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글·사진 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10시쯤 다시 이정표를 만나고 칠족령(漆足嶺)으로 발길을 옮긴다. 

크고 오래된 굴참나무 이파리 뒷면이 여린 빛을 띠어 마치 상수리나무 이파리를 닮았다.

특이한 산림지대의 깎아지른 바위 절벽, 이른바 뼝대의 시작이다.

위험한 바윗길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고 걷는다. 

제장마을에 사는 선비가 옻을 끓이는데 개가 사라져 찾으러 나선다.

발에 옻을 묻힌 채 나간 개 발자국을 따라가 절경을 발견했다고 옻 칠(漆), 발 족(足)자를 붙여 칠족령이 되었다. 

털댕강나무.
털댕강나무.

20분쯤 절벽 길 따라가니 마주나는 잎은 진달래 비슷한데 줄기에 세로줄 여섯 개 홈이 파였다.

꺾으면 “댕강” 소리 난다고 댕강나무, 이파리 앞뒤에 털이 있어 이곳에는 털댕강나무다.

털댕강나무는 1~2미터까지 자라는 낙엽활엽수, 병꽃나무 꽃 비슷하나 작고 희다.

5월에 꽃 피고 열매는 9월에 익는다.

영월, 정선 등 강원도 석회암 지대 바위틈 반 그늘진 곳에 잘 자란다.

만주, 우수리강까지 산다.

털댕강나무에 매달린 매미.
털댕강나무에 매달린 매미.

안개는 걷히고 해는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데 구부러진 노송(老松) 절벽너머, 굽이굽이 돌아가는 강기슭 집들이 모여 산다.

강물은 어제내린 비에 흙탕물이지만 날이 좋았으면 석회성분이 많아 우윳빛처럼 보얗게 흘렀을 것이다.

낭떠러지마다 군데군데 밧줄을 둘러쳐 “추락주의” 팻말을 세웠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셔터를 누른다.

댕강나무에 붙은 매미는 가까이 다가가도 도무지 날아가지 않고 “맴맴 매 에에~” 석벽의 강이 진동하도록 울어댄다. 

앞서 간 친구는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데 사진 찍고 기록하고 살피느라 뒤처질 수밖에…….

석회암지대라 회양목, 노간주나무도 바위틈에 많다.

굴참나무 바위를 붙잡고 털댕강나무는 무리지어 산조팝나무와 어울려 자란다. 

휘돌아가는 동강.
휘돌아가는 동강.

누리장·산뽕(검지)·대팻집·생강·굴참·떡갈나무, 산기름나물.

11시 넘어서 바위에 앉아 쉰다.

절벽 아래 동강의 물길은 오른쪽으로 흘러가고 섬 같은 육지, 시골길, 집들, 비닐하우스, 점점이 작은 사람들, 흙탕물 강에 가로놓인 시멘트다리, 경운기 소리, 발동기 소리, 방앗간 소리, 닭 우는 소리…….

절벽에 매달린 측백나무, 바윗길에 산조팝·노간주·싸리·댕강·굴참나무.

흐려진 날씨에 바람 불어 으스스하고 마른 옷에는 땀 냄새 배었다.

잎이 엄청 두꺼운 박달나무와 키 작은 개박달나무도 억지로 섰다.

11시 40분 아슬아슬한 뼝대, 낭자(娘子)의 진혼비에 서니 멀리 돌 깨는 기계소리가 동강의 처지를 알리듯 요란하고 어두운 구름이 지나간다. 

회색빛 껍데기, 어긋난 잎은 사포처럼 억세고 꺼끌꺼끌한 이 나무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가만히 보니 작은 가지마다 코르크 날개가 달렸다. 

“옳거니 왕느릅이다.”

“그게 뭐 중요해.”

“남쪽에서 볼 수 없는 걸 봤으니…….”

“……”

왕느릅은 단양·영월이북 석회암지대를 비롯해서 중국·러시아·몽골에도 산다.

느릅나무에 비해 잎이 넓고 열매가 커서 붙여진 이름.

10미터 정도 자라지만 이곳에선 키가 작고 어긋난 잎은 톱니가 거칠다.

코르크층을 벗긴 수피를 유백피(楡白皮)라 해서 소변을 잘 통하게 하고 부은 것을 내리며 종기·항암에 썼다고 알려졌다.

옛날 산비탈에서 굴러 떨어진 아들의 엉덩이 살이 찢겨 온갖 약을 써도 낫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 꿈에 도사가 나타나 나무껍질을 찧어 곪은데 붙이면 나을 것이라 일러준다.

그대로 했더니 며칠 지나 고름이 나오고 새살이 돋아 목숨을 건졌다 한다.

백운산.
백운산.

정오 무렵 갈림길(칠족령0.2·문희마을1.4·백운산2.2킬로미터), 잠깐사이 칠족령(왼쪽 정상2.2·직진 제장1·오른쪽 문희마을·칠족령전망대0.2·하늘벽구름다리1킬로미터), 제장마을 다리보이는 데서 돌아섰다.

백운산 조망이 뛰어난 곳에서 몇 번 셔터를 누르다 우리는 문희마을로 걸어간다.

갈림길 두어 번 지나고 난티나무를 만난 12시 30분, 고구려 신라가 다투던 산성 터에는 땅도 나무도 움푹 골이 졌다.

댕강나무처럼 홈이 파인 곳.

왕느릅나무.
왕느릅나무.
복자기나무.
복자기나무.

당단풍·산벚나무 호젓한 산길에 광대싸리는 굵고 가지가 밑으로 처져서 관상수(觀賞樹)로 제격이다.

도시 근교에 있었으면 모두 광장으로 끌려가 팔 다리 잘려 매연 속에 신음하고 있을 터.

나고 자란 곳에서 천수(天壽)를 누리다 죽는 것이 사람이나 동물이나 나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수수밭.
수수밭.
미탄면 소재지.
미탄면 소재지.

백운산에는 왕느릅·난티·털댕강·산조팝·굴피·박달나무가 많다.

길섶의 그늘에 박쥐나무 무리를 이루었고 산뽕나무는 삼지창모양, 둥근모양의 잎이 같이 달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려오는 길에 갈참나무, 마타리·개망초·밀나물·달맞이꽃을 바라보다 어느덧 산 아래까지 왔다.

오후 1시, 거의 5시간 걸렸다.

백룡동굴 가려다 배 시간이 안 맞아 안내소에 들렀다.

배타고 갔다 오는데 2시간 반, 사진만 찍고 산마을 수수밭을 지나 한적한 미탄면 소재지로 달려간다.  

백룡동굴은 때 묻지 않은 석회동굴로 10미터 가량 들어가면 온돌·아궁이·굴뚝의 흔적이 있어 조선시대 피난 터로 추정한다.

백운산의 백, 1976년 처음 발견한 사람의 이름, 용을 붙여 백룡동굴로 불려 진 것.

1979년 천연기념물이 되었고 2000년 동강댐 건설 백지화로 간신히 수몰위기를 넘겼다.

동강은 정선에서 영월까지 한강 상류구간으로 대략 60킬로미터 남짓, 영월 동쪽에 있어 동강이지만 정선이 더 길고 비경을 품었다고 여긴다.

아우라지에서 흘러와 조양강이 끝나면 동강의 시작이다.

영월읍 서강(평창강)과 섞여 남한강이 된다.

조양강, 동강, 남한강, 한강은 모두 한 줄기다.

굽이굽이 산을 돌아 흘러 경치가 빼어나고 다양한 동식물과 석회암 동굴, 기암절벽이 많다.

어느 해 여름날 밤의 어라연, 아우라지, 래프팅, 나룻배, 물안개 피어오르던 동강의 설렘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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