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금곡리 느티나무

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

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

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

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김천 금곡리 느티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이고, 마을의 내력에 대한 전설이 담겨 있는 나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김천 금곡리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아름다운 한 그루의 나무는 보호수 04-03-02호인 김천 금곡리 느티나무다.

이 나무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양옥집의 앞마당 끝자락에 서 있있다.

동남 방향으로는 너른 논이 펼쳐지고 논 끝에는 낮은 동산이 있다.

도로를 지나다니는 자동차도 많지 않은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금곡리 느티나무는 도로보다 2m 정도 높은 평지 가장자리에 있다.

도로를 닦으면서 나무를 위로 옮겨 심은 게 아니라, 도로를 평평하게 내기 위해 나무가 서 있는 자리 아래쪽을 깎아낸 것으로 보인다.

금곡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로 김천에서도 오지에 속한다.

마을을 드나들 수 있는 길은 동쪽으로 흐르는 외현천 방향밖에 없다.

마을 밖 외현천 쪽에서 보면 큰 나무가 있어 안쪽에 사람 사는 마을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곡리 느티나무는 마을의 존재를 알리는 입간판 역할을 해온 셈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금곡리에는 오래된 전설이 전한다. 임진왜란 때 파평인 윤완이라는 선비가 서울로 가는 길에 이 고을을 지나다가 혼자 사는 경주 김씨 낭자와 결혼하여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남쪽, 북쪽, 동쪽의 산이 높아 해가 일찍 지고 노을이 빨리 오기 때문에 ‘노래’라 불리었다.

‘노래’는 ‘노을 바로 아래’란 뜻이다.

한자로 바꾸면 적하(赤下)가 된다.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이 바로 적하리였고, 1914년 부곡, 비실(배실), 비곡, 적하를 합하여 금곡동이라 했다가 1988년 금곡리가 되었다. 

금곡리의 또 다른 전설로는 조선 시대 선조 때 노씨 한 가구가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였는데 마을 모양과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겼다 해서 가매실(가마실)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박씨, 김씨, 육씨 순으로 이주했으며 달성 서씨, 옥천 육씨 등이 살았다.

가매실을 한자로 표현하면 부곡(釜谷)이 된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금곡리의 지형과 이 마을에 전해지는 전설을 종합하면 딱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오지이면서 분지여서 외적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전시의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이다.

두 전설 모두 선조 때 혹은 임진왜란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입향조 전설이어서, 금곡리는 피난한 사람들이 개척한 새로운 마을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30년쯤 되었으니, 얼추 이 느티나무의 나이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 느티나무는 파평인 윤완이 심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윤완과 김씨 처녀는 ‘노래’ 마을에 터를 잡는 것을 기념해 이 느티나무를 심었을지도 모른다.

노을을 바라보며 나무에게 자신들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해질녘 마을 안쪽 적하지(赤下池)라는 저수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구구절절한 이야기처럼 노을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김천 금곡리 느티나무>

·보호수 지정 번호 04-03-02
·보호수 지정 일자 2004. 12. 16
·나무 종류 느티나무
·나이 450년
·나무 높이 17m
·둘레 6m
·소재지 김천시 감문면 금곡리 293-1
·위도 36.227837, 경도 128.166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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