로 산 강수의 일생을 살펴보면 설총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단초들이 적지 않다.

강수는 설총처럼 골품제의 높은 벽 앞에서 신분의 한계를 절감했던 6두품 출신이다.

그는 삼국통일전쟁을 치른 무열왕 때부터 통일을 완수한 뒤 왕권 강화를 꾀한 신문왕 때까지 활약한 관료로, 붓 한 자루로 이웃 나라의 마음을 움직이는 외교문서를 써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상대국과 동맹을 결속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강수가 진로를 정해야 할 나이가 되자, 아버지가 강수의 뜻을 알아보려고 물었다.

“불도를 배우겠느냐, 아니면 유도를 배우겠느냐?”

신라의 국교는 불교로, 신라 왕실과 지배층에 기반을 둔 귀족불교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당시 유교는 불교와 달리 아직 뿌리가 깊지 않아 기반이 탄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 신분제의 불합리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강수는 능력과 실력 위주로 인재를 선발하는 합리적인 유교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강수가 대답했다.

“불도는 세상을 도외시한 가르침(世外敎)입니다. 속세 사람으로서 유학의 도를 배우겠습니다.”

강수가 신라 국교인 불교를 세상을 도외시한 가르침이라고 비판하고 유학에 뜻을 둔 것은 그의 가족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설총의 가계가 압독국 왕족 출신으로 신라에 편입되었다면, 강수의 집안은 대가야가 멸망할 때 신라에 복속한 가야의 귀족 출신이었다.

그때 신라 중앙정부는 이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썼는데 강수의 집안도 오늘날의 충주인 중원경으로 옮겨가야 했다.

강수는 고향에서 뿌리 뽑혀 중원경으로 이주했던 대가야 후예의 문화적 분위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젊은 날 신분이 낮은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사귀었다.

부곡은 향, 소와 함께 군현에 예속되어 그곳에 사는 주민은 차별대우를 받았다.

강수가 스무 살이 되자 부모가 양갓집 처녀와 혼인시키려 했다.

“너는 지금 명성이 높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여인을 반려로 삼으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느냐. 아름답고 행실이 좋은 여자에게 장가들어라.”

그러자 강수가 대답했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지만, 도를 배우고 행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찍이 조강지처는 뜰 아래 내려오지 않게 하고, 가난하고 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 했습니다. 천하다 해서 아내를 버릴 수 없습니다.”

강수는 신분이 낮은 아내와 평생 해로 했다.

강수는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아 조를 먹으며 살아야 할 만큼 가난했다.

그가 죽자 강수의 아내는 나라에서 내려준 장례비용과 물품을 남편을 위한 불사에 바쳤다.

그녀는 신문왕이 조 100섬을 내려주자 끝내 받지 않고 차별대우를 받던 고향, 부곡으로 돌아갔다.

강수는 문장으로 특히 이름을 떨쳤다. 신라가 다른 나라와 주고받는 외교문서의 대부분이 그의 붓에서 나왔다.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을 때뿐만 아니라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의 붓은 빛을 발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자 김인문(金仁問)을 억류했을 때나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쫓아내려는 문무왕의 노선을 비난할 때도 강수는 신라 조정의 뜻을 대변하고 당나라를 에둘러 비판하면서 억류된 왕자를 무사히 풀려나오게 했고 당나라의 한반도 지배야욕을 꺾으며 우리 외교사에 한 획을 긋는 공을 세웠다.

신라의 국운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외교문서를 전담했던 업적에 비해 그는 낮은 벼슬과 녹봉을 받았다.

그가 받은 봉록은 매년 200석에 불과했고 그의 최고 벼슬은 8품 사찬에 다홍색 관복을 입고 갓끈을 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은 그나마 문무왕 때 지방 6두품 출신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이었다.

신라가 통일전쟁을 치르는 시기에 강수는 당나라와 고구려, 백제와의 외교문서를 담당하며 대문장가로 명성을 날렸고, 설총은 통일 후 신라가 평화와 안정을 구축하는 시기에 새로운 문자 체계를 완성해 이를 바탕으로 유학 경전을 해석하고 후학을 길러냈다. 원효와 의상, 강수와 설총이 발전시킨 불교와 유교문화는 일본에 전해져 7세기 후반 하쿠호(白鳳)문화가 성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신문왕의 시대, 만파식적

신문왕은 등극하자마자 상대등 군관(軍官)을 강등시키면서 삼국통일 전쟁 때 비대해진 무관 출신의 진골귀족 세력과 거리를 두었다.

이어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단행한 신문왕은 이를 계기로 확고한 전제왕권을 수립했다. 김흠돌(金欽突)의 딸인 왕비를 연좌제에 엮어 폐비시킨 뒤, 분열된 민심을 수습하고 역량을 한데 모으기 위해 대대적인 대민 홍보에 나섰다. 

682년 신문왕은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보물을 얻게 됐다는 소식을 온 나라에 알렸다.

만파식적은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보냈다는 대나무 피리다.

이것을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근심이 사라진다고 하니 보통 보물이 아니어서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해 신라의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이 대나무가 자라던 곳에서 용이 나와 신문왕에게 검은 옥대를 바치면 서 말한다.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것은 합해진 연후라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는 소리로써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는 아주 좋은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취하여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이것은 집권 초기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감행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 했던 신문왕이 각계각층의 힘을 결집하고 조율해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만파식적의 피리소리를 만방에 울린 신문왕은 무열왕의 외손녀이며 조천성 전투의 영웅인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온 나라가 떠들썩한 혼례를 거행했다.

이 김흠운의 딸은 설총과는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이부(異父)누이다.

설총의 묘. 경주 보문동 한복판 인가에 둘러 싸여 있으며 비문과 비석은 없으나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사진=경산시청 제공]

신목왕후를 책봉하던 모습이 『삼국사기』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전한다.

신문왕은 683년 관리를 보내 혼인 기일을 정하고, 신부 집에 혼인을 청하는 의례인 납채(納采)를 치렀는데, 폐백이 15수레, 쌀과 술, 기름, 꿀, 간장, 포, 식혜가 135수레, 벼가 150수레나 되었다고 하니 수레 행렬이 얼마나 길게 줄을 이었을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관리를 신부 집에 보내 부인으로 책봉하고 사람들을 보내 부인을 영접해 오게 했는데 부인이 탄 수레 좌우에 시종하는 관리들과 여인들이 뒤따랐다고 하니 혼례가 성대하게 치러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날 경주 시내는 왕비 행렬을 구경하러 몰려든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을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사진 제공_ 경산시청, 삼성현 문화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