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제 변호사의 로(Law) 인사이트⑱] ‘미필적 고의’라는 치트키, 약자만 잡는 법의 함정
【뉴스퀘스트=법무법인 서울 조기제 변호사】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의 ‘범죄단지’ 사건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기업형 범죄단체가 동남아시아 특정 지역에서 국가의 비호 아래 대규모 단지를 조성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을 유인해 보이스피싱·로맨스 스캠 등 각종 사기 범행을 저지르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이스피싱은 이미 익숙한 범죄다. 과거에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특정 사투리로 상대를 속이려 애쓰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방식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보이스피싱 수법은 매우 고도화되어 있어 쉽게 알아채기 어렵다. 실제와 똑같은 정보를 제시하며 접근한다.
수사기관이나 금융기관을 사칭하는 경우, 이들이 실제 사용하는 서류 양식과 동일한 문서를 제시하고, 그 내용까지 정교하게 꾸며낸다. 심지어 기관의 조직표나 전화번호까지 똑같이 만들어 피해자를 속인다. 이쯤 되면 금융기관이나 수사기관 종사자, 심지어 법조인까지 범죄조직과 연계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보이스피싱 전화를 한두 번쯤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주변에서 실제로 피해를 당한 사례도 흔하다. 필자의 대학생 조카 역시 보이스피싱 전화에 속아 약 100만 원 상당의 상품권을 구매해 바코드를 전달하는 피해를 입었다.
사회 경험이 부족하거나 판단력이 떨어지는 청년층과 노년층이 특히 피해를 입기 쉽다.
그런데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는 단순히 금전을 편취하는 것을 넘어, 피해자들을 속여 또 다른 범행에 이용하는 양상으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거나 사회 경험이 부족한 청년들을 적극적으로 노린다.
범죄단지에서 직접 범행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범죄 사실을 알고 스스로 찾아간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에 속아 자신도 모르게 범행에 이용되는 경우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콜센터’(전화나 문자로 피해자를 속여 돈을 이체하거나 특정 장소에 보관하게 하는 역할), ‘현금수거책’(편취한 돈을 인출·수거하는 역할), ‘송금책’(편취한 돈을 국내외 계좌나 가상화폐 등으로 송금하는 역할), ‘계좌모집책’(범행에 사용할 계좌를 확보하는 역할) 등으로 역할을 세분화해 점조직 형태로 운영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보이스피싱’이라 하면 ‘콜센터’만을 떠올리며, 피해가 그 단계에서만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금전적 피해는 주로 이 단계에서 일어나지만, 조직의 범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현금수거책’, ‘송금책’, ‘계좌모집책’ 단계에서도 사람들을 속여 범행에 이용한다.
채권 회수 업무 담당 직원을 모집한다는 구인 광고로 사람들을 유인해 편취한 현금을 수거하거나 송금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콜센터’는 피해자로부터 단순히 돈을 편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출을 빙자해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를 받아 범행에 이용한다. 심지어 동일한 피해자를 상대로 금전 편취, 현금 수거, 카드·계좌 편취를 동시에 시도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렇게 현금수거책으로 이용되거나 자신의 카드나 계좌를 넘겨 범행에 이용된 사람들이 오히려 보이스피싱 범죄의 공범으로 처벌된다는 점이다.
이들 대부분은 사회 경험이 부족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대학생, 청년, 신용불량자 등 사회적 약자다. 법정 방청 중에도 보이스피싱에 이용된 청년들의 재판이 줄을 잇는다. 경찰 공무원이 꿈이었다며 눈물을 흘리던 여드름투성이 군인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들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방조범’으로 처벌받는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기본적으로 사기죄에 해당한다. 다만 일반 사기죄보다 형을 더 무겁게 하고, 피해자의 금전적 손실을 신속하게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정된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따라 별도로 처벌된다.
즉, 기존의 사기죄 법리를 적용하되, 보이스피싱 범죄의 특수성과 피해 규모를 고려해 보다 엄격한 처벌 기준을 두고 있는 것이다.
보이스피싱은 국제적 점조직 범죄이므로 수사가 매우 어렵다. 결국 본범은 잡지 못하고 범행에 이용된 사람들만 엄벌하는 현실이 발생한다. 수사기관으로서도 이해할 부분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면피가 가능하고, 이들을 엄벌하면 범죄가 줄 것이라는 명분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을 처벌한다고 해서 보이스피싱 범죄가 줄어들 것인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명분만으로 사람을 형사처벌할 수는 없다. 구성요건, 위법성, 책임이 모두 인정되어야 형사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방조범’이라는 치트키다.
‘방조범’이란 본범의 범행을 도와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본범의 결의를 강화하거나 실행을 돕는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본범으로 처벌할 수 없는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기에 적용에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방조범에도 ‘고의’가 필요하다. 본범의 실행을 돕는다는 ‘방조의 고의’와 본범의 행위가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한다는 ‘정범의 고의’가 모두 있어야 한다.
따라서 보이스피싱 방조범이 성립하려면, 본범이 보이스피싱 범행을 저지른다는 점과 자신의 행위가 이를 돕는다는 점을 모두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에서 보이스피싱 범행에 대한 ‘확정적 고의’를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미필적 고의’다.
미필적 고의는 고의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리이지만, 매우 모호한 개념이다.
대법원은 “미필적 고의란 결과의 발생이 불확실한 경우, 행위자가 그 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가 있는 상태”라고 판시한다.
즉 결과 발생의 가능성을 인식하고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점이다. ‘미필적 고의’를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결국 피고인의 행동이나 진술, 당시의 정황 등 간접증거를 통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
법원은 이러한 사정을 종합해 “일반인이라면 그 상황에서 범행 가능성을 인식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즉, 당시 상황이 ‘이례적’이었다면 보이스피싱일 가능성을 인식했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비약이다. 단지 ‘이례적인 상황’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보이스피싱 가능성 인식’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법원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보이스피싱이 사회적으로 심각하고 널리 알려진 범죄이므로 누구나 인식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보이스피싱이 심각하다고 해서, 일반 국민이 그 구조나 수법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콜센터 개그’ 장면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따라서 보이스피싱에 이용된 사람들에게 함부로 ‘미필적 고의’를 적용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이는 ‘딱 보면 안다’는 식의 ‘관심법’에 가깝고, 법치주의의 근본을 흔들 수 있다.
보이스피싱은 반드시 근절해야 할 중대한 범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범죄단지 사건에서 보듯, 이미 보이스피싱은 기업화·국제화·고도화된 범죄다. 대부분의 사건에서 본범은 검거되지 않는다.
이에 면책 조건부 증언취득 제도 등을 포함한 한국형 플리바게닝 도입 등 새로운 수사 돌파구가 필요하다. 국제 공조 수사체계 역시 강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본범을 발본색원하기 위한 범정부적 대책이 필요하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방조범’이라는 법리로 사회적 약자인 청년들만 손쉽게 처벌하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현재 정부와 여당이 추진 중인 배임죄 및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검찰의 항소권 자제 요구, 그리고 대통령의 “열 명의 범죄자를 잡지 못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는 만들지 말라”는 발언의 취지가, 보이스피싱에 이용된 청년들에게도 일관되게 적용되기를 바란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방조범’이라는 치트키가 손쉬운 미봉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조기제 변호사 프로필>
- 서울 상문고등학교 졸업
-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 사법고시 44회 합격
- 사법연수원 34기 수료
- 제주지방검찰청 검사
- 수원지방검찰청 안산지청 검사
- 창원지방검찰청 검사
- 도산법연구회,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 회원
- (현) 법무법인 서울 변호사
- 세무사, 형사전문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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