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보면 팽나무, 팽나무 한다.

나를 '팽나무 박사' 또는 '팽박'하고 부르거나 아예 나무 '수'자를 붙여 '팽수박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생겼다.

이게 다 창원의 '우영우팽나무' 덕분이려나.

너무 유명해진 그 나무의 천연기념물 지정 예고를 앞둔 며칠 전에는 그 일을 담당하는 문화재청의 한 연구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홍보 영상을 제작하는 데 나와서 '우영우팽나무'에 대해 전공자로서 자랑 좀 해줄 수 없냐는 부탁이었다.

팽나무가 얼마나 멋진 나무인지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이미 모두가 다 알게 되었는데 내가 할 이야기가 뭐가 더 있나 싶어 정중히 사양했다. 

대전 정부 청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선배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상급자가 요즘 팽나무 관찰하는 일에 빠졌다고 운을 떼며 사진을 하나 보내왔다.

청사 산책길에 만난 팽나무 가로수 열매가 왜 붉은 계열이 아니고 노랗거나 검은색이냐고 물으면서. 

좀풍게나무였다.

팽나무 열매는 녹색으로 시작해서 붉은 계열로 익는다.

어느 한 색깔로 단정할 수 없는 좀 더 밝거나 좀 더 어두운 붉은색들.

그래서 이 무렵의 팽나무는 안 익거나 덜 익거나 더 익은 정도에 따라서 녹색부터 빨간색까지 다양하게 알록달록한 빛깔의 열매를 달고 있다.

하지만 좀풍게나무는 팽나무와 달리 열매가 검정색이다. 정확하게는 녹색으로 시작해서 노란색으로 변하다가 완전히 다 익으면 검정색이 된다. 

팽나무(좌)와 좀풍게나무(우)의 열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선배 분류학자들조차 좀풍게나무의 존재를 잘 몰라서, 국내 표본관에는 이들 열매가 노란색일 때 채집된 것을 '노랑팽나무', 검정색일 때 채집된 것을 '검팽나무'라는 이름으로 잘못 붙여 둔 경우가 대다수다.

일찍이 일본의 식물분류학자들에 의해 한반도 팽나무속 식물이 채집되었는데 일본에는 자라지 않는 좀풍게나무를 그들이 잘 몰랐던 거다.

그렇게 모인 표본과 기록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답습되어 오늘에 이르다 보니 정작 우리 땅에 사는 좀풍게나무를 우리가 잘 모르게 되었다.

오는 가을과 겨울에는 몇몇 표본관을 방문해서 팽나무 표본의 이름들을 바로잡는 일에 시간을 조금 더 쓸 생각이다. 

우리가 팽나무라고 알고 있는 국내 가로수 중에는 좀풍게나무가 더러 섞여 있다.

선배가 보내온 사진 덕분에 대전의 그곳에도 좀풍게나무가 식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경복궁과 창경궁과 청와대에는 팽나무보다 좀풍게나무가 더 많다.

팽나무는 남부지방에, 좀풍게나무는 중부지방이나 그 이북 지방에서 더 잘 살기 때문이다(드물게 남부지방에도 좀풍게나무가 산다. 목포 갓바위에 가면 한 곳에서 팽나무와 좀풍게나무를 다 만날 수 있다. 한반도의 팽나무속 식물 중에 분포 역이 가장 넓은 나무가 바로 좀풍게나무이다).

강원도 동해안을 기준으로 남쪽에 널리 퍼져 사는 팽나무가 북쪽의 좀풍게나무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지점을 나는 삼척으로 본다.

그러니 삼척 이북(특히 강원도 고성 부근)에서 팽나무처럼 생긴 아름드리 큰 나무를 만난다면 유심히 살펴보시기를.

팽나무가 아니라 한반도 중부 이북을 주 무대로 삼고 살아가는 좀풍게나무이거나 풍게나무일 테니까. 

'팽나무 덕분에 불에 타지 않고 불이문이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 건봉사가 강원도 고성에 있다.

하지만 살아남은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팽나무가 아니라 풍게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절은 한국전쟁 중 불에 타 사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지금은 일부가 복원되었다.

절의 입구 불이문은 그 곁을 지키는 500년이 넘은 팽나무 덕분에 화마의 피해를 면했다고 알려져 있다.

명백한 오류다.

팽나무가 아니라 풍게나무인 그 친구 앞에는 지금도 여전히 '팽나무'라고 적힌 보호수 안내 팻말이 있다.

이처럼 정확한 정보가 필요한 때에 그 실재를 제대로 헤아리지 않아서 오류를 범하게 되는 사례가 우리 식물의 세계에는 많은 편이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당장 어려운 실험을 설계하거나 거창한 이론을 정립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본래 사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들여다보는 일부터 시작하면 인간의 잘못된 판단을 훨씬 더 줄일 수 있다.

그러므로 '강원도 고성에 팽나무가 저절로 산다(?)'라는 명제에는 의구심을 갖고 식물탐구의 전등을 탁. 하고 켜야 한다.

그러고 나면 팽나무를 걷어내고 좀풍게나무와 풍게나무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열매 색과 잎의 모양이 아예 달라서 풍게나무가 팽나무와 헷갈릴 일은 잘 없다.

하지만 좀풍게나무와 풍게나무는 똑같이 검정색 열매를 맺기 때문에 차이점을 알아두면 그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는 데 아주 유용하다.

먼저 그 둘은 잎이 전혀 다르게 생겼다.

좀풍게나무는 잎의 상부 가장자리에 톱니 같은 거치가 아주 조금만 있지만 풍게나무는 잎 가장자리 거의 전체에 들쑥날쑥하게 나 있어서 잎만으로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그럼 잎이 다 진 겨울에는? 땅에 떨어진 열매를 보면 된다.

까만 열매의 과육을 벗기면 나오는 내과피의 표면이 그물처럼 쭈글쭈글한 게 풍게나무다.

좀풍게나무는 비교적 매끈하고 하얗다.

그걸 보려고 열매를 줍다 보면 땅에 떨어진 마른 잎들도 덩달아 관찰할 수 있다.

식물학적 사유는 사소한 관심과 궁금증에서부터, 라고 나는 그렇게 나무와 나 사이에 관계를 맺어왔다. 

좀풍게나무(좌)와 풍게나무(우)의 잎과 내과피 (국립백두대간수목원 허태임).
좀풍게나무(좌)와 풍게나무(우)의 잎과 내과피.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지난 주말에는 8살 조카에게 늦반딧불이를 보여주고 싶어서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 있는 '국제밤하늘보호공원(IDA Park)'에 다녀왔다.

그곳은 2015년 국제밤하늘협회(IDA)가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지정한 '보호공원'이다.

인공조명으로 인한 생태계의 교란을 최대한 줄이고 자연 그대로의 밤하늘을 양껏 만나볼 수 있는 곳인데 마침 영양 '반딧불이축제'가 그날 열리고 있었다.

인위적인 빛의 간섭이 없으니 별을 관찰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여서 그곳에는 천문대도 있다.

늦여름에 등장하는 늦반딧불이와 가을을 앞둔 맑은 밤하늘과 천문대라니, 이 얼마나 완벽한 조합이던가.

조카보다 내가 더 신이 나서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총총 별을 헤아렸다. 

검지로 이 별과 저 별을 이어 팽나무 열매를 그리니 조카는 이모 손목에 있는 거네, 하고 헤실헤실 웃는다.

내가 그린 팽나무 열매 세밀화를 따서 석사학위 받던 해에 자축 삼아 내 손목에 새긴 타투를 말하는 거다.

조카는 별들을 이어 하트를 그리며 아 맞다 이모, 우리 반에 누가 전학 왔어, 하고 말한다.

처음 학교에 입학한 조카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매일매일 신기한 모양인데 최근에는 생애 첫 전학생이 몹시 신기한 모양이다.

새로운 친구 만나서 뭐했어? 내가 묻고 조카가 대답한다.

이름이 뭐야? 어디서 왔어? 이렇게 물어봤다고.

내가 또 대답한다. 우와아, 이모랑 똑같네. 이모도 처음 만나는 식물한테 다가가서 먼저 말을 걸어. 이름 알려줄 수 있어? 혹시 어디에서 살다 왔는지 물어봐도 돼? 하고,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서 그렇게 물어봐.

'과학동아' 9월호에 '식물과 연애하는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이야기가 실렸다.

허태임을 취재하고 글을 쓴 김소연 작가는 '초등학생 조카를 데리고 아파트 화단을 거닌다'고 나를 소개하며 나와 나눈 대화를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실었다.

"조카가 이제 아파트 화단의 풀 이름을 다 외우고 있어요. 선생님에게 자기 꿈이 이모처럼 식물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는 거라고 했다더라고요"

김 작가는 '관계를 맺는 건 이렇게 쉽다. 잠깐이라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된다.'며 '허 연구원의 팽나무처럼 식물 하나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삶 속에 들어올지도 모른다.'고도 적었다.

기사를 읽다 말고 내 마음은 우영우팽나무에게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

지금의 관심이 나무를 너무 못살게 구는 건 아닌지 딱해서, 건봉사의 불이문에 들이닥친 화마도 뒤엎을 만큼 지나친 지금의 열기가 혹시라도 나무를 상하게 하진 않을지 걱정이 앞서서, 나처럼 내향의 극 ‘I’성향일 것만 같은 그 나무가 그냥 나 좀 놔두세요, 하는 이야기가 자꾸만 들리는 것 같아서.

오랜 시간 가만히 바라보고 다정하게 지켰기에 나무는 지금에 이른다.

맹목적인 추종보다는 그들 삶을 가다듬어 곰곰이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그렇게 식물에게, 동물에게, 타인에게, 비로소 나 자신에게 다가갔으면.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