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성동위원소의 DNA를 찾아서(10)

【뉴스퀘스트=김형근 과학전문기자】 1953년 4월 25일은 현대 DNA혁명의 방아쇠를 당긴 날이다. 과학저널 네이처에 20세기 생명과학계의 최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DNA 이중나선의 구조도가 실려,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날이기 때문이다.

생명과학의 미래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발견의 주인공은 미국의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영국의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이다.

유전물질을 담고 있는 DNA의 구조가 이중나선처럼 돼 있다고 주장한 이중나선 이론은 현대 생뭏학에 혁명을 일으켰다. 생명현상의 비밀이 풀리기 시작했다. 

물리학의 아인슈타인을 뛰어넘은 대단한 발견

이로부터 9년 뒤 이들은 생물학계의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를 푼 공로를 인정받아, DNA의 구조를 밝히는데 기여한 또 다른 과학자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게 된다. 생물학사의 커다란 획을 그은 사건이자 인류의 역사를 바꾼 사건이기도 하다.

연구논문의 본문은 1페이지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최대 생물학적 성과로 아직도 보존되고 있다. 현대 유전학 연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불어 왓슨과 크릭은 물리학의 아인슈타인과 같은 명성과 지위를 얻게 되었다. 아니 앞으로 그보다 더 나은 지위로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왜 DNA의 이중 나선구조 발견이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또 나선구조에 담긴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유전정보를 담은 DNA의 이중나선의 등뼈는 인산과 당이다. 나선 안쪽으로 4가지 염기(A아데닌, T티민, G구아닌, 그리고 C시토신)가 달려 있다. 이 염기의 순서가 바로 생명체의 유전정보다. 

가닥에 달린 염기가 다른 쪽 가닥에서 나온 염기와 수소결합을 통해 손을 잡듯 결합한다. 염기쌍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조합의 방식에 따라 유전정보 또한 다르다는 것이 이중나선 구조의 핵심이다.

DNA 1g에는 염기(A, T, G, C)가 1021개 들어 있다. 이를 메모리로 환산하면 10억 테라비트(Tb, 1Tb=1012b)에 해당하는 엄청난 정보량이다. 생명에 대한 모든 정보는 DNA 속에 담겨 있다. DNA가 모여서 유전자를 만들고, 이 유전자가 우리 몸 속에서 필요한 명령을 내린다.

만약 엄청난 수의 조합을 풀이하면 인간의 모든 정보를 읽을 수 있다. 어떤 유전질환을 갖고 있는지는 당연하고 앞으로 수명은 얼마나 될 것인지, 성격은?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 가능성은? 사업 성공 확률 등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게놈해독이다.

생명현상을 조절하는 DNA의 기능을 파악할 수 있는 길 열려

DNA 이중 나선구조가 밝혀진 후 생명과학은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생명현상을 분자 차원에서 이해하고 응용하려는 분자생물학의 총아로 떠오른 것은 물론 각종 생명현상의 비밀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또한 생물학과 화학의 융합 역시 여기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박만 한 토마토를 만들 수 있는 길도 열렸다.

CSI드라마는 안방극장에서 우리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이다. 주로 DNA지문을 분석해 범인을 잡는다. 미스터리로 남을 뻔한 범죄를 파헤치는가 하면 사형수를 무죄로 방면한다. 바로 DNA지문의 역할이다.

DNA의 구조가 이중나선으로 돼 있다고 밝힌 영국의 로잘린 프랭클린 과학계의 성차별로 업적을 인정받지 못한 불운의 여성과학자로 인식돼 있다. [사진=Wikipedia]

또한 암이나 유전질환 같은 질병치료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유전공학의 발전도 마찬가지다. DNA의 구조를 밝혀냈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인간 비밀이 담겨 있는 휴먼게놈프로젝트, 최근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 유전자조작식품(GMO), 심지어 섬뜩한 인간복제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연구의 중요한 사건들이 모두 DNA의 혁명 속에서 탄생한 것들이다.

왓슨의 업적은 DNA모양을 통해 유전방식을 밝혀낸 것

과학자들은 이미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왓슨과 크릭의 이중나선 구조 발견은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단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DNA가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고, 그리고 어떤 식으로 유전되는 지에 대한 정보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DNA혁명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람들은 DNA가 이중나선 구조라는 단순한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입증하기까지 도움을 준 두 가지 사실은 잊고 있는 듯하다. 아예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하나는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X선 결정학이다(회절이라는 표현도 쓰이지만 결정학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표현임)

두 주인공의 등장은 20세기에 거대과학으로 등장한 핵물리학의 소산이다. 핵물리학의 발전이 없었다면 DNA혁명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 혁명의 시기가 한참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두 주인공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자. 우선 DNA와 유전과의 관계에 놓인 역사를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DNA의 발견은 이미 1860대, 그러나 그 구조는 30년이 넘어서야 밝혀져

DNA가 발견된 것은 1860년대다. 1869년 스위스 출신의 의사이자 생리화학자인 프리드리히 미셰르(Johann Friedrich Miescher)가 처음 발견했다. 당시 독일에서 활동하던 그는 병원에서 수술한 환자의 붕대에 묻어 있는 고름에서 백혈구 세포를 채취하고, 이로부터 단백질을 추출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인산 성분이 매우 높고, 단백질분해효소로 분해되지 않는 물질을 발견했다. 당시 미셰르는 이 물질에 ‘뉴크레인(nucle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오늘날에 우리가 알고 있는 DNA다. 이것이 최초의 DNA 발견이었다. 1869년은 유전학 연구의 이정표를 세운 해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발견이 그렇듯이 미셰르의 성과도 처음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분꽃을 이용한 실험으로 유명한 멘델의 유전법칙이 그의 사후 35년이 지나 과학자들 사이에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DNA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미셰르의 DNA 발견보다 앞선 1865년 발표되었다. 그의 연구 역시 관심을 끌지 못했다.

멘델의 뒤를 이어 생물학자들은 유전자가 염색체상에 존재하며 염색체는 세포의 핵 안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1940년대에 이르러 유전자 정보들이 핵산인 DNA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1950년대가 되자 DNA상의 유전암호를 해석할 수 있게 됐다.

유전에 대한 이론적 기초가 세워지자, 이제는 유전자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에 관심이 모아졌다. 유전정보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물질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처음에 학자들은 왓슨과 크릭의 주장처럼 A, T G, C의 불과 4종류의 염기로 구성된 DNA보다 아주 더 복잡한 정보를 가진 단백질을 유전물질로 지목했다.

미국의 분자생물학자이자 유전학자인 알프레드 허쉬는 DNA가 유전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을 동위원소에 의한 X선 회절을 이용해 입증했다. [사진=Wikipedia]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은 동위원소

이후 DNA가 유전물질임이 유전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캐나다 출신의 의사이자 유전학자로 미국 록펠러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던 오스왈드 에이버리(Oswald Avery 1877~1955)는 열로 죽은 폐렴균에서 어떤 물질이 병원성이 없는 폐렴균으로 전달되자, 갑자기 병원성이 생기는 현상을 발견했다.

그 물질을 분석하자 DNA이었다. 즉 죽은 폐렴균의 DNA가 병원성을 유전적으로 전달했다는 내용이 된다. 그러나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것을 확실히 입증시킨 것은 방사성동위원소다.

1952년 세균학자이자 유전학자인 알프레드 허쉬(Alfred Hershey)는 조교인 마사 체이스(Martha Chase)와 함께 DNA가 유전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을 입증시키기 위한 일련의 실험을 진행했다. 소위 허쉬-체이스 실험으로 알려진 실험이다

허쉬는 인 동위원소(P-32)와 황 동위원소(S-35)가 들어 있는 배양액에서 배양한 박테리아에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se)를 감염시켜 조사했다. 이 실험에서 박테리오파지의 DNA만이 숙주세포 속으로 들어가고 단백질은 세포 밖에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테리오파지는 세균을 숙주세포로 하는 바이러스 일군을 총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유전물질이 단백질이 아닌 DNA라는 주장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박테리오파지를 사용한 것은 오직 단백질과 DNA로만 구성되어 있어 어느 것이 유전물질인가 가늠하기에 좋은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박테리오파지의 단백질에는 S-35를 표지하고, DNA는 P-32로 표지했다. 그러나 다음세대에 전달된 물질이 단백질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DNA서만 발견된 것을 확인함으로써 유전물질이 DNA라는 밝히게 된 것이다.

허쉬는 바이러스의 복제 메커니즘 및 유전자 구조연구에 대한 공로로 196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사실 왓슨과 크릭도 N-14와 방사성동위원소 N-15를 이용하여 DNA복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X선 결정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

DNA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두 번째 주인공은 X선 결정학이다. X-선 회절(X-ray diffraction, XRD)은 영상을 통해 결정 및 비정질의 결정구조와 결정상태, 즉 원자의 배열과 관계가 있는 정보를 알아내는데 가장 유력하게 사용되는 실험 방법이다. 비파괴검사에도 사용된다.

X선 결정학에 사용되는 X선의 파장은 원자의 크기와 같은 정도로서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산란파와 서로 간섭해서 회절현상이 일어난다. 그 회절현상은 원자의 배열방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X선 회절형태로부터 물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생물학에서는 단백질이나 핵산의 분자구조를 해명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1912년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가 이 현상을 발견하여 X선이 사실은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라는 것을 밝혔다.

왓슨과 크릭도 이중나선구조를 밝히는데 이 방법을 사용했다. 이 방법은 이중나선 이론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부분은 지금까지도 과학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이슈다. 윌킨스가 여성과학자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이 찍은 DNA X선 회절사진을 몰래 도용해 왓슨에게 주었고, 왓슨은 이를 바탕으로 이중구조나선 이론을 만들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 사진을 입수하기 전 까지만 해도 왓슨과 크릭은 DNA연구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인물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 사진을 바탕으로 DNA가 이중나선 구조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의 영광을 도둑질했다”라는 비난을 받았다. 왓슨은 나중에 자신의 이중나선 이론에 후기를 덧붙여 프랭클린의 연구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글을 써 비난의 화살을 잠재웠다. 그러나 이 스토리는 이제 과학자의 윤리와 논문사기 등의 이야기가 거론될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주제가 돼 버렸다.

프랭클린은 ‘여성 과학자 차별의 희생자’라는 여성 차별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당시에는 대학을 나와도 여성에게는 학위를 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사실여부가 어쨌든 간에 X선 결정학이 이중 나선구조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단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DNA혁명의 시작은 분명히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확신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서 후손에게 유전되는 물질이 바로 DNA라는 사실이 명확해진 후에서 비로서 DNA 구조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또 혁명의 결정적인 단초는 X선 결정학이다. 그러나 방사선이나 방사성동위원소가 그에 걸 맞는 대접을 받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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