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예인 집단의 연희, 전통 공연예술사의 소중한 보고(寶庫)

사당패(기산풍속도)
사당패(기산풍속도)

【뉴스퀘스트=김승국 전통문화칼럼니스트】 조선조 말과 일제강점기에는 남사당패(男寺黨牌), 사당패(社堂牌), 대광대패(竹廣大牌), 솟대쟁이패, 초라니패, 풍각쟁이패, 광대패(廣大牌), 걸립패(乞粒牌), 중매구패, 굿중패, 얘기장사패, 각설이패 등 다양한 명칭의 유랑예인 집단들이 있었다. '

이 중 사당패·걸립패·남사당패·굿중패는 절과 관계있는 유랑예인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일정한 주거 없이 전국 각지를 떠돌며 없이 자신들의 기예와 춤, 노래 따위로 전통연희의 연행을 담당했던 전문 예인들로써 우리 전통 공연예술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유랑예인들은 비록 천민으로서 사람다운 대접은 받지 못했어도, 그들은 자신들 나름대로 장인 정신을 몸에 익히며 기예를 닦아 탁월한 재주로 관과 민에게 사랑받았다.

유랑예인 사이에서는 소리꾼을 최고로 치고, 그 다음이 악기 잽이를, 그 다음이 재주 잽이를 쳐주었다.

유랑예인들은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유랑 문화를 창조하고 전파해 우리 한국의 전통연희 예술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남사당패(男社堂牌) 외에는 모두 역사 속에 사라져버렸으나, 이들 모두 남사당패 못지않게 예능이 뛰어났다.

남사당패를 포함하여 사라져버린 유랑예인 집단들에 대해 알아보자.

◆ 남사당패의 연희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지만

남사당패(男寺黨牌)는 1900년대 이전에 재승(才僧) 계통 연희자들의 후손으로서 형성된 본래 남자들로만 구성된 유랑예인 집단이었다.

간혹 어름산이(줄꾼)나 그밖에 한두 사람의 여자가 낀 적도 있으나 이것은 남사당패 말기에 들어서 있었던 일이다.

남사당패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고,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쳤다.

꼭두쇠(우두머리) 밑으로 4, 5명의 연희자를 두었다.

남사당패의 예능은 크게 6가지로 덜미(인형극 : 꼭두각시놀음, 박첨지놀음), 살판(땅재주), 버나(쳇바퀴돌리기, 대접돌리기), 덧뵈기(가면극 : 탈춤), 어름(줄타기), 풍물놀이이다.

옛날에는 이 여섯 연희 외에 얼른(마술) 등도 있었다. 남사당놀이는 1964년에 ‘꼭두각시놀음’이라는 종목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 ‘남사당놀이’라는 종목으로 명칭 변경이 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조선조 말에는 일명 '여사당(女)'으로 통하는 사당패(寺黨牌, 社堂牌)가 있었다.

여성들은 사당이라고 불렀으며 연희를 담당하였고, 남성은 거사(居士)라 불렀으며 연희를 거의 하지 않고 사당들의 수입에 기생(寄生)하며 사당들의 뒷바라지와 허우채(몸값) 관리를 맡았다.

그래서 여성 중심으로 연희를 펼칠 때는 사당패, 남성 중심으로 연희를 펼칠 때는 거사패라고도 불렀다.

사당패에는 소위 이들은 자신들의 연희가 불사(佛事)에 관계된 것임을 반드시 주장하였으며 시주를 걷어 사찰의 제반 경비를 충원하기도 했다.

사당패는 오늘날의 소고춤에 해당하는 사당벅구춤(社堂法鼓舞)을 추었으며 염불, 선소리 산타령 등 민요 창을 연행하고 때로는 줄타기도 하였다.

이때 줄타기는 재담줄이라고 해서 곡예보다는 재담과 노래가 우세하였다.

사당패들에 의해 개척된 가무의 연주방식은 19세기 후반 이후 선소리 산타령패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 사당패는 남사당패에 합류되면서 없어져 버렸고, 이들의 연희 일부가 오늘날 남사당놀이에 수용되고 있다.

◆ 솟대쟁이패, 대광대패, 초란이패, 풍각쟁이패, 광대패, 굿중패 등 연희 복원돼야

솟대쟁이패(기산풍속도)
솟대쟁이패(기산풍속도)

솟대쟁이패가 있었다.

솟대쟁이패라는 명칭은 이 패거리들이 꾸미는 놀 판의 한가운데에 세우는 긴 장대에서 비롯한 것이다.

솟대쟁이패들은 남색(男色) 조직으로서 놀이판의 가운데에 긴 장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서부터 양옆으로 두 가닥씩, 네 가닥의 줄을 늘여놓고 긴 대나무 장대에 광대가 타고 올라가서 몸을 뒤집고 매달리는 등 여러 가지 재주를 피우거나 노래와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솟대타기 외에 풍물, 새미놀이(무동놀이), 꼰두질(땅재주), 얼른(요술), 줄타기, 오광대(가면극), 쌍줄백이(장대 위 두 가닥의 줄 위에서의 묘기), 병신굿(양반 풍자하는 이야기로 짜인 지주와 머슴 2인극) 등의 예능을 연행하였다.

이들은 음악이나 춤, 사설이나 재담보다는 곡예에 치중한 집단이다.

오늘날의 서커스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사당패와 함께 남사당놀이에 수용되었으나, 솟대쟁이패 예능의 대부분은 전승이 단절되었다.

최근 들어 경남 진주의 ‘솟대쟁이놀이보존회’가 결성되고, 양근수 등 일부 연희자들이 솟대타기를 복원하여 연행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대광대패(竹廣大牌)라는 것도 있었다.

대광대패는 낙동강 강가인 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栗旨里 : 속칭 밤마리) 시장이 주 활동 거점이었다고 한다.

밤마리는 야류(野游)와 오광대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남사당패 등 다른 유랑예인 집단들은 주로 마을을 찾아 떠돌아다녔지만, 그들은 주로 각 지방의 장날에 맞춰 장터를 떠도는 유랑예인 집단이었다.

그들의 주요 예능은 풍물, 무동, 솟대타기, 죽방울받기, 얼른(요술), 오광대놀이, 솟대타기 등을 연행하였다.

대광대패는 사라져버렸지만, 이들의 예능 중 오광대놀이가 경남 고성·통영·가산에 남아 전승되고 있어, 유랑예인들의 예능이 향토 예능으로 정착된 셈이다.

초란이패라는 것도 있었는데, 북 따위의 작은 악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익살로 사람을 웃기거나 연주하던 유랑예인들이었다.

주로 피지배층으로 구성된 다른 유랑예인 집단과는 달리 그들은 옛 군인이나 관노 출신들이 주종이 된 유랑예인 집단이었다고 한다.

원래는 가면을 쓰고 잡귀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의식에 따른 놀음판을 벌이던 놀이패였으나, 후에 마을을 돌며 집집이 들러 장구도 치고 ‘고사소리’를 부르며 동냥하는 놀이패로 변했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없어졌으나 하회별신굿에서 양반의 하인 역으로 경망하게 까불어대는 성격을 가진 ‘초란이’ 혹은 ‘초랭이’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초란이패는 풍물(매구밟기), 탈놀음, 얼른, 죽방울받기, 초란이굿(가면극·탈놀음) 등을 연행하였으며, 탈놀음만은 어느 유랑예인 집단보다 빼어나게 잘했다고 한다.

줄광대(기산풍속도)
줄광대(기산풍속도)

걸립패(乞粒牌)라는 것도 있었는데, 비나리패라고도 불렀다.

걸립패는 우두머리 격인 화주를 중심으로 비나리(고사(告祀)꾼, 승려(僧侶) 혹은 승려 출신), 보살, 잽이(풍물잽이), 산이(2~3인의 버나 또는 얼른 연희자(演戱者), 탁발(얻은 곡식을 지고 다니는 남자) 등 15명 내외로 한 패거리를 이룬다.

그들은 풍물놀이·줄타기·비나리(덕담)를 주로 공연했는데, 반드시 자기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의 신표(信標)를 갖고 있어, 마을과 마을을 떠돌며 각 가정을 찾아가 사찰의 보수나 창건을 위하여 기금을 걷는다는 명목으로 곡식이나 금전을 얻었다.

걸립패는 신표를 제시하고 집걷이(지신밟기, 마당밟기) 할 것을 청하여 허락이 떨어지면 풍물놀이를 시작하여 몇 가지 기예를 보여주고, 터굿, 샘굿, 조왕굿 등을 마치고, 마지막에 성줏굿을 했다.

성줏굿을 할 때 곡식과 금품을 상 위에 받아 놓고 비나리를 외웠는데, 받아 놓은 곡식과 금품을 그들의 수입으로 하였다.

1900년대 초 이후 남사당 말기에 들어서는 남사당패, 걸립패가 분별없이 왕래했고, 남사당패가 걸립패 행세하기도 했다. 걸립패는 1930년대 이후 남사당패에 합류되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 솟대타기, 얼른, 쌍줄백이, 죽방울받기 등 전승이 단절된 유랑예인들의 연희 많아 

풍각쟁이패(風角쟁이牌)라는 것도 있었는데 노래나 기악(器樂)을 연주하며 걸식(乞食)했던 유랑예인 집단으로, 크게는 퉁소·해금·가야금·북·가객·무동으로 편성이 되고, 작게는 퉁소·해금·북 또는 퉁소·해금 또는 퉁소·꽹과리로 편성이 되고, 아주 작게는 퉁소 또는 해금 잽이 홀로 연행하며 행걸(行乞) 했다.

풍각쟁이는 이들이 연주하는 악곡으로는 흔히 니나리가락(메나리가락), 시나위(심방곡), 봉장취가 있었고, 이외에 삼현도드리 비슷한 곡, 자진 타령 비슷한 곡, 판소리, 단가, 병창, 검무를 연행하기도 했다.

광대패(廣大牌)라는 비교적 규모가 큰 유랑예인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관의 행사에 공식적으로 동원된 연희자들로서, 삼현육각 등 악기 연주, 판소리, 민요창(12잡가, 산타령, 서도소리 등), 무용(민속무, 정재무), 가면극이나 인형극, 줄타기, 솟대타기, 방울받기, 땅재주 등 각종 곡예 등을 종합적으로 펼쳐 보였다.

광대패들은 중앙 왕실과 궁궐, 지방의 관아에서 사신 영접이나 왕의 각종 행차 시 열었던 산대희나 섣달그믐 액(厄)과 귀신을 쫓는 축역행사(逐疫行事)인 나례 때의 연희인 나례희, 과거 급제자의 잔치인 문희연이나 삼일유가, 권세가의 잔치 등에서 악가무를 동반한 각종 연희를 펼쳤던 무리였다.

조선 후기인 17세기 이후 나례희와 산대희가 폐지되면서 중앙과 궁궐, 관아 행사가 축소되자 광대패들은 솟대쟁이패, 대광대패 등의 사례처럼, 지방의 시장, 파시(어시장), 조창 등을 주요 거점으로 유랑하며 상인들과 결탁해 공연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활동했다. 

굿중패(기산풍속도)
굿중패(기산풍속도)

굿중패라는 것도 있었다.

'굿'이란 '극(劇) 또는 '희(戲)'의 뜻이고, '중'이란 '중(衆),' 즉 무리를 뜻한다. 주 활동 지역은 경상남북도였다. 굿중패는 중매구패라고도 불리며 남사당패와 솟대쟁이패 중에서 기예에 뛰어난 연희자만으로 구성되었던 15명 내외의 남색(男色) 조직의 예인 집단이다.

이들은 종이꽃이 달린 고깔을 쓰고 소매가 좁은 장삼(長衫)을 걸친 잡승(雜僧)들이 북, 징, 꽹과리를 치며 각 가정의 뜰 안으로 들어가 깃발을 들고 염주, 소고, 작은 징 모양의 악기를 들고 춤도 추고 염불을 외고 기도하면서 집주인의 복을 빌어주고, 점도 봐주면서 걸립(乞粒)하였다.

이들은 염불, 풍물, 버나, 땅재주, 줄타기, 한량굿(1인 창무극, 배뱅이굿, 장대장네굿, 병신굿 등 다양함) 등을 연행하였다.

굿중패가 지나간 자리는 남사당패와 솟대쟁이패가 들르지도 않고 피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출중한 기예를 선보인 집단이었다.

1930년대 이후 남사당패로 흡수되면서 명맥이 끊겼다. 그들은 풍물, 불경, 중매구(오광대놀이와 비슷) 등을 연행하였다.

얘기장사패라는 것도 있었는데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야기를 팔아 돈을 버는 거리공연 예술가를 말한다.

‘얘기장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람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배우이기도 하다.

‘얘기장사’의 이야기 밑천은 옥루몽(玉樓夢)·숙향전(淑香傳)·소대성전(蘇大成傳)·심청전(沈淸傳)·설인귀전(薛仁貴傳)·홍길동전(洪吉童傳) 등 고대소설이나 전래동화 등 같은 것들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다가 아주 긴요하여 꼭 들어야 할 대목에 이르러서는 읽기를 그치고 관객들의 눈치를 살피면 관객들은 그다음 대목을 듣고 싶어서 다투어 돈을 던져 주었다.

이것을 일컬어 요전법(邀錢法)이라 했다. ‘얘기장사’는 1인의 구연자(口演者)가 대체로 1인에서 3인의 잽이(악사)를 대동하여 이야기의 극적 효과를 높였다.

악사는 기본적으로 장구잽이이고, 해금(깡깽이)잽이와 피리잽이 혹은 단소잽이가 나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각설이패라는 것이 있었는데 ‘각설이’란 걸인을 지칭하는데, 각설이 한 한 사람이 집집을 돌기도 했지만 대체로 2~3명이 조를 이루었으며 그들 나름 특유한 구성진 ‘장타령’을 부르고 대가로서 음식이나 금전을 구걸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떠났네'와 같은 가사가 들어 있는 ‘장타령’이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노래의 가사가 1번부터 10번까지 있어 10을 ‘장’이라고 표현해 붙여진 것으로 본다.

그들은 다리 밑이나 비어있는 곳간 등을 은거처(隱居處)로 삼으면서 주로 시장이 서는 곳을 찾아 자리를 옮겨 갔다.

때로는 초상집이나 제삿집을 찾아가 고사소리나 축원을 해주기도 했다. 각설이는 구걸하되 우는 소리로 빌지 않고, 흥겨운 가락에 축원의 뜻이 담긴 노래나 병신춤을 추면서 구걸하였다.

지방마다 장타령의 노랫말과 곡조는 향토민요의 차이나 마찬가지로 가짓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각설이패와 달리 혼자 해금(奚琴)을 갖고 이집 저집으로 다니며 ‘걸립(乞粒)’을 하는 유랑예인들도 있었다.

구걸의 대가로 연주해 주는 해금 소리가 ‘깡깡 깽깽’ 소리를 닮았다 하여 해금을 ‘깡깽이’혹은 ‘깽깽이’로 불렀던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대문 앞에서, 밥 달라는 차원에서의 공연을 하노라면, 집주인은 그 소리를 듣고 밥이나 먹을거리를 내다 주었기에 그 소리가 그렇게 좋게 들리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깡깽이’라는 별명은 ‘거지(걸인)’와 만나게 되었고, ‘거지 깡깽이 같은 소리’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 유랑예인들의 연희 복원, 거리공연 레퍼토리 확장에 크게 이바지할 것

위에 언급한 유랑예인 집단의 기예 중 전승되고 있는 예능도 있지만, 전승이 단절된 예능이 더 많다.

방울받기, 공중제비, 솟대타기, 나무다리걷기, 칼재주부리기, 죽방울받기(치기, 놀리기), 불토하기 등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렵다.

유랑예인들의 연희에는 예능적 가치가 높은 종목들이 많아, 만일 온전히 복원하여 전승 기반을 구축한다면 전통연희의 콘텐츠를 더욱 풍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전통연희를 기반으로 하는 한 브랜드 공연예술 창작작품 제작은 물론 다양한 거리공연 예술 소재와 레퍼토리 확장에 크게 이바지하리라고 확신한다.

거리공연 예술가들은 우리의 전통 유랑예인 집단들의 예능을 더욱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연구하여 현대적으로 복원하여 거리공연 예술의 소재와 레퍼토리 확장에 활용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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