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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1-09-21 21:47 (화)
[나의 초록목록(草錄木錄)⑬] 산나물 이야기
[나의 초록목록(草錄木錄)⑬] 산나물 이야기
  • 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 승인 2021.04.05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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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식물을 공부하는 일이 참으로 보람된 일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들꽃의 삶과 산꽃의 삶을 구분할 수 있고 그들의 시선에서 식물의 분포를 예측하는 감이 생긴 것,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식물과 먹을 수 없는 식물로 구별할 줄 아는 눈을 갖게 된 것, 그들 가운데 맛있는 풀과 맛이 별로인 풀을 나름 객관적인 잣대로 분별해내는 미각을 얻은 것, 특히 몸에 좋은 약초와 그렇지 못한 독초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 

요즘 비건 선언 소식이 부쩍 늘고 있다.

우리 산과 들의 나물들은 부지런히 새순을 내며 동물성 식품에 매달리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냉이와 쑥과 달래는 봄의 전언과 같은 그 향기로, 고들빼기와 민들레와 씀바귀는 특유의 쌉싸름함으로, 두릅나무와 음나무(개두릅)와 독활(땅두릅)의 새순은 각기 다른 연둣빛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식물들은 겨우내 농축한 에너지를 저마다 지상에 꺼내 놓는다. 대체로 익숙한 들판의 봄나물과는 달리 특정 지역의 깊은 산에서 자라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선 산나물도 있다.

4월, 깊은 산중은 그들의 발아로 분주하다. 

식물학 서적과 도감을 통해 이론으로만 배웠던 산나물과 내가 실제로 친숙해진 것은 강원도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러니까 20대에서 30대로 건너가던 시기의 몇 해를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일명‘편치볼마을’에서 보내면서 산나물을 알아보는 나의 눈높이는 그들이 사는 위도만큼이나 조금 높아진 것 같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고 그 가운데 움푹한 분지에 형성된 남한의 최북단 행정 구역이 양구군 해안면이다.

지리 교과서에서는 ‘침식분지’를 설명할 때 해안면의‘편치볼지형’을 예로 든다.

한국전쟁 때 해안면을 둘러싼 산지의 격전을 취재하러 온 외국 종군 기자가 산정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마치 화채그릇(Punch Bowl) 같다고 하여 부른 이름이 면의 고유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펀치볼전투를 비롯하여 분지의 안팎에서 일어난 접전들은 오늘날 역사 교과서에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전경.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고 그 가운데 움푹한 분지에 형성된 남한의 최북단 행정 구역이 양구군 해안면이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펀치볼은 한때 38선 이북에 속했던 땅으로 수복된 후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지였으나 50년대와 70년대 두 차례에 걸쳐 이주민을 모으고 경작권을 부여하여 재건을 시작하였고, 그 거칠고 메마른 폐허에서 이주민들은 어렵게 마을을 일구었다.

하지만 70여 년이 지나도록 주민들은 자신의 땅을 갖지 못하였다. 펀치볼에는 주인 없는 땅, 무주지(無主地)가 많았던 것이다. 

7개의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서 분지라는 그릇 안에 담긴 해안면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면 전체가 민통선 안에 속하는 곳이다.

나는 그 마을에 들어 십 년의 절반을 살았는데 오목한 분지와 나를 에워싼 산들이 꼭 엄마 자궁에 든 것만 같은 편안함을 불러오곤 했다.

동그스름하게 패인 그곳을 기지로 삼고 비무장지대의 동단과 서단을 수차례 횡단하며 치열하게 식물을 조사하고 기록하였고 정성껏 DMZ자생식물원을 단장하여 문을 열었다.

비무장지대를 오가며 탐색한 식물들 사이에서 자생지의 환경이 취약한 개체들은 별도의 보호가 필요했다.

그들의 수를 늘리고 안전한 서식 공간을 새롭게 마련해 주는 것이 그 당시 가장 적절한 보전 방안이었다.

‘DMZ 자생식물의 탐사와 보전’이라는 이름의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철책선에서 위험에 처한 많은 식물을 구호하기 위하여 그들의 씨앗을 한 톨 한 톨 받아 모았다.

거둬진 종자를 파종하고 발아시켜 식물의 수를 늘리는 증식작업은 손이 정말 많이 가는 일이기에 모종을 다루는 농사일이 익은 동네 어르신들의 손길이 내게는 간절했다.

그렇게 식물원은 동네 몇몇 할머니들의 일터가 되었고, 그들과 어울리는 동안에 나는 강원도 산나물을 알짜부터 쭉정이까지 다 배웠다. 

그 시작은 얼레지다.

얼레지의 화려한 꽃은 자못 이국적인 느낌을 풍긴다.

만개한 얼레지 꽃 군락을 숲에서 만나면‘비가(悲歌)’를 뜻하는 ‘엘레지(elegy)’를 얼레지와 나란히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정확히 할머니들에게서 ‘얼러지타령’을 듣기 전까지는. 

만개한 얼레지 군락지.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식물원에서 파종한 얼레지 싹이 올라온 걸 보고 이걸 왜 고생해서 키우냐며 오유리의 김 할머니와 만대리의 박 할머니는 나를 식물원 뒷산으로 이끌었다.

그곳은 지뢰 미확인 지대라 저지선이 안내하는 안전한 땅만 딛고 둘러 다녀야 했는데, 할머니들 덕분에 그날부로 검증된 지름길을 익히게 된 것이다.

여기가 얼러지 자리라며 곧 얼룩덜룩한 새순이 이곳에 한가득 올라올 거라고 김 할머니는 한쪽 팔을 쭉 뻗어서 허공에 반원을 그리며 자랑하듯이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어떤 가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바랑골 뒷동산에 더덕싹이 나거든
우리나 삼동세 더덕 캐러가세

대바우 용옆에 얼러지가 나거든
너하고 나하고 얼러지 캐러 가자

얼러지타령은 양구의 산악지대에 기대어 살아가는 주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민요조 타령으로 지역에서는 ‘양구아리랑’으로 여긴다.

그 구슬픈 가락을 듣자마자 그간 식물학계에서도 어수선했던 얼레지의 어원이 내 안에서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얼룩덜룩한 무늬의 잎과 먹는 나물이라는 뜻이 더해져 ‘얼러+취’가 얼러지가 되었고 식물학자들에 의해 얼레지로 기록된 것이다.

그 얼룩덜룩한 무늬를 가진 잎을 두고 일본에서는 애기사슴의 몸에 난 얼룩 문양을 닮았다고 하거나 서양에서는 아메리카얼레지 잎을 송어의 얼룩무늬에 비유하기도 한다. 

얼레지 신초. 얼룩무늬는 주변의 환경에 맞춘 일종의 보호색인 동시에 엽록소 생산을 아껴 에너지를 비축한 증거다. 생존을 위한 식물의 현책.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꽃이 활짝 피고 나면 얼레지 잎은 제법 초록을 얻는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먹을 것 귀하던 시절의 이른 봄, 첩첩산중 강원도의 산골 마을에서 얼레지 싹을 비롯한 산나물은 보배로운 구황 식물이었다.

할머니들에게서 배운 바로는 얼레지 캐러 가서 얼레지만 얻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산은 같은 시기에 피는 서로 다른 나물들을 두루 내어 준다는 것.

그곳의 식물 종이 다양해서 가능한 일이다. 얼레지 잎이 돋을 무렵 함께 나는 지장나물과 우산나물과 삿갓나물과 회순(회나무 새순)의 햇잎들을 한데 데쳐서 약간의 간장만 넣고 조물조물 무치는 게 가장 맛있게 먹는 비법이라고 내게 일러주었다.

우산나물과 꼭 닮은 삿갓나물은 독이 있어서 먹지 않는다고 일찍이 분류학 전공 수업에서 배웠는데, 어린 순은 데쳐 내면 해로울 거 하나 없다며 해안의 할머니들은 크게 구분하지 않고 두루 섞어서 무쳐내었다.

잎이 억세지기 전에 그들 햇잎을 한 장 한 장 볕에 정성스레 말리는 일에도 힘을 쏟으셨다. 계절 가리지 않고 내내 묵나물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레지처럼 백합과 여러해살이풀인 풀솜대를 민간에서는 지장나물이라고 부른다.

항간의 해설은 구황식물인 풀솜대가 보릿고개를 전후하여 굶주린 백성을 지장보살과 같은 마음으로 구제했기에 지장나물로 부른다고 설명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지장나물로 불러야 할 식물이 많아도 너무 많다.

오유리의 김 할머니는 풀솜대가 지장나물로 불리는 건 생김새 때문이라고 했다.

햇잎을 펼치며 내민 새순의 꼭대기에 꽃망울이 맺힐 때가 지장나물을 캐는 적기인데, 딱 그때 빼꼼히 고개 내민 꽃망울 형상이 영락없는 지장보살 두상 같아서 예로부터 지장나물로 불렀다는 거다.

데쳐서 무쳐 먹으면 솜털이 보송한 풀솜대가 입안 전체를 보드랍고 포근하게 감싼다. 봄기운이 가득 번지는 맛이다.

만대리의 박 할머니는 강원도 산나물 중에 그들이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지장보살 두상모양으로 꽃대를 내민 풀솜대. 이내 화사한 꽃을 피우고 붉은 열매를 맺는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이게 ‘누룩치장떡’이라고 오유리 김 할머니는 아기 손바닥 크기의 부침을 내 앞으로 가까이 옮겨 놓았다.

할머니 댁에 초대받아 밥 얻어먹는 일은 오지에 사는 기쁨 중 하나였다.

강원도 지방에서 누룩치라 부르는 이 식물의 진짜 이름은 왜우산풀이고 산형과에 속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강원도를 중심으로 일부 지역의 높은 산지에 드물게 자라는 식물로 과거에는 더 널리 자랐을 것이라 추측된다.

하지만 약용과 식용의 가치를 높이 쳐서 고가로 거래된 탓에 자생지의 개체들이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직접 보고 만지고 먹는 행위로 식물의 쓰임을 학습할 때 나는 몇 곱절이나 자극받는다.

왜우산풀 특유의 누린내가 내 후각과 미각을 건드렸다.

장떡도 훌륭했지만 그 의뭉스러운 향 때문에 누룩치 생채가 나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왜우산풀. 활짝 핀 우산모양 꽃차례. 작은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저마다 가는 꽃대에 달려 정확히 한 지점에 모인 후 잎을 달고 있는 몸체로 이어지기 때문에 마치 바람에 뒤집힌 우산 모양이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밥상 가운데 놓인 물김치 향이 하도 새로워서 초록 잎 한 장을 건져 내 밥그릇으로 옮겨와 펼쳐보니 는쟁이냉이 잎이었다.

내가 이름을 대자 김 할머니는 산갓이라고 고쳐 말했다. 갓처럼 알싸한 향이 나는데 깊은 산에서 자라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산갓이라 부르는 는쟁이냉이를 DMZ 동부 전선의 깊은 산 계곡부에서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냉이와 가까운 십자화과 혈통의 식물이고 잎이 둥글고 넓은 편인데 그 생김새가 꼭 숟가락을 닮아서 북한에서는 숟가락냉이라고 부른다.

남한에서는 그 둥근 잎이 명아주를 닮았다고 하여 민간에서 명아주를 일컫는 ‘는쟁이’를 빌려다가 는쟁이냉이라고 부른다.

양구를 비롯하여 인제, 화천 등지의 산촌에는 는쟁이냉이로 물김치와 장아찌를 담가 먹는다.

조선시대에는 산갓을 임금에게 바치거나 상류층 양반가를 중심으로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경상북도에서 거의 유일하게 는쟁이냉이가 자랄 수 있는 봉화군에는 옛 조리법을 그대로 이어 ‘산갓물김치’를 담그는 고택이 있다. 

는쟁이냉이 신초. 앙다문 꽃대를 품고 잎을 펼칠 때가 산갓 나물로는 적기다. [사진=이상을]

마타리와 대나물과 곤드레(고려엉겅퀴)가 뒤섞인 묵나물밥, 곰취와 삼나물(눈개승마)과 명이나물(산마늘)과 잔대로 담은 각종 장아찌, 수리취와 서덜취와 비비추와 다래순을 각각의 나물성에 따라 양념을 달리하여 버무린 나물무침, 참나물과 참당귀와 어수리와 파드득나물 쌈채류……. 할머니들의 밥상은 훌륭한 산나물 학습장이었다. 

강원도에서 만난 수려한 산나물들을 엄마가 계신 내 고향에서는 즐겨 먹지 않는다.

그들을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식물은 저마다의 자리가 정해져 있으니까.

엄마는 10년 전에 유방암 판정을 받고 왼쪽 가슴을 도려냈다.

긴 병원 생활을 끝내고 스스로 식단 관리를 시작했기에 엄마는 자연스럽게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비건은 아니고 건강상 달걀과 생선을 먹어야 해서 페스코 정도 된다.

그런 그녀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건 산과 들에 자라는 나물 요리인데, 특히 머위를 다루는 기술이 수준급이다.

이른 봄에 갓 나온 잎은 살짝 데쳐서 된장과 고추장을 약간 더해서 무쳐 먹고, 손바닥 보다 커진 잎은 밥 위에 쪄서 쌈으로 먹는데 자글자글 끓인 된장과 함께 먹으면 좋다.

피기 직전의 꽃대는 따자마자 통째로 튀겨서 간식처럼 먹거나 된장에 묵혀서 간혹 잊을만할 때 밥상에 등장시켜서 입맛을 돋게 한다.

제법 굵어진 줄기는 볶아서 자작자작한 들깨탕으로 만드는데, 이걸 내가 제일 좋아한다.

귀한 강원도 산나물이 나에게 특식이나 별미 같은 거라면 고향 집 언저리에 아무렇게나 자라는 머위는 오래 묵은 장맛 같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