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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1-10-17 13:25 (일)
[한국의 보호수-①경상북도편] 영천 대전동 호수종택 향나무(102)
[한국의 보호수-①경상북도편] 영천 대전동 호수종택 향나무(102)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1.09.2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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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대전동 호수종택 향나무

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

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

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

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영천 대전리 호수종택 향나무는 항일의병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살아있는 비목(碑木)’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영천시 대전동 54-8번지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인 호수종택(湖叟宗宅)이 있다.

해남 현감을 지낸 정호례(鄭好禮: 1604~1672)가 1613년(광해군 5)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정호례의 나이가 불과 10세에 불과했으니 그 조성 연대가 인조 21년(1643)이라는 설명이 일리가 있다.

정호례는 임진왜란 때 영천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호수(湖垂) 정세아(鄭世雅)의 장손(長孫)이다.

이 호수종택은 규룡산에 위치한 조선시대 전통양식의 남동향 집으로 영남지방에서는 특이한 공(工)자 형의 집인데, 호수 정세아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호수종택에서 사당으로 가는 길옆에 우뚝 솟은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가 바로 대전리 호수종택 향나무이다.

이 향나무는 의병장 호수 정세아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한 의병 동지들의 영혼을 위로하려고 심었다고 한다.

실로 오랫동안 이 나무는 의병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살아있는 비목(碑木)’ 역할을 해왔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호수 정세아는 1535년(중종 30년) 영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워 1558년(명종 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지만,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자기 수양과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왜군이 영천성을 무너뜨리고 서울로 진격해 왕이 피란길에 나서는 형편이었다.

당시 영천에서는 권응수, 정대임, 김응택, 최응사 등 뜻있는 선비들이 창의하는데, 정세아 역시 아들 의번(宜藩), 안번(安藩), 수번(守藩)과 9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나라 구하기에 앞장섰다.

그때 곽재우(郭再祐)는 의령에서, 권응수(權應銖)는 신령에서 각각 기병하여 서로 성원하였다.

신녕의 박연(朴淵)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고, 경주에서 관군(官軍)과 더불어 언양에서 올라오는 적 400여 명을 참살 혹은 격퇴했다.

영천성 수복 전투에서도 역시 큰 공을 세웠다.

박진, 권응수, 정대임 등과 경주성 탈환전에 참가한 그는 아들 의번과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박진의 부대와 합세, 친히 선봉장이 되어 혈전을 벌였다. 

그때 적의 기습으로 절도사의 군사가 무너지고, 정세아의 영천의병이 고군분투하며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마침내 적을 몰아내고 성을 되찾았다.

이 전투에서 아들 의번은 아버지 정세아가 적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적진으로 돌진해 포위망을 뚫었다.

덕분에 정세아는 탈출했으나 아들 의번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면서 계속 아버지를 찾아 헤맸다.

의번은 아버지를 구하려고 세 차례나 포위망을 드나드는 바람에 적의 총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계속 싸웠다.

하지만 그의 말이 총알에 맞는 바람에 포위를 당했으며, 결국 휘하 장수 10여 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의번이 마지막 적진에 뛰어들 때 같이 참전했던 머슴 억수(億壽)에게 “군사가 패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전사한 줄 알았다) 나는 장차 도적들의 손에 죽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너는 따를 필요가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고 종용했다.

그러자 억수는 울면서 “주인과 종의 의리가 군신이나 부자의 의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주인이 죽기를 결심하는데 종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고는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아들 의번이 죽었지만,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한 호수 정세아는 시신 대신 아들이 남긴 시와 친구들이 쓴 만시(輓詩)와 제문을 모아 아들이 입던 의복과 함께 관에 넣어 장사를 지냈다.

이름하여 그 무덤을 시총(詩塚)이라 하였다. 

“시는 오래되어도 썩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 무덤이 얼마나 위대한가”, “효사(孝思)와 충절(忠節)은 위대한 성혈(聖血)의 아름다운 향기(香氣)가 되어 시총(詩塚)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네”. 바로 이 시총 아래에 함께 죽은 ‘충노(忠奴) 억수의 묘’라는 작은 빗돌을 세워 의병 동지를 기렸다.

한 집안에 네 부자가 함께 창의했을 뿐 아니라, 적의 총탄이 빗발치는데도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전사한 의번은 나중에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충신 효자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안번과 수번은 영남충의단에 제향되었다. 

정세아의 장손 정호례의 자는 자립(子立), 호는 요산(樂山)이며, 1636년(인조 14) 무과에 급제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이듬해 봄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와 상제(喪制)를 마치고 선전관(宣傳官)으로 나갔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1641년에 부장(部將)을 제수받고, 1644년에 부사과(副司果)에 올랐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했으며, 1659년(효종 10)에 선전관(宣傳官)을 제수받고, 다시 해남 현감으로 전출되었으나 1661년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는 평생 왜구의 물건을 쓰지 않았으며, 당시 해남 고을의 선정비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영천 대전리 향나무는 지난 시절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호수종택을 지키고 있다.

<영천 대전동 호수종택 향나무>

·보호수 지정 번호 11-7-1
·보호수 지정 일자 1982. 10. 29.
·나무 종류 향나무
·나이 370년
·나무 높이 12m
·둘레 3.9m
·소재지 영천시 대전동 54-8번지
·위도 35.988756, 경도 128.915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