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근의 科技누설(14)

【뉴스퀘스트=김형근 과학전문기자】 하긴 맥주 글라스에 위스키 한잔 “퐁당’ 빠지는 소리를 들으며 혼합주인 폭탄주를 마시고 황량한 고해(苦海)의 시름을 잊는 것은 바람직한 낭만적인 그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날그날 지치게 살아가는 일반 서민 대중의 그림이지 정치판의 그림이 돼서는 결코 안 된다.

폭탄주에 얼근히 취한 얼굴 붉은 정치인들의 그림이 TV에 등장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더구나 폭탄주가 ‘화해주’로 둔갑하는 것은 추천할 만한 일이 아니다. 지난주 이준석 대표와 윤석열 후보의 폭탄주 회동과 그 이후 일어나는 여러가지 논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원래 업무에 시달린 영구의 보일러공들이 빨리 취하기 위해 마신 혼합주

폭탄주라는 말은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외국에서 빌린 단어다. ‘밤 샷(bomb shot)’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한국어 버전이다. 그러면 무엇이 밤 샷이냐? 밤 샷의 내용물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당장 따를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폭탄주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다.

김형근 논설위원 과학평론가

폭탄주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그래서 이제는 수백가지 폭탄주가 등장한다. 소주와 맥주를 섞는 ‘소맥’은 아마도 한국의 애주가들이 만들어낸 아주 “창의적인” 폭탄주인 것 같다. 또 맥주에 보드카를 섞은 폭탄주도 인기다.

어쨌든 폭탄주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거의 대부분이 맥주와 같은 약한 알코올에 위스키, 램, 그리고 보드카 등 독한 술을 샷으로 약간 곁들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오리지널은 역시 맥주에 위스키 샷을 달랑 빠트린 혼합주다. 맥주와 위스키의 상호작용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차가운 맥주에 위스키 잔이 빠지는 황홀한 소리만으로도 삶에 지친 우리의 영혼을 달랜다.

다 떨어질 때까지 입술을 벌려서는 안 된다. 쉬지 않고 한번에 다 비워야 하는 이 술은 금방 우리의 뇌세포의 문을 두드린다. 그러면 우리의 뇌는 결국 마음의 폭발을 일으키고 만다. 이것이 바로 폭탄주의 정체다. 

흥미로운 것은 폭탄주의 기원이 보일러를 만들고 수리하는 인부들의 이름을 딴 ‘보일러메이커(boilermakers)'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보일러공의 이름을 따서 짓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보일러메이커”가 기원이지만 그 배경은 확실치 않아

그러면 단어 기원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로 널리 알려진 옥스포드 영어사전을 찾아가 보자. 이 사전에 따르면 "보일러메이커"라는 용어는 1834년 증기기관차를 만들고 유지 보수한 장인들을 지칭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증기 기관차는 수십 년 동안 중요한 교통수단이었고, 이어서 증기기관을 이용한 선박들은 바다를 운항했다. 철도회사들은 북미 대륙으로 진출해 광활한 지역의 운송 업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발전이 항상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원학자들에 따르면 술을 묘사하는 “보일러메이커”는 이전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일부 연구가들은 이 이름의 기원이 증기 추진 자동차를 최초로 실험한 발명가인 리차드 트레비틱(Richard Trevithick)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국 콘월(Cornwall) 출신인 대장장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801년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그는 콘월의 캠본(Cambourne) 마을에서 자신의 최신 발명품인 증기 추진의 도로 차량(자동차) 시험에 착수했다.

보일러 전문가인 트레비틱은 차량에 친구들을 태우고 운전해 언덕을 올라 마을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술집에 다다르자 그들은 차량을 헛간에 주차하고 크리스마스 날의 성공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다.

축하 파티가 무르익으면서 차량 보일러의 불에 대해서는 모두 잊었다. 보일러는 물이 완전 마를 때까지 계속 타올랐다. 파티가 끝날 때쯤 불은 차량의 나무 구조물에 붙었고, 차량은 결국 뒤엉킨 고철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사람들은 그 화재를 트레비틱이 마시고 있던 술과 맥주 세트 탓으로 돌렸다.

다시 말해서 고압 증기를 성공적으로 활용해 세계 최초의 증기 철도 기관차를 건설한 보일러메이커인 트레비틱이 그날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완전히 인사불성이 돼 자신의 발명품을 엉망으로 만든 후 그러한 “뿅” 가게 만든 술과 맥주를 “보일러메이커”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세트는 맥주와 위스키였다.

영화에도 등장하면서 전세계로 퍼져 나가

사실 이 “보일러메이커”가 원래 장시간 근무해야 했던 영국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즐겨 마신 것은 꽤 확실하게 보인다. 그래서 트레비틱과 같이 1800년대에 증기 기관을 만들고 유지 보수했던 노동자들의 이름을 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노동자들은 교대 근무가 끝날 무렵 술집으로 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힘든 하루 노동에서 오는 고통을 빠르게 덜기 위해 빠르게 취하는 위스키 한 잔과 맥주 한잔은 그들이 늘 찾는 주식(主食)이 됐다.

폭탄주가 더 빨리 취한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없다. 성격상 폭탄주는 한번에 다 마시며, 또 연속해 마시기 때문에 빨리 취할 수 밖에 없다. [사진=wikipedia]    

“보일러메이커” 말고도 폭탄주를 영어로 ‘뎁스-차지(Depth-charge’, 또는 ‘체이서(Chaser)’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마 “보일러메이커”는 한 두 잔만 마셔도 몸이 따뜻하게 된다 뜻에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뎁스-차지’는 원래 잠수함 등을 공격하기 위해 바다 밑 일정한 깊이에 매설하는 기뢰(폭탄)를 뜻하는 용어다. 맥주 컵 속의 위스키 잔을 기뢰에 비유해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유명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출한 미국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폭탄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또 항만 하역노조 이야기를 다룬 걸작 “워터프런트(1994)”에서도 말론 브랜드가 독주 한잔을 원 샷(one shot)으로 마시고 곧바로 맥주 한 컵을 들이키는 장면이 나온다. 

맥주와 양주를 섞지 않고 맥주를 마신 뒤 곧바로 양주를 들이키는 방식을 ‘체이서(chaser)’라 부르는데 이것도 역시 폭탄주 일종이다.

우리가 요즘 마시는 폭탄주가 국내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83년경 당시 박희태 춘천지검장(전 국회의장)이 춘천지역의 검찰과 경찰, 그리고 언론사 관계자들과 술자리에서 선보였을 때였다고 알려져 있다.

빨리 취하는 것과 관련 과학적 증거 없다.

과학적으로는 어떨까? 폭탄주는 정말 빨리 취할까? 이에 대해 과학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직까지 없다. 폭탄주의 성격상 대부분 안주 없이 마시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또 쉬지 않고 한번에 비우는 것이 관례다. 그리고 한잔으로 끝나지 않고 3잔 넉잔 이어진다.

모든 알코올이 몸에 퍼지는 시간은 빠르다. 장에 내려가기 전 위에서 흡수되는 알코올은 신경을 무디게 하는 차원에서는 어느 마약보다도 그 효과가 빨리 나타난다.

그러면 알코올이 뇌세포에 도달해 우리를 해롱거리게 만드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과학자들은 딱 6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술을 마시면 알코올 성분이 단 6분 만에 뇌에 도착해 뇌에 변화를 일으킨다.

알코올이 뇌세포에 빨리 도달한다는 내용은 곧 알코올이 뇌에 엄청난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증거다.

따라서 폭탄주는 최근 사회적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청소년 음주 문제에도 직결이 된다. 어릴수록 뇌세포에 주는 충격은 크기 때문이다. 과히 권장할 술이 아니다. 폭탄주 마셔 시위하는 정치인들에게 결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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