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 화가의 '부채춤을 추는 무희'(50호 2010년)
김성민 화가의 '부채춤을 추는 무희'(50호 2010년)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2020년 12월 14일 북경TV에서 '북한미술 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 있고 유튜브에도 올라 있다.

이때 중국의 유명한 화가 ‘사국량’이 북한의 만수대창작사를 방문하여 같은 모델을 놓고 만수대창작사 부사장인 김성민 화가와 그림 그리기 경연을 하였다.

두 나라의 학술교류라는 명목이었지만 1시간여(?)만에 두사람의 시합 결과가 드러났는데, 문화와 정서 및 풍격의 차이는 논외로 하더라도, 사국량이 7살 위인 김성민에게 다가가 형님(선생님) 그림이 자신의 것 보다 훨씬 여유있고 실물을 더 많이 닮았다고 고백했다.

사실상 누구나 보면 알겠지만 사국량의 그림이 중국 시세로 시가 수억~수십억원이고 김성민의 작품은 수백~수천만원에 달하지만, 둘 만을 놓고 비교하면 견습생인 제자와 스승뻘이라고 할 정도로 그림의 수준차가 확연하다.

김성민의 그림이 누가 봐도 부드럽고 우아하며 표정이 살아있는 듯 생동하는 그림이라고 찬탄하며 사국량이 수줍어 하면서 손을 들어준 격이다.

북한의 근현대 조선화가를 통틀어 인물화에 관한 선묘법의 필치(筆致)에 있어서 힘과 기교가 가장 뛰어난 화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김성민을 지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스승이자 대선배인 정종여나 리석호, 김용준의 작품이 인물 형상의 섬세함이나 미려함에서 더 나을 수 있거나 우열을 다툴 수 있지만, 박진감 넘치는 힘의 분출과 묘사대상의 예리한 운동감 측면에서 김성민은 청출어람의 전범(典範)을 기가막히게 보여주고 있다.

무희들은 신나고 당당하게 춤을 출 때 가장 예쁘기 그지 없고 치마를 펄럭이는 순간 포착의 동적인 자태가 특히 멋지고 아름답다.

이탈리아 ‘조반니 볼디니(1842-1931)’가 그린 '스페인 댄서'
이탈리아 ‘조반니 볼디니(1842-1931)’가 그린 '스페인 댄서'

북한의 김성민 화가는 북한의 무희를 그리는 대표적 작가이며 생존작가로서 인물화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화 그림은 이탈리아 ‘조반니 볼디니(1842-1931)’가 그린 '스페인 댄서'인데 그 역시 역동적인 춤 동작을 가장 잘 그리는 작가로 서구를 대표한다.

정적이고 안정된 구도의 차분한 인물화는 이들 화가에게 흥미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실력이 넘쳐 흘러 살아 움직이는 동작과 얼굴 근육이 실룩거리는 다양한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빠른 스케치의 형태로 그림을 춤추듯 완성해 나아가는 번득이는 개성을 노출한다.

김성민 그림에서 무희는 손에 부채를 잡고서 흔들고 상체를 비틀고 꼬다시피 하며 소매와 치마를 들썩이고 리듬에 맞춰 다리를 살며시 돌려 올리며 동양적 맵시를 과시한다. 그리고 얼굴색은 홍조를 띠고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주변 꽃들이 호응할 정도로 웃음을 흩날리는 여유가 시선을 홀리게 한다.

조반니 그림에서는 무희의 율동이 마하의 속도로 공기를 가르며 배경의 벽면에 눈부신 빛의 색면들로 빗살무늬를 새기며 스냅사진의 환상적인 정지 화면처럼 파격적으로 비친다.

무희들의 자신감 넘치는 밝은 미소와 경쾌한 춤사위는 화가들의 박력있고 율동감이 살아 있는 붓질과도 닮아 있고 무희들의 성격 창조와 화가들의 심리 상태와도 직결되어 보인다.

두 그림에서 동적인 움직임이 가장 잘 드러나는 역점 부분이 치맛자락이다. 치마의 주름과 동세에 따라 말리고 감김이 일필휘지로 처리되었기에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곡선미가 넘실거린다. 또한 치맛자락에서 물씬 안겨오는 인상주의적인 색상의 변화와 파동치는 색감은 물결을 일으키며 어른거리는 듯하다.

이런 점에서 역동적인 운동감과 이에 따른 색채 변이를 시원스러운 붓질로 꿈결같이 펼쳐내는 조반니는 이탈리아의 인상주의 화가로 일컬어진다.

김성민의 도발적 색채감은 상체의 푸른색 계열과 하체의 붉은 색감의 극적인 보색 대비를 통해 두드러지며 치마폭의 현란한 색상 구사는 감미로운 색채 감각이 묻어난다.

◇김성민(1949~ )은 누구인가?

김성민의 인물화 중에서도 미인도는 가히 천하일품이다. 미인의 형상에서 우아한 기품과 고결한 모성애의 성품을 드러내는 측면에서는 강정님의 미인도를 따라갈 수 없지만, 빼어난 미모와 흡인력 있는 눈빛, 볼살의 여성스러운 살구 빛깔에 있어서는 강정님의 미인도를 추월한다.

또 하나는 생동하는 여성들의 춤사위의 동적인 미감을 포착하는데 있어서도 동서고금을 통하여 이만한 사람이 또 나올까 싶다. 마치 춤추는 여인에게 최면을 걸어 화선지라는 무대로 그대로 불러들이는 주술사라고 평하고 싶다.

김성민의 미인도를 보노라면 얼굴형은 다소 갸름하거나 둥그스런 타원형인데 환한 눈매와 미소 띤 입매는 한결같이 서글서글하고 시원스런 호인형의 기품이 느껴지는 미인이다.

남자가 그리는 미인도의 한계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화가 자신을 닮을 수 밖에 없는 화가 인물 창조론의 숙명일까? 한편 큰 누님같이 넓은 품으로 온유한 성품과 자비로운 심성을 지니면서도 매력적인 콧날과 섬세한 긴 손가락의 소유자인 예술가형의 자태에서는 어김없이 여성성의 향취를 풍긴다. 좋게 말하면 천사형 아수라백작의 중성성을 창조한 개성적 캐릭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김성민은 북한의 최대 최고 예술창작기지인 만수대창작사의 화가이자 부사장으로서 실질적으로 소속 창작사의 활성화를 주도하고 있다. 행정가 일을 겸하는 고단함 때문이지, 워낙의 애주가 취향 탓인지 김성민은 노년기에 접어든 지금도 술을 무척이나 즐긴다고 한다.

만수대창작사에서 간행한 김성민 화집의 설명 일부분을 옮겨본다. “김성민은 높은 형상 수법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하여 국보적 가치를 가지는 시대의 명작들을 훌륭히 창작해 내고 있다. 김성민이 거둔 창작적 성과의 요인은 다음으로 지칠 줄 모르는 탐구정신과 그것을 구현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다. 지난 20여년간에 그는 단 하루도 창작적 사색을 중단한 일이 없으며, 기량 훈련과 습작을 중단한 일이 없다.

특히 그는 열렬한 독학가이며 음악애호가이다. 새것을 섭취하려는 그의 진취성은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한다.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예술, 체육 등 그의 관심 밖에 있는 분야란 없다. 김성민의 작품에서 시대적 배경의 생동성과 환경묘사의 정확성, 그리고 의상과 소도구에 이르는 세부묘사의 진실성 등은 그가 지닌 해박한 지식과 지적 축적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김성민은 또한 음악을 몹시 사랑한다. 그의 창작은 음악세계와 떼여놓고 생각할 수 없다. 어느날 그는 음악을 감상하다가 피아노협주곡  '조선은 하나다'와 맞다들었다..

그는 몹시 흥분하였다. ‘반만년의 유구한 세월 하나의 강토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 온 우리 인민이 외세에 의해 둘로 갈라진 이 참상을 놓고 온 겨레가 가슴을 치고 통곡하듯 비통하게 울리는 바이올린의 울림이 가슴에 안겨온다.’ (중략)

그의 작품이 약동감에 차넘치고 률동감에 넘쳐흐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듯 김성민은 작품 창작을 위하여 인류가 창조한 모든 지적 유산들을 섭취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여 왔으며, 그것을 작품 창작에 구현하기 위하여 피타는 탐구와 사색을 거듭하는 그 길에서 성공하였다.”

음악적 감수성이 풍부한 그였기에 언제나 그의 무희 그림 속에는 토속적 가락과 악기들이 혼합되어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무희의 춤사위와 함께 용해되어 있다. 뇌쇄적 미모의 무희들이 지면을 뚫고 박차고 나와 관람자와 더불어 장단을 맞추어 춤을 출 것처럼 언제나 생기발랄하고 율동미가 흘러 넘친다.

김성민은 북한이 자랑하는 조선화 화가이며 그중에서도 인물화의 최고 대가로 꼽힌다.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시 초상화를 그려 그 실력의 진가와 그의 위상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는 1979년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했으며,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 미술작품 국가심의위원회 종합심의원, 국제조형예술협회민족위원회 집행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그의 여인 인물도에는 사뿐한 율동미와 너울거리는 자태, 미묘한 심리가 표정 속에 은연중 녹아든 묘사가 가히 천하일품이다. 그는 북한의 국가미술전람회 최다 금상 수상자이고 북경 세계미술전람회 금상 수상을 비롯하여 북한 작가중 세계 유수의 국제미술전람회 수상경력에서 으뜸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 2000년 2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세계평화미술제전2000' 전시회에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지난 49년 평양시 대성구역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탁월한 소질을 보여 7살 때부터 `미술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976년부터 만수대창작사에서 활동했으며, 1999년부터 만수대창작사 부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김일성 상 계관인'이며 노력영웅 및 인민예술가로 북한 미술을 세계에 홍보하는데 남은 생애를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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