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산문집 ‘여인의 백야’로 루쉰(魯迅)문학상 수상
2001년 ‘영원은 얼마나 멀까’로 루쉰문학상 재 수장 영광.

작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톄닝 중국 전인대 부위원장. 노벨상 후보로도 손꼽히고 있다./제공=검색엔진 바이두(百度)
작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톄닝 중국 전인대 부위원장. 노벨상 후보로도 손꼽히고 있다./제공=검색엔진 바이두(百度)

【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 문인들은 특별한 케이스가 아닌 한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고 단언해도 좋다. 직접 정치 일선에 뛰어드는 것은 더욱 그렇다고 해야 한다. 여성일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세상에 분명 예외는 있다. 여성 작가가 정치 일선에 뛰어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엽기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는 중국이라면 더욱 이런 단언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인물도 최근 나타났다. 지난 13일 막을 내린 제14기 양회(兩會. 국회에 해당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자문 기구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약칭 전인대와 정협) 1차 회의에서 전인대 부위원장에 선출된 톄닝(鐵凝. 66) 중국 문련(文聯. 문학예술계연합회) 및 작가협회 주석이 바로 이 주인공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작가로는 사상 최초로 부총리급의 고위직에 오른 톄 부위원장은 기록의 여성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이력부터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 집안 배경이 대단하다.

허베이(河北)성 자오(趙)현의 대지주 집안 출신이었던 증조할아버지가 장군, 할아버지가 의사였다. 또 아버지 톄양(鐵揚. 88)은 중국에서는 드물게 보는 기독교인 유명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어머니 역시 대단했다. 그녀의 고향인 허베이성 바오딩(保定)대학에서 음악 교수를 지낸 엘리트로 명성이 자자했다. 집안도 모두가 가난했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부유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인 바오딩이 아닌 베이징에서 태어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집안 배경과 부유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다니지는 못했다. 대학에 진학해야 할 무렵이 거의 대부분 학교들이 다 문을 닫았던 문화대혁명(문혁) 말기인 탓이었다.

이때 그녀에게는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또래의 다른 지식청년(知靑)들과 함께 하방(下放)된 바오딩 인근 농촌에서 노동을 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 있었다.

4년 동안이나 하방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청춘 세월을 다 보낸 그녀는 1975년 첫 단편 작품 ‘날아다니는 낫’을 발표한 기억을 되살려 소설 창작을 평생 업으로 가지기로 결심했다.

이어 이듬해 바오딩 문련 산하의 잡지 ‘화산(花山)’의 편집부 기자가 됐다. 2년 후에는 ‘아, 향설(哦, 香雪)’이라는 작품으로 전국 우수 단편소설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비로소 작가다운 대접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세를 몰아 84년 ‘6월의 화제’와 ‘단추 없는 붉은 블라우스’ 등의 단편 작품을 발표했다. 이후에는 첫 장편 ‘장미의 문’과 ‘비 내리지 않는 도시’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이어나갔다.

1996년에는 산문집 ‘여인의 백야’로 루쉰(魯迅)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안게 된다. 이때 허베이 성 작가협회 주석과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으로 선출됐다. 이후 ‘제12야’, ‘대욕녀(大浴女)’ 등의 작품을 발표한 후 2001년 ‘영원은 얼마나 멀까’로 루쉰문학상을 다시 한 번 더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현재까지 그녀가 출판한 작품들은 산문을 포함, 총 50여종에 이른다. 원고지로 따지면 2만장에 이른다. 많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96년과 2006년 총 5권과 9권으로 된 ‘톄닝문집’을 출판할 수는 있었다.

그녀는 문단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86년에 허베이성 문련 부주석이 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중국 작가협회 부주석을 거쳐 2006년 여성 작가로는 최초로 주석이 됐다.

2016년에는 중국 문련 주석 자리까지 꿰차는 기염을 토했다. 2012년에는 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매 5년마다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정원 200명 남짓의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더니 이번에 결국 전인대 부위원장에 올라 정치적으로도 화려한 족적을 남기게 됐다.

그녀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기회가 있으면 자주 한국을 찾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지어 2003년에는 한국에서 작품 전시회를 연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약 40일 동안 머문 경험도 있다. 이때의 경험은 ‘톄닝일기-서울에서 있었던 일’에 자세하게 수록돼 있다.

한국에서 ‘마음의 연대’, ‘만사형통’이라는 작품집을 내기도 한 그녀의 작품들은 2023년 3월을 기준으로 전 세계 40여개 국가에서 출판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상당한 호평도 받았다. 그녀가 향후 마오옌(莫言. 68)에 이어 노벨문학상을 받을 유력한 중국 작가로 손꼽히는 것은 결코 괜한 게 아니다.

그녀는 현재 중국 문련, 작가협회 주석, 전인대 부위원장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고 해도 좋지 않나 싶다. 그녀가 이처럼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당연히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름 다른 이유도 있다고 해야 한다. 우선 한번 결심한 것은 끝까지 해내는 끈질김을 꼽을 수 있다. 이는 “대충대충은 없다. 혼을 기울여 일을 해야 한다.”라는 인생의 좌우명이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이런 가르침을 배웠다고 한다. 현재까지 그런 것을 보면 평생을 어머니의 훈도를 잊지 않고 가슴 속에 새겼다고 볼 수 있다.

타고난 사교성이 원래 뛰어난 것 역시 거론해야 할 것 같다. 중국 문련이나 작가협회는 어떤 면에서 보면 사교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주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교성도 보통이 아닌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가수 출신인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61) 여사를 문련 부주석으로 영입한 것을 보면 분명 그렇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사이도 보통 끈끈한 게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여기에 특유의 낙천적 성격도 무시하기 어렵다. 주위에 사람이 많이 꼬일 수밖에 없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그녀는 성격과는 달리 결혼을 무려 50대가 다 될 때까지 하지 못했다. 다행히 50세 때 유명 경제학자인 화성(華生. 71) 박사를 만나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다. 당연히 슬하에 자녀는 없다.

그녀는 향후 5년 동안 중국 문화계를 대표해 정치적 활약을 해야 한다. 그 동안 이뤄놓은 것들로 볼 때 무난하게 해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여성 작가 최초의 전인대 부위원장 자리는 그냥 아무나 앉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분명 그렇다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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