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는 우리 악기는 다 잘 분다

【뉴스퀘스트=김승국 전통문화칼럼니스트 】

대금을 연주하는 이생강
대금을 연주하는 이생강

전통음악의 정상급 연주가 중 몇 분의 연주를 듣다 보면 ‘정말 음악을 가지고 논다’라고 여길 정도로, 우리 전통음악의 ‘멋’과 ‘맛’을 제대로 표현하는 최고의 기량을 갖춘 명인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분들이 들으면 무척 서운하게 들리겠지만, 최고의 연주 명인을 꼽으라 하면 주저 없이 대금산조의 명인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죽향 이생강’ 선생을 내 세울 수 있다. 언젠가 평소에 존경하는 한 국악계 원로로부터 “‘이생강’은 100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할 최고 기량을 갖춘 명인이며, 우리 생전에 그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분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생강은 1937년생으로 일본 동경 아사쿠사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이규식이나 해방 이후 아호(雅號)인 생강(生剛)으로 개명하였다. 해방 이전에 일본 동경 아사쿠사에서 자동차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던 울산시 울주 출신의 아버지 이수덕의 열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기술자로 생계를 영위하였지만 고향이 그리울 때면 피리·단소·퉁소·소금 등의 악기를 직접 만들어 연주할 정도로 악기 연주에 능숙하였다. 그러니 이생강의 첫 음악 선생은 아버지인 셈이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이생강은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돌아와 전국을 순회하며 장사하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악기 연주로 호객하며 아버지를 도왔다. 1947년 운명의 날이 왔다. 당시 전주역에서 가판대를 만들어 명태를 팔고 있었던 아버지를 돕기 위해 이생강은 손님을 끌어모으기 위해 트럭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다, 때마침 지나가다 이생강을 지켜보던 평생의 스승이 될 한주환(1904~1966)을 만나 대금산조를 배우게 되었다. 한주환은 대금산조의 창시자 박종기(1879~1941)의 직계 제자였다. 그날 이후부터 스승 한주환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그의 음악 선생님은 비단 한주환만은 아니었다. 부산에서의 생활은 장차 그의 스승이 될 수많은 국악 명인을 만나 음악적 역량의 기반을 쌓는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6·25전쟁을 피해 피난을 온 전국 각지의 국악 명인들이 부산에 집결해 있었기에 음악적 욕심이 컸던 이생강에게는 학습의 절호 기회였다. 물론 1955년 서울에 올라와서도 그의 학습은 멈추지 않았지만, 부산에서 그의 기초가 단단히 다져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금산조는 크게 소리 더늠(제)의 대금산조와 시나위 더늠의 대금산조로 대분된다. 편재준(1913~1976)의 삼현제 산조도 있었으나 전승이 단절되었다. 소리 더늠의 대금산조의 효시는 박종기(1879~1941)로서 한주환(1904~1966)으로 이어져 이생강으로 계승되었고, 시나위 더늠의 대금산조는 강백천(1898~1982)에서 김동표, 송부억쇠, 이엽 등이 계승하였다.

  흔히 인간문화재로 일컬어지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이생강’선생은 대금 연주뿐만 아니라 피리, 단소, 대금, 태평소, 소금, 퉁소 등 전통 관악기 연주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도 최고가 아닌 것이 없다, 그만큼 그는 타고난 관(管) 잽이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만 있다고 유명연주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 선대 명인들로부터의 혹독한 전수과정과 뼈를 깎는 고통이 수반된 자신과의 싸움이 있었다. 

  이생강은 그의 스승이 모두 23명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당대의 국악계를 주름잡았던 23명의 정상급 명인들로부터 남도, 영남, 경기, 관서 등 전국 각지의 음악적 특색 및 기법을 학습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악인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하여서도 배울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 고백하는 음악 선생님들의 면모는 다음과 같다. 

  대금 연주는 한주환(대금), 김태홍(향제), 최창로(향제), 강백천(남도민요)과 아버지 이수덕(민요)으로부터, 단소 연주는 아버지 이수덕으로부터 민요, 죽도선생(산조), 정경태(시조), 신석운(향제), 신창휴(향제), 전추산(산조), 박성옥(무용 반주)으로부터, 피리 연주는 아버지 이수덕으로부터 민요, 오진석(남도 대풍류, 산조), 김문일(시나위), 임동선(남도 대풍류), 이충선(민요, 경기 대풍류), 지영희(경기제)로부터, 소금 연주는 아버지 이수덕(민요)과 형 이정화(민요)로부터, 퉁소 연주는 아버지 이수덕으로부터 민요, 김태홍(산조), 전추산(산조)으로부터, 태평소 연주는 아버지 이수덕(민요), 김문일(시나위), 방태진(산조), 한일섭(시나위), 지영희(경기제, 능계)로부터, 구음은 명창 박록주, 김소희, 임춘앵으로부터 사사하였다.     

이생강 명인과 필자
이생강 명인과 필자

  이생강의 음악적 행적을 살펴보면 대금산조의 창시자 박종기와 그의 제자 한주환 등 선대 명인의 음악 원형을 사진 찍어 놓듯이 원형 그대로 전승하는 데에만 충실했던 것이 아니라 선대 명인의 음악적 강점은 더욱 발전시키고, 약점은 보완하고 자신만의 음악적 특성을 살려‘이생강류 대금산조’를 완성하였다. 또한 그는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전통음악을 현대인의 정서와 더욱더 가깝게 소통할 수 있도록 주위의 차가운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나라 최초로 퓨전음악의 물꼬를 처음으로 열었다. 그렇기에 그를 ‘국악 연주의 지평을 한층 넓혀 놓은 선각자’라 일컫는다. 

  그가 1937년생이니 올해 우리 나이로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87세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이 40년이 넘었다. 나에게는 한없이 드높은 대선배지만 가끔 “김 선생! 지나가다 김 선생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요. 잘 지내죠? “하며 안부 전화를 걸어주시는 자상한 분이시다. 외형적으로 40년 전의 모습 그대로 유지한 채 연주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막대한 사비를 들여 문화유산인 전통 가무악(歌舞樂)의 원형 보존과 전승을 위한 멀티미디어 제작 사업을 정열적으로 추진하는 등 전혀 늙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그와 당대에 함께 살고 있으니 행복하다. 그의 만수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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