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어든 적설량에 수분 불균형 계속...잎 잔가지 탈락·수피 벗겨짐 등 집단고사 심화
환경단체 "산림청 대신 멸종 위기종 관리하는 환경부가 직접 나서야"

멸종 위기에 놓인 한국 특산종 구상나무의 집단고사가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일 경남 지리산 천왕봉 남사면에 잎이 탈락한 채 서 있는 구상나무들의 모습. [사진=녹색연합]

【뉴스퀘스트=김보민 기자】 사시사철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지리산이 '나무 무덤'으로 변하고 있다.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기후변화가 나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멸종 위기에 놓인 구상나무의 고사 현상만 봐도 알 수 있다.

9일 녹색연합은 본지에게 지난해 10월부터 이달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조사한 지리산 천왕봉·중봉·하봉 일대의 구상나무 실태 결과를 전했다.

조사 결과 대다수의 구상나무들은 기후변화 여파로 수분 균형이 깨지면서 집단 고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잎과 가지가 탈락된 채 등산객들이 지나다니는 탐방로를 지키고 있었다.

◇ 한때 88 올림픽의 상징...지금은 '멸종 위기종'

크리스마스 트리로 잘 알려진 구상나무는 해발 1000미터(m) 이상 한반도 고지대에서만 살아온 한국 특산종이다. 현재 지리산과 한라산 등 남부 지방에서만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름은 제주도 방언인 쿠살(성게)과 낭(나무)에서 유래됐다. 잎이 성게의 가시처럼 생겨 지어진 이름이다.

이 수종은 영국의 식물학자 어네스트 윌슨이 1920년 한라산 구상나무를 '한국 제주도에 서식하는 한국 특산종'이라고 명명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의 상징 나무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러한 구상나무는 2000년에 들어선 이래 기후위기 여파에 점점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지난 2013년 이 수종을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했다.

지난 2019년 산림청의 전국 실태조사에 따르면 구상나무 쇠퇴율은 33%에 달한다. 환경 보호단체에서는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만큼 더 많은 개체 수가 줄어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녹색연합이 지리산 일대를 찾았을 당시 구상나무의 집단 서식지인 동부의 천왕봉(해발 1915m), 중봉(1875m), 하봉(1755m)과 서부의 반야봉(1751m) 일대에 모두 집단 고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대다수의 구상나무들은 잎·잔가지 탈락 등 고사 유형을 띠고 있었고, 수피가 벗겨진 채 서 있거나 뿌리가 뽑혀 쓰러져 있었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일례로)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탐방로마다 죽어가는 구상나무와 마주할 수 있다"라며 "천왕봉으로 오르는 중산리 코스의 1500m 근처부터 구상나무의 본격적인 떼죽음을 마주하게 되고, 해발 1800m에서는 대규모 구상나무 군락이 '죽음의 전시장'처럼 고사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조사 결과 지리산 천왕봉 구상나무 서식지에서 이미 90%에 가까운 개체가 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주로 해발 1600m~1900m 사이에서 고사가 가속화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건강한 구상나무의 모습(위쪽)과 지난해 10월 17일 지리산국립공원 아고산대에 포착된 나무들의 모습(아래).  [사진=산림청, 녹색연합]
건강한 구상나무의 모습(위쪽)과 지난해 10월 17일 지리산국립공원 아고산대에 포착된 집단고사 현장(아래).  [사진=산림청, 녹색연합]

◇ 기후위기 심각해지는데..."정책 사각지대 여전"

구상나무가 고사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원인들이 거론되고 있지만, 녹색연합은 이번 조사를 통해 기후변화로 인한 수분 부족 문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고산대 침엽수인 구상나무는 통상적으로 1월과 2월에 내린 눈으로 4월 말과 5월 초순까지 수분 공급을 받지만, 2000년 초반부터 적설량이 줄어들면서 봄철 건조 현상이 심화됐다는 것이다.

녹색연합은 "(이런 현상 속에서) 구상나무는 봄철 수분 공급 불량에 의한 스트레스와 동결 건조에 시달린다"라며 "과거와 같은 양의 눈이 내린다고 해도 기후변화 탓에 증발산 속도도 빨라지도 있다"라고 말했다.

증발산이란 땅과 식물체로부터 수분이 대기로 돌아가는 현상을 뜻한다. 조사 당시 발견된 구상나무들도 수분 불균형과 여름철 폭염으로 메말라 있는 상태였다.

이에 구상나무를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현재 산림청은 기후위기로 일어난 산림 위기를 극복하고 지리산 구상나무를 보전하기 위해 국립산림과학원 등과 함께 시범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멸종 위기종을 관리하는 환경부가 직접 지리산과 한라산 구상나무에 대한 정밀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환경부는 구상나무를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하지 않았다. 인위적인 훼손에 의한 멸종위기종만 보호 리스트에 포함시킨다는 원칙 때문이다.

녹색연합은 "환경부는 '기후변화에 따른 멸종위기종 선정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라며 "정부의 생물다양성 정책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