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광명리 은행나무

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

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

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

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김천 광명리 은행나무는 마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유서 깊은 큰 나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보호수 11-26-21호인 김천 광명리 은행나무는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에 우뚝 서 있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앞으로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김천 구성면 광명리는 마을 앞을 흐르는 ‘감천’이라는 개울에 빛이 비치면 밝아지는 마을이라 해서 광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1936년에 김천 지역에 큰 물난리가 나서 여러 채의 살림집이 무너져 내렸고, 사람들도 적지 않게 죽었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모여 살림을 일으킨 새터가 바로 지금의 광명리라고 한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조선시대에는 경북 지역의 5대 반촌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광명리의 역사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88호인 성산여씨 하회댁이다.

이 집은 18세기 초에 성산여씨(星山呂氏)의 15세손인 여명주(呂命周:1681~?)가 60여 칸의 큰 집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 집은 독립운동가 여환옥(呂煥玉:1896~1963)이 태어난 집이기도 하다.

그러나 건물 대부분이 조선 후기의 농민항쟁과 1936년 물난리 때에 사라지고 지금의 형태만 남았다.

여환옥은 여승동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20년대에 해산물과 농산물의 위탁 판매업체인 김천흥업사의 감사직을 맡고 있었다.

이때 자신의 집안에 광명강습소를 개설하여 지역 청소년 교육에 앞장섰다.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요인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가옥과 토지를 담보로 대부를 받아 조성한 독립군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송금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신간회 김천지회에서 활동하며 옥중의 애국지사 지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여환옥은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조국의 독립운동에 내놓았다.

김천 지역에서 학교의 설립을 주도하고 후원하는 등 교육운동에도 헌신했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김천 광명리 은행나무는 하회댁과 함께 마을의 역사를 함께 해왔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나무는 적잖이 쇠잔해졌지만, 여전히 기세를 잃지 않았다.

나무는 높이는 13m, 가슴높이 둘레는 6m를 넘는다.

마을 어귀에 자리한 살림집 대문에 바짝 붙어 서 있다. 나무 옆으로 이어지는 골목은 비좁지만, 마을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당연히 사람과 자동차의 통행이 잦은 곳이다.

자연스레 나무 곁은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됐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 곁에 의자 몇 개를 내어놓고 나무 그늘을 쉼터로 삼는다.

마을 골목길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나무뿌리가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지 않도록 바닥을 콘크리트로 덮었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대책이었다지만 나무뿌리의 호흡에는 좋지 않다.

하지만 광명리 은행나무는 마을을 지켜온 성산여씨 일가의 역사와 독립운동가 여환옥의 아름다운 자취를 생생히 기억하며 여전히 푸른 잎을 틔우고 있다. 

<김천 광명리 은행나무>

·보호수 지정 번호 11-26-21
·보호수 지정 일자 1982. 10. 29.
·나무 종류 은행나무
·나이 400년
·나무 높이 13m
·둘레 6.4m
·소재지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 644-1
·위도 36.044624, 경도 128.075329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