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밤이 되어야 활짝 피는 꽃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달맞이꽃이 그렇고 박꽃이 그렇다.

이들이 밤에 속을 활짝 열어 보이는 건 ‘꽃가루받이’ 때문이다.

그 거룩한 잉태를 성사하기 위하여 꽃은 그들 사이의 매개자로 곤충을 불러 모은다.

‘박각시나방’은 그래서 ‘박꽃’을 찾아오는 ‘각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박각시가 박꽃에 날아드는 여름밤의 풍경은 일찍이 백석이 한 편의 시를 써서 그림처럼 완성해 놓았다.

그렇게 뜨겁던 여름이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떠날 채비를 하는 이 무렵에 읽으면 그의 시는 나를 다시 한여름 밤의 어떤 장면 속으로 데리고 간다.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 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  백석  <박각시 오는 저녁> 

박각시가 박꽃만을 찾아 나서는 건 아니다.

그들은 박꽃뿐만 아니라 밤에 피는 더 다양한 식물을 방문한다.

그중에 곤충에게도 인간에게도 여러모로 특별한 식물이 ‘하늘타리’다.

박꽃과 같은 혈통의 ‘박과식물’이고 한방에서 ‘과루(瓜蔞)’ 또는 ‘괄루’로 부르는 유명한 약재이다.

'동의보감'은 하늘타리의 효능을 부위별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하늘이 내린 신성한 식물이라는 뜻의 ‘천과(天瓜)’라고도 소개한다.

'동의보감', '의방유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한약서인 '향약집성방'은 우리 땅에 나는 약재의 쓰임, 즉‘향약(鄕藥)’을 꼼꼼히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그 당시 부르던 약재의 우리 이름을 세심히 적어두기도 했다.

하늘타리를 두고 ‘천질월이(天叱月伊)’, 즉 하늘의 식물이 밤에 핀다는 뜻에서 ‘달(月)’을 붙여 ‘하늘달이’라고 소개한다.

그 옛 이름에서 지금의 ‘하늘타리’가 되었을 것이다.

하늘타리는 ‘박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덩굴식물이다. 한방에서 ‘과루(瓜蔞)’ 또는 ‘괄루’로 통하는 유명한 약재이다. '동의보감'은 하늘타리의 효능을 부위별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하늘이 내린 신성한 식물이라는 뜻의 ‘천과(天瓜)’라고도 소개한다. 밤에 짙은 향기를 내며 꽃을 피워 박각시와 같은 야행성 곤충을 꽃가루받이 매개로 삼는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우리 전통의학에서 항염과 면역력 증진과 탈모와 변비에도 용하다고 평가하는 하늘타리를 한 3년 정도 쫓아다닌 적이 있다.

한약재의 중국산 수입에 대한 의존을 낮추고 국산화를 이끌고자 식약처가‘국가생약자원관리’에 발 벗고 나설 무렵이다.

한약재 성분의 거의 전부가 식물이기에 그 사업의 기틀을 마련하는 일에 식물분류학자들이 투입되었다.

식물분류학 전공자가 다수인 수목원의 우리 부서는 전라도에 분포하는 한약재 식물을 찾는 일을 맡았다.

전라도에서 절로 나는 식물 가운데 약재는 어떤 종이며,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얼마나,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를 밝혀야 했는데, 그 중점 식물이 하늘타리였던 거다. 

전라남도의 다도해를 훑으며 밤에 피는 하늘타리를 샅샅이 찾아다녔다.

하늘타리의 변종 또는 변이개체로 알려진 ‘노랑하늘타리’도 함께였다.

그들의 생활사를 기록하느라 조사의 반은 주간에 반은 야간에 이루어졌다.

주간에 그들의 자리를 확인해 두고 다른 조사를 이어 하다가 저녁도 다 먹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밤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에 다시 그들의 자리를 찾아가 개화를 확인하는 식이었다. 

하늘타리를 찾고 기록하는 일에 고성능 LED 랜턴은 필수다.

어둠이 깜깜하게 내려앉은 밤에 생물의 후각은 시각보다 앞선다는 것을 제대로 익힌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하늘타리는 밤에 꽃잎을 한껏 펼치고 솨솨 소리를 낼 듯이 짙은 농도로 향기를 발산한다.

반대로 낮에는 꽃잎을 웅크려 쪼그라든 채 밤을 위해 에너지를 아낀다.

이윽고 꽃가루받이의 매개자가 될 밤의 곤충들을 유혹하려고 어두운 숲에 자신의 향기를 부려 놓는다.

너무 고혹적이고 관능적이고 농염해서, 그걸 처음 맡았을 때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허겁지겁 조사를 서둘렀던 기억이 여태껏 남아있다.

포유류인 내가 그 꽃부리에 코를 묻고 있다가 한 점의 꽃가루로 변신해서 암술대를 타고 씨방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밑씨를 만나고 마침내 ‘수정’이라는 행위에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던 한여름 밤의 기억!

그 치명적인 향기를 하늘타리는 요술처럼 맨몸으로 만든다. 

노랑하늘타리. 하늘타리와 아주 닮았지만 잎의 가장자리가 얕게 갈라지고 열매가 노랗게 익는 개체를 묶어서 하늘타리의 변종인 ‘노랑하늘타리’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를 어떤 학자들은 개체 간의 표현형으로 보고 종의 구분 없이 하늘타리 한 종으로 보기도 한다. [꽃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열매사진=세계생물다양성정보기구]

식물의 몸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화학작용의 결과물로 발현하는 것이 그들의 향기다.

하늘타리의 향기에 관여하는 성분으로 밝혀진 꽃의 휘발성 물질만 해도 50여 개에 달한다.

식물의 옹근 몸체를 따지고 들면 ‘구절초’ 기준으로 식물 한 개체에서 향기를 내는 물질은 100여 종류가 훌쩍 넘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 성분들을 식물은 제 몸에서 각양각색으로 조합하여 누군가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이자 언어로 쓴다.

때로는 힘들고 아프다는 신호, 때로는 나를 건들지 말라는 신호, 때로는 이 꽃이 저 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 

하늘타리의 향기는 ‘리날로올(linalool)’과 ‘알데히드(aldehyde)’라는 성분이 주축을 이룬다.

전자는 시트러스 계열의 ‘베로가못향’을, 후자는 달콤쌉싸름한 정체불명의 꽃향기를 낸다. 각각 향수와 방향제와 섬유유연제의 원료로 쓰는 이름난 방향 물질이다.

몸의 내부에서 다양한 성분이 얽히고설켜서 그야말로 복잡다단한 향기를 분출함으로써 하늘타리는 우리에게 말한다.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박각시를 비롯한 밤에 활동하는 곤충들은 그 언어를 알아듣고 찾아감으로써 하늘타리의 유혹에 응답한다.  

곤충은 페로몬(Pheromone)이라는 특유의 체취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리스어로 ‘운반한다’는 뜻의 ‘pherein’과 ‘반응한다’는 뜻의 ‘hormon’의 합성어로, 곤충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근연종과의 교배를 막아 잡종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생존 전략이다.

향기가 이끄는 식물의 신호 물질과 이에 반응하는 곤충의 페로몬 간의 관계는 다양하게 해석되어 오늘날 농업에서 해충을 물리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식물의 향기 물질로 해충의 천적을 유인하는 생물학적 방제의 한 방식이다. 

하늘타리는 흰색 꽃잎 다섯 장의 가장자리가 잘게 갈라져서 꽃이 참 특이하게 생겼다. 낮에 보면 쪼그라들어 축 처진 꽃이 마치 면사포의 가장자리에 달린 수술처럼 차분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밤에 보면 백발이 사방으로 뻗친 듯이 활짝 피어 다소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진은 노랑하늘타리.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하늘타리는 흰색 꽃잎 다섯 장의 가장자리가 잘게 갈라져서 꽃이 참 특이하게 생겼다.

낮에 보면 쪼그라들어 축 처진 꽃이 마치 면사포의 가장자리에 달린 수술처럼 차분해 보인다.

하지만 밤에 보면 백발이 사방으로 뻗친 듯이 활짝 피어 어쩐지 으스스한 분위기를 낸다.

이쪽 세상보다는 저쪽 세상에 어울리는, 정말 하늘의 식물 같다.

서양에서도 꽃의 생김새 때문에 하늘타리 속(屬)의 이름을 트리코산테스(Trichosanthes)라고 지었다.

‘털’을 뜻하는 ‘trichos’와 ‘꽃’을 뜻하는 ‘ansthos’로 이루어진 그리스어다.

그 이름을 딴‘트리코산틴(trichosanthin)’은 하늘타리의 몸에서 추출한 천연 물질이다.

항암 효과, 특히 유방암과 폐암의 세포 발생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을 현대 과학이 밝히며 신약의 주성분이 되었다.

과거에 민간에서는 하늘타리 뿌리를 임신부에게 절대 쓰지 않거나, 피임약 대용으로 처방하기도 했는데, 인간의 임신 중절에 미치는 ‘트리코산틴’의 기작이 확인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새로운 하늘타리 식물 한 종이 우리나라에도 산다는 사실이 밝혀진 건 불과 재작년, 2020년의 일이다.

여수의 남쪽 섬, 인적 드문 상록수림에서 빨간 열매를 단 낯선 하늘타리 종류가 발견된 것이다.

대만이나 중국과 일본의 남부에만 산다고 믿었던 타국의 식물이, 그러니까 제주에서도 훨씬 더 멀찌감치 남쪽으로 내려가야 살 수 있을 것이라 짐작했던 아열대식물이 한반도의 남쪽 섬에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붉은하늘타리. 2020년 여수의 남쪽 섬, 인적 드문 상록수림에서 발견되었다. 그전까지는 대만이나 중국과 일본의 남부에만 산다고 믿었던 아열대식물이다. 열매가 빨갛게 익고 잎이 깊게 갈라지지 않아서 하늘타리와 형태적으로도 뚜렷하게 구분된다. [꽃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열매사진=세계생물다양성정보기구]

‘붉은하늘타리’라는 식물의 등장은 식물분류학계를 술렁이게 했다.

이처럼 기존에 국내의 분포에 대한 기록이 없던 타국의 식물이 새롭게 확인되는 것을 ‘미기록종’의 발견이라고 한다.

‘신종’은 국경의 안팎 어디서도 확인된 적 없던, 지구상의 새로운 식물을 말한다.

남서해안에 넓게 퍼져있는 먼 섬에는 그간 기록되지 않았던 미지의 식물이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

최근 30년 동안 우리나라 남해와 서해의 도서 지역에서 발견된 미기록종과 신종은 70여 종이 넘는다.

원래 살고 있었던 식물도 있고, 새의 이동과 바닷물의 흐름이 최근에 섬으로 데려왔을 거라 추정되는 식물도 있고, 더욱 온난해진 기후 때문에 이제는 한반도의 섬에도 살 수 있게 된 식물도 있다.

또 어떤 식물은 지금보다 따뜻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적어도 6000년 전에 한반도의 내륙까지 북상하여 번성하다가 지구가 다시 추워지던 수백 년 전에 차츰 남하하여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때 남쪽으로 밀려나던 길에 살아남은 식물들이 남서해의 다도해에 숨어 살다가 최근에 ‘미기록종’이나 ‘신종’으로 발견되는 것이라고 짐작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래서 다도해를 떠올리면 내 마음은 하늘타리 향기를 맡던 그 밤의 순간처럼 일렁인다.

하늘타리 몸속에 둥둥 떠다니는 향기 성분같이 복잡하고 미묘한, 아직은 밝혀야 할 것이 많은 우리 식물의 세계.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식물이 그 섬들 속에 산다.

또 다른 하늘타리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으로 나의 발길이 자꾸만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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