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폭포'...폭포 주변의 자연미와 역사 숨결 간직한 유적의 인공미가 조화 이뤄
'선죽교'...다채로운 그림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공존
'성균관'... 건물과 함께 삼등분된 공간의 나무들 생동감 불어넣어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황태년 화가의 '유원지의 하루'(50호 1995년)
황태년 화가의 '유원지의 하루'(50호 1995년)

▲유원지의 하루(50호 1995년)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 위치한 박연폭포는 잘 알려진대로 대유학자 서경덕과 예술인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로 유명하다. 한 나라의 수도에 이토록 신비로운 절경이 자리해 있다는 것은 그 수도의 백성들에게 커다란 축복이었을 것이다. 북한 개성을 관광한 남한사람들에게 설문조사 결과, 박연폭포를 다녀온 것이 가장 인상에 남는 추억이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전쟁 휴전협정시 휴전선 획정에서 강원도 땅 일부를 받고 6.25 이전에 남한 지역이었던 개성을 내어준 것은, 남한측 입장에서 볼 때 지리적이고 전략적 측면에서 뿐만아니라 품고 있었던 고려의 상징적 수도를 내어주는 무형적 손실도 엄청난 결과였다. 이는 당시 남한정부가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되지 못한 뼈아픈 손실을 반영했다.

황해도 개성시 조선미술가동맹 위원장이었던 황태년은 개성에 대한 대한 애정을 여러모로 화폭에 많이도 담았지만, 그 중에서도 그 만큼 박연폭포에 대한 진한 애정과 감성을 표출한 작가는 없을 것이다.

제주도 출신인 화가는 제주도 섬의 지형적 아름다움을 익히 경험한지라 북한에 가서는 유서깊은 사적과 함께 빼어난 경관이 겸비해 깃들어 있는 개성을 월북 후 자기가 정착할 대안지로 물색했다고 보여진다. 이 그림은 박연폭포라는 유원지에 나들이 나온 주민들의 한가로운 이모저모의 행복스런 정경과 함께 유화로서 박연폭포와 그 주변의 전면적인 아름다움을 완벽하고도 황홀하게 표현한 명작이다.

황태년 화가의 '박연폭포'(40호 1991년)
황태년 화가의 '박연폭포'(40호 1991년)

▲박연폭포(40호 1991년)

박연폭포의 폭포수가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은하수가 쏟아지는 듯 아름다우며 그 소리는 천둥소리 처럼 들린다. 물이 수정같이 맑으며 층암절벽이 폭포수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봄에는 진달래, 여름에는 우거진 녹음, 가을에는 단풍 등 계절에 따라 변하는 폭포 주변의 자연미는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유적의 인공미와 함께 조화를 이루며 방문객에게 꿈결같은 추억과 낭만을 선사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의 역사를 꿰고 있음직한 아름드리 단풍진 나무는 햇빛을 투과하기도 하고 머금기도 하면서 알록달록 황금빛 화장을 하고서는 폭포의 무대주변을 시각적으로 매혹하는 무희처럼 단풍잎을 흩날리면서 방문객들에게 시원한 휴양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폭포를 가로질러 무지개가 환영처럼 어른거리며 물보라를 일으키는 폭포수 주변은 청량감을 뿜어내고 있다. 엄마의 손을 잡고 빨리 가자고 채근하는 어린아이, 거대한 고목나무의 그늘에서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망중한을 즐기는 노인, 운치 있는 높은 정자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가족과 계단을 오를 채비를 하고 있는 단란한 가족들 모두는 아이를 가운데 두고서 엄마 아빠가 행여나 아이가 위험할까봐 손을 꽉 잡고 눈을 맞추며 나들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계단 위에서 데이트하는 남녀와 교복을 입고서 누군가를 부르며 찾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속에서 북한의 유원지 풍경이 우리의 그곳과 다를 바 없음을 느끼게 된다. 저 건너 폭포수 물줄기가 퍼져나가 시원함을 만끽하는 바위 위의 행락객들을 부러워하며 머지않아 이 곳이 우리 모두의 유원지가 될 날을 꿈꾸어 본다.

황태년 화가의 '선죽교'(15호 1985년)
황태년 화가의 '선죽교'(15호 1985년)

▲선죽교(15호 1985년)

북한에서는 선죽교에서 사망한 정몽주를 수구보수 세력으로 간주하고 그가 남긴 업적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역사적 평가에는 인색하지만, 표충비 등을 세워 그의 충절만큼은 높이 기리고 있다. 개성관광지의 안내원의 설명에서도 이와 같은 엇갈린 평가가 공존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관광상품으로서 선죽교의 유적의 가치와 수령 중심체제에 대한 충성심 고취 차원에서도 정몽주는 역대 임금이나 최고지도자들에게 주목을 받는 위인이 되어 왔다.

이 그림은 한여름 선죽교와 그 뒤의 비각, 그리고 연못의 풍경이 고즈넉하다. 구도 중앙의 선죽교는 후면의 비각과 좌우측의 'H'형태로 교차되어 있는 돌길과 함께 고색창연한 유적미를 선사하고 있으면서 돌의 외피에는 고려시대 석조물이 간직한 숭고한 역사성으로 세월의 풍파가 묻어 있는 변색조의 마띠에르 효과가 배어나오고 있다. 또한 하늘과 숲, 연꽃과 연못의 자연미가 인공적인 역사 유적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작가의 풍부한 감수성으로 응축하여 담아내고 있다.

이 그림에서도 다채로운 그림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공존하고 있다. 좌측 수양버들 아래 파란 그림자와 선죽교의 회색 그림자, 연못 위 짙은 검은색 그림자와 선죽교를 가리고 있는 전나무의 초록빛 그림자 등에서 작가의 섬세한 숨결과 예민한 촉각이 느껴진다.

황태년 화가의 '성균관'(30호 연대미상)
황태년 화가의 '성균관'(30호 연대미상)

▲ 성균관(30호 연대 미상)

이 그림에서의 명목상 주요 소재는 개성의 성균관이지만, 실제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소재일 뿐이다. 전면 좌우에 아름드리의 웅장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우뚝 포진하면서 성균관의 존재를 감싸안고 있다. 또한 대지와 하늘이 조응하면서 만들어낸 그림자는 대지의 구석구석을 홍건히 적셔주고 있다. 그림자는 대지에 생기를 불어넣어 자신의 존재감을 그득 채움으로써 거목들과 성균관 건물과 함께 구도를 삼등분하여 공간미를 풍성하게 구축하면서 화폭의 생동감을 전파하고 있다.

나무의 수령이 약 450년이라고 추정되고 있는 개성 성균관 느티나무는 북한 천연기념물 제387호로서 6.5m의 높이까지 곧고 미끈하게 자라다가 두 가닥으로 위를 향해 비스듬히 갈라졌으며, 그 위로 9개의 굵은 가지들이 붙어 있어 달걀모양이 되었다. 북한 천연기념물 제386호인 은행나무는 성균관 마당에 두 그루가 서 있는데 수령은 약 5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개성의 성균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이곳의 풍치를 돋워주므로 적극 보호받고 있다고 한다. 그림 속의 나무 밑동에는 하얀색 수성페인트와 석회가 발라져 있는데 이는 흰개미나 해충이 나무 윗부분으로 올라 나무 속을 파먹지 못하도록 하는 해충방지 효과와 겨울 추위로부터의 동해방지, 특정 나무를 표시하는 장식의 다목적 효과를 갖는다고 한다.

황태년 화가
황태년 화가

◇황태년(1927~1996)은 누구인가?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아래와 같이 인용 요약하였다. “제주도 구좌면 서김영리에 있는 해녀의 가정에서 출생한 그는 1935년 김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청진에서 동일인쇄소 노동자, 청진공락영화관 견습공으로 해방될 때까지 노동하였다. 1945년 10월 이후 청진민예사 간판점, 청진제강소, 함경북도미술제작소에서 직관원, 제작원으로 1954년까지 활동하였다.

황태년은 정열적인 창작가였다. 미술은 그의 생활의 전부라고 할만치 그의 모든 사색과 활동은 미술과만 관련되어 있다. 고향을 제주도에 둔 사람으로서 바다생활과 관련한 주제는 어린 시절의 가슴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던 그에게서 한시도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바다는 눈에 익은 자연이었던 만큼 비교적 그의 그림에서 형상의 폭과 깊이가 보장되었다. 1954년 유화 <바다의 환호>가 국가미술전람회에서 2등상을 받는 것을 계기로 그는 1955년부터 조선미술가동맹 함경북도위원회 현역미술가로 활동하였고 1963년부터는 조선미술가동맹 개성시위원장으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적극적인 창작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개성에서 20여년간 터를 닦으면서 개성시의 문화유적들과 특이한 자연풍경들을 화폭에 담았는 바 이 시기에 와서 그의 새로운 개성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철길은 이어져야 한다>, <성균관의 가을>, <노을비낀 산정리>, <개성의 옛거리> 등 풍경들에서 그는 원숙한 색채 표현으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 아름다움과 심오한 뜻을 깊이 있게 그려내었다.”

황태년의 그림에는 형형색색의 그림자가 살아 꿈틀거린다. 그림자마다에 고유의 색깔이 있다는 인상파의 색채 미학은 북한 화단의 화풍에도 여지 없이 녹아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황태년의 풍경화에는 그림자의 알록달록한 하늘거림이 인상 깊다. 그림자의 동태로 보아 한여름의 눈부신 햇살이 대지에 자신의 맑은 자태를 드리우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빛의 존재감을 미학적으로 선사받아 그 감명과 영감을 화폭에 옮기기 위해 애쓴 선구자 화가들이 인상파라고 할 때, 실상 그 이후의 거의 모든 풍경화가들은 그들의 태생적 후예들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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