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파괴적 변화를 꾀하는 듯한 전위적 묘사가 압권
'총석정의 파도'... 바람을 가르며 갈기를 휘날리는 신비로운 환상의 준마처럼 느껴져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김성근 화가의 '송도의 파도'(60호 2006년)
김성근 화가의 '송도의 파도'(60호 2006년)

▲송도의 파도 (60호 2006년)

그의 파도 그림에는 각 파도마다 독특하고 긴장감 넘치는 성격이 표출되고 있다. 그의 폭풍 구름 같은 파도에 늘 온정적이면서도 격정적인 애정을 쏟아붓는 작가는 파도에 바람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불어넣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보낸 동방의 전령처럼 보인다.

이 그림 '송도의 파도'에서는 햇살이 맑게 비치는 좋은 날씨임에도 강렬하고 매서운 파도가 하얀 포말을 뭉게구름처럼 일으키며 단숨에 밀려오고 바위 절벽을 샌드백 치듯 때리며 단련시키고 있다. 어찌보면 비바람이 치는 음산하고 흐린 날씨에 세차게 휘몰아치는 분노에 찬 노도(怒濤) 보다 신선함과 이색적인 느낌이 배가된다.

맑은 날씨에 오케스트라 사운드처럼 웅장하게 울려퍼질 파도의 기세와 힘을 표현하는 것은 다소 관념적인 과장된 요소가 가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폭풍우를 동반한 날씨의 파도의 기세와 대등해 지려면 묘사의 왜곡이 깃들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대가들의 색채 감각은 그야말로 물오른 장인의 손맛과 도인의 묵시적인 숨결이 흐르고 있음이 발견된다. 색채의 이어짐이 참으로 자연스럽고 요소요소가 수정체 같이 맑으며 빛깔이 곱고 탄력 있다. 강약과 완급의 호흡 조절이 절묘하고 단조로운 색상으로만 구사하더라도 구성이 풍부해 보이며 다채로운 색상으로 지면을 채우더라도 가볍게 뜨지 않고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다.

또한 색감을 마주 대할 때마다 달리 새롭게 색각(色覺)이 피어나는 오묘한 마력을 지닌다. 위 그림 속 3개의 바위섬이 갈색과 연록색, 파란색으로 구분되어 있으면서도 친한 벗들이 어깨동무하듯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파도의 대가답게 김성근의 파도는 마치 동양화와 서양화의 장점만을 잘 섞어놓은 듯 색감과 질감, 파도의 역동성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송도의 파도는 큰 덩어리감과 잘게 부서지는 물보라가 사실보다 생생한 어울림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인 구도의 조합이 파도의 역동미를 잘 잡아주고 있다.

김성근 화가의 '파도'(60호 2007년)
김성근 화가의 '파도'(60호 2007년)

▲ 파도(60호 2007년)

김성근의 파도그림에는 3가지 유형이 있다. 먼저 맑은 날씨에 파도가 뭉게구름 형상의 거대한 기세로 대지를 정복하듯 하얀 버섯구름을 일으키며 휩쓸고 지나가는 유형이다. 두 번째는 흐리고 비바람이 치는 날 용이 바다속에서 용솟음쳐 나와 바다를 휘젓고 가로지르며 승천을 위해 격랑을 일으키는 모양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파도의 소용돌이 주변에는 커다란 용의 갈기가 휘날리고 거대한 새들의 날개짓이 펄럭이는 것처럼 파도가 춤을 추고 공중제비를 돌며 휘몰아치는 형상이다.

마지막으로는 창칼의 예리한 끝과 칼날의 서슬퍼런 면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바위를 내리쳐 파편을 튀기며 산산히 부수는 형국이다. 비유컨대 창공에서 먹이를 포획하기 위해 독수리가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치켜 들고 목표물로 돌진하는 듯 일촉즉발의 긴장된 장면이 연출된다. 위 그림은 마지막 표현 구도이다.

김성근의 드세고 성난 파도의 기세에 그 어떤 다른 화가의 파도가 맞설 수 있을까? 사실 보다 더 매섭고 섬뜩한 사실주의는 표현주의와 상징주의에 가깝다. 이것을 사실주의라 부르는 것은 피상적이다. 환상적인 사실주의의 진수는 자신의 꿈과 기백의 나래를 펼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부서지는 파도의 파편은 역채색의 기법이 도입된다. 어쩌면 이 장면에서 이런 표현 기법이 구사되지 않는다면 그림의 형세가 확장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실체의 정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하얀 여백의 주변부에 입체감과 질감의 외피를 채색함으로써 여백 자체가 힘을 받아 생동하는 독립적 부분의 그림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눈보라 등을 표현할 때도 유사한 표현방식이 전개되는데, 북한 조선화에서 자주 적용되는 기법이다.

이 김성근의 파도는 한 분야의 대가가 입신의 경지에 오른 듯 물오른 기교를 엿볼 수 있으며, 마치 아방가르드(avantgarde)한 느낌마저 감지된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파도가 아닌 마치 어디론가 끊임없이 솟구쳐 부서져서 또 다른 ‘파괴적 변화’를 꾀하는 듯한 전위적인 묘사가 압권이다.

김성근 화가의 '총석정의 파도' (120호 2012년)
김성근 화가의 '총석정의 파도' (120호 2012년)

▲ 총석정의 파도(120호 2012년)

바다가 성내는 대청소날은 시끌벅적하고 요란하다. 바다는 성이 나면 기존의 물살을 세게하여 씻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바닥과 표면의 물길을 서로 뒤집어 엎고 뒤섞어 멀리 보내기를 쉴새 없이 반복해야 직성이 풀린다.

하늘의 노여움을 가장 잘 대변하고 표현해주는 전령사는 바다이다. 그런데 바다는 하늘의 명령을 수행할 때 태풍을 동반하여 그의 힘을 빌려 거사를 도모한다. 이 둘이 연합할 때면 하늘의 무시무시하고 난폭한 힘과 지령의 실체를 깨닫고 운명을 맡겨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땅거미가 지면서 번개와 천둥이 내리치기 시작하는 이른 저녁에 하늘의 번개들은 산발한 귀신같이 하늘에 머리카락을 쭈삣쭈삣 세우고 흩날리기도 하면서 공포과 괴기스러운 분위기로 감전시키고 있다.

이제부터 폭풍전야의 시동을 거는 파도의 잽이 강타되고 있다. 훈련할 때 날리는 잽 치고는 너무 속사포 같아서 강펀치같은 느낌의 파도가 전면의 화면을 으스스하게 장식하고 있다.

바다 빛깔은 총석정의 검은 돌기둥 석벽들의 그림자와 함께 땅거미가 내려앉는 어둠의 색깔로 물들어가는 중이다. 한편 부서지는 파도의 거대한 하얀 포말들이 웅장한 설산처럼 등장하면서 어둠의 분위기를 밝게 잠식 중이기도 하다.

연록색과 청록색을 머금은 검푸른 파도들은 각자의 세력들을 연이어 봉기시켜 총석정을 향하여 기습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육지 부근에서 백색 연합군으로 합류하여 거센 포효와 환호성을 내지르고 거침없는 진군의 메아리를 울려 퍼뜨리며 상륙 중인 것이다.

김성근의 파도는 바람을 가르며 갈기를 휘날리는 신비로운 환상의 준마처럼 느껴진다. 저 멀리서 서서히 고요한 몸짓으로 다가오는 듯하다가 해안가로 임박해서는 급격하게 존재감이 팽창된다.

김성근의 파도 빛깔은 고려청자의 비취색이나 녹색의 옥빛처럼 맑고 우아하며, 고상하고 귀태나는 파도의 자태가 떠도는 빛들을 흡수하며 푸른 초록 빛깔의 파노라마를 일으킨다. 청록빛과 녹청색의 농담과 명암 속에 물들은 파도의 오묘하고 영롱한 색감은 감상자의 시선을 황홀경에 잠기게 한다.

때로는 진한 초록색의 포인트를 강조하면서도 은은하고 속살이 비칠 듯 맑고 투명한 파도 물결의 다채로운 색깔은 조선화에서 색의 미감을 현란하게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는 표본이다.

김성근 화가
김성근 화가

◇김성근(1947.7~2020.5)은 누구인가?

2020년 5월에 작고한 것으로 확인된 김성근 화가는 북한 조선화의 큰 별이었다. 그는 북한을 대표하는 화가 중에서도 유독 파도라는 주제에 천착하여 그의 대표작들을 파도 작품으로 대부분 형상하였다. 대개 자본주의 국가의 인기 작가들이 상업적 목적으로 한가지 특정 주제의 작품들만을 양산하는 경향이 있는데, 김성근도 어찌보면 이런 성향에 해당된다.

다만 차별적으로 다른 점은 그 파도의 형상들이 너무나 다양하게 격정적이어서 도식적이고 상업적 느낌으로 와닿지 않는다는 점이다. 매번 다른 색무늬로 변신하는 문어나 부단히 색다른 감촉의 촉수로 움직이는 말미잘처럼 말이다.

화조화의 정창모, 진채세화의 선우영, 호랑이화의 리률선, 파도화의 김성근, 인물화의 김성민, 몰골풍경화의 김상직, 산맥화의 최창호를 현대의 7대 조선화가라고 꼽고 싶다. 이중 김성민과 최창호만이 현역에서 아직 맹렬하게 활동 중이고 나머지 분들은 다 하늘나라에 계신다. 이제는 위의 생존 작가들도 포함하여 이분들 모두 전설적인 영웅 화가로서 추앙되고 대접받는 작가들이 되어 있다. 또한 이분들 모두 단지 북한 국적에 한정된 국보급화가의 명성만으로 머무르지 않고 전세계적인 화가들로 평가받고 자리매김할 날들이 머지 않았다.

위 7대 조선화가 작고 작가 중 가장 강렬하고 인상적인 화풍의 화가가 김성근이고 북한의 강인한 기상과 솟아오르고 넘치는 힘을 표현한 작가로 대변될 것이다. 그 파도의 기세에는 세상의 먼지와 오염을 시원하게 쓸어내고 새롭고 깨끗한 비움의 공간을 끊임없이 창출할 것 같은 에너지가 쉴새 없이 밀어닥친다.

이렇듯 김성근은 북한에서 그들의 불퇴전의 힘과 기상을 거친 파도라는 상징을 통하여 가장 잘 현시하는 조선화가이다. 그가 숨을 거두더라도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노할 때면 언제나 파도의 화가 김성근의 영혼을 불러내어 만인의 기억을 흔들어 깨워 그를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할 것이다.

북한에서 외국 원수들 혹은 국빈들을 맞이하여 기념 촬영시 영빈관에 어김 없이 배경화면으로 등장하는 그림이 김성근의 파도이다. 이 대형 파도가 북한의 기상과 꿈, 그리고 자부심을 상징하는 그림이라고 자랑삼아 과시하려는 듯하다.

북한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인사라면 북한을 가장 잘 대표하는 개성적인 화가로 자리잡은 김성근 작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온 세상을 삼켜버리고 요동치게 하는 힘을 상징하는 파도의 화가로서 북한 미술계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표현된 김성근에 대한 평가이다. “김성근은 바다를 형상하면서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가 아니라 부단히 움직이며 변하는 바다, 격랑을 일으키며 솟구치는 파도, 폭풍일며 광란하는 파도를 기본으로 형상하고 있다. 변화무쌍한 파도의 다양한 양상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바다속의 미묘한 상태가 대상에 맞게 효과적으로 살려쓴 안채(여러가지 안료를 섞어서 얻어낸 색채)와 색채의 생동한 묘사력으로 하여 비상한 현실감을 자아낸다.”

김성근의 파도그림 중 대걸작으로 평가받는 ‘해금강의 파도’에 대한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의 예찬이다. “<해금강의 파도>는 세찬 물갈기를 날리며 노호하는 해금강의 거세찬 파도를 시대적 정서가 느껴지도록 생동하게 형상한 명작이다. 보기드문 큰 화면을 꽉 채우며 물보라를 날리는 키높은 파도의 거대하고 기운찬 모습은 진할 줄 모르는 힘과 열정을 가지고 시련과 난관을 맞받아 뚫고 나가는 우리 인민의 강인한 의지와 필승의 신념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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