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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1-09-21 21:47 (화)
[하응백의 해산물 인문 기행①] '통영의 봄을 먹다' 통영 다찌와 졸복국
[하응백의 해산물 인문 기행①] '통영의 봄을 먹다' 통영 다찌와 졸복국
  • 하응백 문화에디터
  • 승인 2021.03.31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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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문화에디터 ‘하응백의 해산물 인문 기행’을 시작합니다. 첫 편은 통영의 맛과 인문 기행입니다. 통영다찌집과 졸복집을 취재하고, 이순신 장군의 흔적과 박경리 선생의 묘소를 찾은 그야말로 해산물과 함께 하는 인문 기행입니다. 입맛을 다시면서 정신의 양식도 살찌우는 코너로, 한 달에 1회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편집자주

통영다찌 한 상.
통영다찌 한 상.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1. 통영은 복합적인 도시

경남 통영은 다면적인 도시다.

도시의 이름 자체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나왔다. 역사적으로 통영이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통영은 박경리, 김춘수, 윤이상 등 여러 예술인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문화·예술적으로 통영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이다.

통영은 굴과 멍게 등의 수산물의 메카이기도 하다. 굴의 경우 전국 양식 굴의 80% 이상을 생산한다. 멍게의 생산량 또한 상당하다.

이외에도 고등어, 참돔, 볼락, 참치, 방어 등의 완전양식 혹은 반양식의 본거지다.

통영은 멸치, 붕장어 등의 여러 연안어업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제철을 맞은 통영 멍게.
제철을 맞은 통영 멍게.

통영은 바다 낚시꾼들의 주요 출발지다.

인근의 욕지도, 매물도를 비롯한 여러 섬으로 갯바위 낚시를 갈 때 대개는 통영을 거치게 되어 있다.

아예 통영을 근거지로 해서 갈치나 볼락이나 오징어를 잡는 낚싯배도 많다. 여수와 함께 남해 낚시의 중심 도시가 바로 통영이다.

통영 인근에는 볼거리도 많고 관광지로 이름난 섬도 많다.

그러다 보니 통영은 역사와 문화와 수산업과 연안 해상교통을 기반으로 하고 여기에 레저와 관광이 가미되어 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가 되었다.

통영의 음식 또한 통영의 이런 복합적인 성격에서 탄생했다.

 

2. 통영은 이순신 장군의 도시

1593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 조정은 삼도수군통제사(종2품)라는 관직을 신설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겸직시켰다.

이순신의 수군이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였으므로 이순신 휘하에 수군을 통합시킨 것이다. 삼도 수군이란 충청, 전라, 경상의 수군으로 조선 전체의 해군력에 해당했다.

이순신 장군은 요즘 말로 하면 해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영, 즉 해군 총사령부를 한산도에 설치했다.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라고 하는 시조가 바로 이때 지어졌다. 막중한 책임감에 잠 못 이루는 장군의 모습이 잘 반영된 시조다.

한산도는 통영 앞바다에 위치하면서 현재의 제승당 주변 바다에 해풍의 영향을 적게 받는 천혜의 포구가 있다.

섬이라는 이점 때문에 육지 쪽이 비록 왜적에게 점령당해도 해군력만 살아있다면 능히 남해를 차단해 전라도에 이르는 왜군의 수군을 방어할 수 있다. 장군이 한산도에 주둔할 때 조선 수군은 패배를 몰랐다.

하지만 원균의 패배 이후 한산도의 통제영은 폐허가 되어버린다.

이후 이순신 장군은 통제영을 목포 고하도, 완도 고금도 등지로 옮기면서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해 노력했고 전쟁 말기에는 거제도 오아포에 통재영을 설치한다. 오아포는 현재의 거제 가배리 가배항이다.

통영 미륵도에서 바라본 한산도.
통영 미륵도에서 바라본 한산도.

1598년 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1601년 체찰사(體察使) 이덕형(李德馨)이 거제도 오아포에 있는 통제영을 시찰하러 왔다.

전시(戰時)에야 통제영은 섬에 있는 것이 유리하지만, 평화시에는 섬에 군영이 있으면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다.

중앙 정부와의 각종 문서의 소통이나 인적 교류는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해군총사령부의 사정이 이러하니 이덕형은 오아포가 통제영으로 적당하지 못하다고 조정에 건의한다.

이에 당시의 통제사 유연(柳淵)이 오아포에서 고성의 춘원포로 통제영을 옮겼다. 하지만 춘원포도 통제영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1604년 여름 경상도 관찰사 이시발(李時發)은 “......고성(固城)을 버리고 따로 중간의 합당한 곳을 찾으려면 두룡포(頭龍浦) 이외에는 달리 그럴듯한 곳이 없습니다만, 두룡포의 형세는 뒷산이 너무 높고 앞의 항만이 얕은 듯하므로 또한 아주 좋은 지역은 아닙니다. 사람은 각각 소견이 있는 것이므로......”라는 장계를 올린다.

두룡포(통영)이 약점도 있지만 딱히 다른 대안이 없기에 새로운 통제영으로 정하자는 논지다. 이 무렵 삼도수군통제사는 이경준(李慶濬)이었다.

그는 1603년부터 실질적으로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고 기지를 건설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가 두룡포에 통제영을 건설한 내막은 현재 남아있는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통제영은 처음에는 한산섬에 있었는데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멀었다.

중간에 고성으로 옮겼더니 배를 숨기는 데는 편하였으나 갑자기 당하는 변란을 막는 데는 불편하였다.

통제사로 오는 이들이 우선 편한 것만 생각하여 능히 고치지 않고 두었는데, 공(이경준)이 통제사가 됨에 미쳐 개연히 적당한 지형을 헤아려 진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되었다.

서쪽으로는 판데목을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견내량을 끌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큰 바다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육지와 이어져 있다.

깊어도 구석지지 않고 얕아도 드러나지 않아 진실로 수륙의 형세가 국방의 요충지였다. 사방에 있던 적들이 이곳을 지나가지 못하였다.

전략적으로 통영을 선택한 이유를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이경준은 목은 이색의 8세손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세병관(洗兵館, 국보 제 305호)관이란 건물도 지었다.

‘세병’이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이니, 평화가 왔다는 말이 된다. 왜 조선에 평화가 왔는가?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몰아내어 전쟁을 끝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병관’은 이순신 기념관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경준은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면서 세병관을 중심으로 하여 통제영을 새롭게 건설했다.

각종 창고와 12공방, 막사와 성벽이 건축되었고, 통영 앞바다에는 전선(戰船)이 배치되었다. 명실상부한 조선해군총사령부, 옛말로 삼도수군통제영이 새롭게 건설되었다.

이렇게 하여 17세기 초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약 300년 동안 통영은 남해에서 가장 큰 해군 도시로 기능했다.

18세기 통영지도.
18세기 통영지도.

통영은 군항이자 어항이었고, 상업항이기도 했다.

통영으로 모인 각종 물자는 전국으로 수송되었고, 원래 군수(軍需)를 담당했던 12공방의 각종 물품들은 민간 수요도 충당하기에 이르렀다.

통영갓, 통영소반, 통영나전 등의 공예품은 전국적인 명성을 획득했다.

하지만 20세기 초 일본의 침탈과 식민지화 과정에서 일본은 통영을 입맛대로 개조했다. 군항의 기능은 진해로 보냈다.

어항으로서의 기능이 강화되고, 통제영의 각종 건물은 세병관을 제외하고는 다 헐어버렸다.

그 자리에 식민 통치를 위한 법원 등의 관공서를 재배치했다. 미륵도와 통영항을 잇는 해저터널을 파기도 했다.

이렇게 통영은 하나하나 옛 모습을 잃어갔지만 그래도 이순신 장군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와 장군의 기념관인 세병관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장군을 더욱 기념하고 싶었던 대한민국 정부는 1955년부터 통영은 ‘충무’로 명명했다가, 좀 어색했던지 1995년 다시 통영이란 이름으로 환원시켰다.

덕뿐에 그 시절 전국으로 퍼져나갔던 통영의 향토음식 김밥은 ‘충무김밥’이란 이름을 지금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3. 통영다찌의 기원

음식에 대해 좀 아는 사람이 통영으로 여행을 가면 고민이 생기기 시작한다.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너무 많아서다. 봄철에 1박 2일로 통영여행을 하고 네 번 정도 식사를 한다면?

봄이니 도다리쑥국이 생각난다.

멍게도 봄이 제철, 멍게 비빔밥도 일품이다.

통영에 갔는데 충무김밥도 먹어주어야 한다. 씨락국과 장어탕은 어떻게 하고? 요즘 졸복국도 좋다던데?

바닷가에 갔는데 회는 안 먹나? 통영 꿀빵은? 해물 짬뽕도 별미라던데? 게다가 통영은 굴의 주요 생산지이자 집산지이기도 하다.

음식에 대해 좀 고수라면 3, 4월이면 제철인 왕밤송이게도 생각한다.

참미더덕의 상큼한 바다향도 뿌리치기 힘들다. 4박 5일 정도 일정이라면 하나씩 먹어보겠지만, 1박 2일로 통영의 각종 제철 먹을거리를 제대로 맛보기는 어렵다.

멍게 비빔밥.
멍게 비빔밥.

이러한 고민을 한방에 해결할 순 없지만, 그래도 비슷하게는 해결할 수 있는 통영해산물 종합선물세트가 있다.

그게 바로 ‘통영다찌’다.

‘다찌’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중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일본어 기원설이다. 일본어 다찌노미(立飲み:서서 마시는 곳)에서 왔다는 거다.

일제강점기에 뱃일을 나가는 어부들이 서서 먹었던 선술집에서 유래했다는 설. 술값만 내면 안주는 그날그날 바다 상황에 따라 수급이 가능한 싱싱한 안주가 그냥 따라온다.

그러다가 점차 격식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게 바로 통영의 ‘다찌’집이다.

전주의 막걸리집과 비슷한 개념이다. 원래 다찌의 출발이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된 것이니 충분히 일리가 있다.

통영의 왕밤송이게.
통영의 왕밤송이게.

1990년대에 완전히 정착한 정통 다찌집은 술을 시키면 수십 가지 안주가 따라 나왔다.

소주 1병에 맥주 2병에 2만 원이면, 여러 안주가 나오고, 또 술을 시키면 다른 안주가 나오는 식이었다.

그러나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나 가족끼리 여행을 하는 경우 아무래도 이런 방식이 불편하다.

몇몇 다찌집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1인분 정가를 정하는 식으로 진화했다.

요즘은 반다찌집도 많이 생겼다. 낭비되는 요소가 많아 딱 필요한 음식만 먹자는 취지다.

간단한 선술집에서 시대적 상황에 맞게 변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진화를 거듭한 게 ‘통영다찌’인 셈이다.

통영다찌의 내력이 어쨌거나 기본은 “여러 제철 해산물을 골고루 조금씩 맛보는 음식 한 상”을 말한다.

‘다찌’가 일본어에서 온 것이라고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다.

특히나 이순신 장군의 도시에서 일본말을 쓴다고 분개할 건 없다.

목포, 여수, 통영, 마산, 부산 등 남해의 여러 항구는 지리적 위치와 더불어 항구의 특성상 개화기 이후 식민지 시절 동안 특히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근대적 어업과 상업이 일본에 의해 이식되었기에 일본어의 이식 또한 불가피했다. ‘다찌’를 굳이 우리말로 개명한다면, ‘통영해산물 한상’ 혹은 ‘통영 모듬’이라고 하면 어떨까?

 

4. 통영다찌 한 상

서호시장 인근 벅수다찌로 향했다.

다찌집하면 부둣가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뱃사람들의 활달한 말이 오간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벅수다찌는 그 반대로 서울 강남의 한정식집을 연상할 정도로 깔끔한 실내 분위기였다.

손님도 현지인보다는 관광객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듯 했다. 하기야 현지 통영 사람이라면 이런 다찌집을 구태여 찾을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맛있는 것만 골라서 취향대로 찾아가면 더 효율적일 터.

다찌집은 처음에는 부둣가의 선술집에서 발달하여 통영 사람들이 많이 찾은 집이었겠지만, 이젠 관광객을 대상으로 여러 음식을 맛보게 하는 종합 음식점으로 변신했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

죽과 멍게비빔밥과 함께 바로 근사한 한 상이 차려져 나온다.

중앙의 큰 접시에는 멍게, 해삼, 전복, 해삼창자젓(고노와다), 새조개, 미더덕, 문어, 군소가 놓였고, 옆으로는 산낚지 탕탕, 참돔과 광어회, 참돔 초밥, 볼락김치, 새우장, 복껍질 무침, 과메기, 부침개, 양상치 샐러드, 호박찜 등 20여 가지의 음식이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조금씩 나오는 음식이지만 모두 맛이 싱싱하고 훌륭했다.

사실 회나 전복이나 해삼은 싱싱하면 어디나 다 비슷하다. 이 집만의 특징은 새우장과 해삼창자젓과 볼락김치, 꽃게회에 있었다.

새우장은 생새우를 간장에 담아 숙성시킨 음식인데, 이 집의 새우장은 쫀득한 식감이 매우 독특하면서도 감칠맛이 났다.

해삼창자젓 또한 고급음식이다. 고노와다라는 일본말로 더 잘 알려졌다. 상당히 세련된 고급한 맛이다.

부세조기 구이와 가리비찜과 조개구이.
부세조기 구이와 가리비찜과 조개구이.

볼락김치는 무만 담겨 있어 볼락은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징그러워해서 볼락은 내놓지 않지만 달라면 준다고 해서, 달라고 해서 맛을 보았다.

뼈가 거의 씹히지 않고 잘 숙성이 되어 별미였다.

머리까지 다 먹을 수 있다. 거제와 통영 지역에서 잡히는 볼락은 예로부터 젓갈을 담아 먹었다.

1803년 김려(金鑢)가 진해로 귀양 와서 지은 어류학서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에 해마다 거제 사람들이 볼락젓을 수백 항아리에 담아 부두에 와서 판다고 했으니 아마도 통영 사람들도 예로부터 그 볼락젓을 맛보았을 것이다.

통영과 삼천포 사람들은 유독 볼락을 좋아한다. 통영 낚시꾼은 큰 볼락은 감성돔하고도 안 바꾼다는 것으로 볼락 사랑을 표현한다.

꽃게회
꽃게회

어느 정도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가리비찜과 꽃게회와 조갯살 다짐구이와 부세조기 구이와 튀김이 나왔다. 모두 특별한 맛이었고 해산물을 아주 잘다룬다는 느낌을 받았다.

꽃게회 또한 독특한 맛이었다. 꽃게라기보다는 게장을 만들어 먹은 돌게에 가까운 식감이었다. 시원하고 상큼했다.

볼락김치.
볼락김치.

참돔 서더리탕을 마지막으로 통영다찌 한 상이 마무리되었다.

한 편의 해산물 음식 쇼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금씩 먹었지만 워낙 여러가지를 먹다 보니 배는 불러왔다.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다고 느꼈을 때 다찌 한 상이 머무리되었다.

튀김과 서더리탕.
튀김과 서더리탕.

5. 박경리 선생의 묘소

1994년이었던가. 박경리 선생의 『토지』가 완간되었다.

당시 현대문학에서 『토지』에 대한 평론 청탁이 와서, 16권으로 완간된 그 긴 소설을 두 번이나 읽고, 토지에 대한 평론인 「비극적 삶의 초극과 완성」을 썼다.

아래는 그 평론의 끝 부분이다.

도솔암 관음탱화의 완성으로 마침내 길상의 삶은 큰 종지부를 찍는다. 삶의 비극성이 탱화의 청초한 선과 현란한 색채를 통한 예술성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탱화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길상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탱화의 완성이 주는 상징성은 길상의 고독한 삶의 완성이며, 나아가 궁극적으로 『토지』의 완성에 비유되지 않는가. 이 세계를 거친 다음의 『토지』는 평화롭다. 식민지적 삶의 비극성과 운명적 비극을 인내하고 대결하고 부성과 모성의 사명으로 극복한 『토지』의 인물들은 고통스런 삶을 살았지만, 그 고통으로 인해 환국과 윤국, 양현, 몽치 등의 삶이, 나아가 지금 우리의 삶이 가능하지 않은가. 따라서 『토지』는 현재적이다. 『토지』는 근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삶을 초극하고 완성하기 위한, 그래서 현재적 삶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한, 길고도 긴 장정이었다.

잡지가 나오고 얼마 뒤 박경리 선생이 전화를 주셨다.

그 긴 걸 다 읽고 명쾌하게 정리를 잘 했다고 치하하셨다. 집으로 와서 밥 한 끼 먹자고 하셔서 원주로 갔더니, 국을 한 솥 끓여 놓으셔서 잘 먹고 온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그 무렵 몇 번 뵈었던 것 같다.

박경리선생 동상.
박경리선생 동상.

통영에 자주 갔지만 늘 낚시하러 바다로 쏜살같이 달려가느라 선생의 안식처에 한 번도 가 뵙질 못했다. 이번에는 낚시 포기하고, 통영 다찌로 배를 채운 다음 날 선생을 찾아뵈었다.

봄꽃이 만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생은 높다랗게 앉아 미륵도의 능선과 통영 신전리 바다를 보고 있었다. 평생 외롭게 사셨는데, 여기도 좀 외롭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경리선생 묘소.
박경리선생 묘소.

(하선생, 다 외로운거야. 그래도 가끔 하선생같은 이가 찾아와서 괜찮아. 고기 많이 잡아먹어. 쓰레기는 버리지 말고.)

 

6. 졸복국

통영 여행의 마지막은 졸복국이다.

서호시장 시락국 집을 지나 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만성복집이 나온다. 자리 잡자마자 빠르게 아기자기한 반찬과 팔팔 끓는 졸복국이 뚝배기에 담겨 나온다. 미나리향이 향긋하다.

복국은 취향에 따라 양념장을 곁들여도 된다. 조금씩 넣어가면서 간을 맞추어야 한다. 어느 순간 가장 맛있는 정점이 온다. 그걸 잘 찾아야 한다.

반찬으로 나오는 멸치회도 일품이다. 이걸 밥에 통째로 비벼서 먹으면 통영 봄 바다가 살아서 펄뜩이는 느낌을 받는다. 그때 졸복국의 국물맛으로 평정을 되찾으면 된다.

복집의 밑반찬. 상단 중간이 멸치회다. 상단 우측이 양념장.
복집의 밑반찬. 상단 중간이 멸치회다. 상단 우측이 양념장.

 

7. 충무김밥

통영김밥은 결국 통영에서 먹지 못했다. 대신 몇 인분을 싸서 서울까지 가져와서 먹는다. 그렇게 이른 봄날의 통영여행은 푸짐하게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