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이조리 회화나무

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

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

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

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경주 이조리 회화나무는 최진립 장군의 충절과 애민정신을 보여주는 노거수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경주 이조리 회화나무는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1568~1636) 장군의 생가인 잠와고택 충의당(忠義堂) 북동쪽에 늠름하게 서 있다.

잠와(潛窩) 최진립 장군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회화나무 아래에는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지내는 제단이 마련돼 있고, 줄기에는 금줄을 여러 겹 감고 있다.

“임진왜란 때 최진립 장군이 갑옷을 이 나무에 걸면 나무가 능청능청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나아가 이 회화나무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에 고사(枯死)했다가 1945년에 갑자기 살아났다는 기이한 전설을 품고 있으며, 한국전쟁 때도 미군이 추위를 피하려 불을 피우다가 화재가 나는 바람에 둥치를 다 태웠지만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잠와고택 충의당은 상류층의 도덕성을 얘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국 대표격인 경주 최부잣집의 출발지다.

정무공 최진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책상을 물리고 일어나 동생 최계종(崔繼宗)과 함께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며, 정유재란 때도 왜군을 무찔러 선무공신이 되었다.

그 후 삼도수군통제사의 당상관으로 승차했으며, 공조참판으로 임명을 받았지만 무관임을 내세워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나이 칠십에 가까웠으나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를 구하러 출정하여 용인 험천에 이르렀다.

“내 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할지언정 싸우다가 죽지도 못하겠는가(老者誰不能戰獨不能死耶)”라고 말한 뒤 분연히 나아가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였다.

후인들은 정무공 최진립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에 출전한 조선의 유일한 장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최진립의 아들 최동량은 가거십훈(家居十訓)을 지어 후손들의 처신을 경계토록 했다.

그의 아들 최국선은 만석꾼이 되었으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며,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며,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고,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며,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도록 하고,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으라”는 가훈을 지켜 300년 최부자의 초석을 다졌다고 한다.

또한 최국선은 시비법과 모내기를 도입했으며, 차용문서를 불태우고 흉년에 빈민을 구제했다. 

이러한 ‘청부(淸富)’의 가통은 내남면 이조리에 분가해서 살던 4대손 최의기의 후손으로 전해지며, 7대손 최언경 대에 교촌으로 이주해 12대손 최준 때까지 이어지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지원하였고 여러 학교를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 부자의 윤리적 자존심을 지켜냈다.

충의당 회화나무는 최씨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묵묵히 지켜보면서 오늘날까지 번성하고 있다.

<경주 이조리 회화나무>

·보호수 지정 번호 11-15-10
·보호수 지정 일자 1982. 10. 29
·나무 종류 회화나무
·나이 400년
·나무 높이 15m
·둘레 4.7m
·소재지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234-2
·위도 35.753307, 경도 129.196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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