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 아버지'...어린시절 아버지가 환생한 듯 생생한 느낌
'엿장수가 왔다'...추억의 이야기 복주머니, 동화같은 풍경
'봄나드리(신양 옛 풍경)...두 남녀와 소를 중심으로 생동적인 장면 연출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백학훈 화가의 '마음도 가볍게' (2006년,20호)
백학훈 화가의 '마음도 가볍게' (2006년,20호)

▲마음도 가볍게(2006년, 20호)

20세기까지만 해도 제일 쉽고 자연스러웠던 남녀간의 교제에서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애정의 개인사는 21세기에 이르러 제일 어렵고 복잡한 과정의 국가적 숙제가 되어 버렸다. 남녀간의 교제와 결혼과 출산 문제는 20여년 전부터 그에 관한 진행의 지체와 교착 현상이 특별히 심화된 느낌이다.

이 그림에서처럼 이전 세대는 남녀간 애정의 싹트임에 대해 좀더 순수하면서도 솔직하고 낭만적인 표현이 가능했던 세대였다. 환희와 화기(和氣)가 발그레한 얼굴 표정에 가득한 그림 속 젊은 남녀의 미래에는 열정과 희망이 샘솟는 듯 보인다. 21세에 교수가 된 천재화가의 부드럽고 사뿐한 붓질로 건강하고 아리따운 미남미녀가 마치 선녀와 나무꾼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근경 바위들의 선묘법(일명 백묘법-윤곽선으로만 외형 묘사), 주인공 남녀의 쌍구법(일명 구륵법-윤곽선 내 색칠), 원경의 산과 나무들의 몰골법(일명 단붓질법-윤곽선 없이 농담으로만 표현) 기법이 자유자재로 자연스럽게 혼융되어 있다. 북한의 '선묘법'은 남한의 '백묘법'과 '구륵법'의 범주를 아우르고, '몰골법' 용어는 남북한이 함께 사용한다.

고도로 발달된 사회이고 삶의 조건이 편안하고 쾌적해졌다고 현대인들은 주장하지만, 국가와 사회의 기초인 가정을 꾸리는 문제에 당면하면 구성원 모두가 자신 없어 하고 한발 물러나 머뭇거리며 깊은 고민에 빠지면서 차일피일 장고(長考)의 시간을 흘려보내기 일쑤다. 최근에 이를수록 결혼의 조건이 더 까다로와 졌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런 힘겹고 거추장스러운 과정을 굳이 짊어지기를 회피하고 이를 버거워하는 무기력증의 수렁에 빠진 것 같다.

대한민국은 결혼과 출산의 기피로 인한 세계 최저 출산률 국가군으로 추락하면서 절체절명의 인구 급감 절벽의 위기에 처해 있다. 많은 미래학자들은 한국이 이대로 방치되면 성장동력을 상실하여 급속도로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해체와 나라의 패망까지 걱정하고 있다.

국가적 대수술을 집행할 수 있는 명의(名醫) 지도자가 나와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결혼과 출산 문제의 가닥을 추스르며 일대 분위기 반전을 가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새로운 베이비붐 세대를 만들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부터 대통령 후보 허경영은 결혼하는 신혼 부부에게 1억원을 주고 출산시 3천만원을 준다는 공약을 하여 사람들로부터 허황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오히려 결혼시 2억원의 주택 자금을 무이자로 지원하겠다는 공약을 현재 실정에 맞추어 추가하고 있고 출산장려금을 5천만원으로 올렸다.

그만큼 지금 상황은 자식들의 결혼을 책임져야 하는 부모 세대마저 노후 삶이 악화일로 상태에서 보장받기 어렵고 5포 세대인 젊은이들은 자살률 1위 국가에서 제 한몸 먹고 살기도 갈수록 힘들어졌다는 사정에 기인한다. 노인들에 대한 자발적 공경심과 젊은이들에게 삶의 의욕을 고취하고 전폭적인 국가적 지원이 국가와 민족을 살린다는 전제 하에 혁명적인 마인드로 과감한 국가적 지원이 충족되어야 희망의 미래 비젼을 비출 수 있는 실마리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판단된다.

백학훈 화가의 '애주가 아버지'(20호 2006년
백학훈 화가의 '애주가 아버지'(20호 2006년

▲애주가 아버지(20호 2006년)

백학훈의 이 그림은 재미있는 동화같은 명랑한 그림인데, 보면 볼수록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난 어린시절 아버지가 그대로 환생한 듯한 생생한 느낌이 전달된다. 우리네 아버지들은 힘겹고 치열한 삶의 궤적 속에 고인 땀과 눈물을 뒤로 하고 항상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산타 같은 존재였다.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이면 사랑하는 자녀에게 그림에서와 같은 목마 행렬과 뽀뽀 세례가 정신없이 이어지곤 한다. 과묵하고 엄숙했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자취를 감추고 장난기어린 수호천사로서 자식들을 향한 애정의 본색이 여지없이 쏟아지곤 하였다.

애주가 아버지가 떠들썩하게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올 적에 부인은 그리 늦지 않게 당도한 남편에 대한 안도감을 가졌으나, 어린 자식을 무등 태운 남편의 비틀거림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남편의 목 위에 걸터앉은 아기를 손으로 받쳐 들고 행복감에 사로잡히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스러워하고 있다.

집에서 무심히 놀고 있던 닭들은 흔들거리는 아버지의 취중 동작에 행여나 밟힐세라 화들짝 놀라 쏜살같이 달아나고 있다. 영리한 강아지는 이런 모습에 익숙했던지 물끄러미 현 상황을 주시하며 당황하지 않고 조심스레 별다른 일이 없기를 바라는 눈치이다.

백학훈 화가의 '엿장수가 왔다'(20호 2006년)
백학훈 화가의 '엿장수가 왔다'(20호 2006년)

▲엿장수가 왔다(20호 2006년)

엿장수가 함박 미소를 지으며 마을 어귀에 등장했다. 엿장수 아저씨는 가위질 소리와 ‘엿 사세요’를 반복하여 외치며 꼬마 손님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사탕과 쵸콜렛이 없던 시절에 엿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인기 군것질 거리였다.

동네 아이들은 한결같이 엿장수 아저씨를 행여나 놓칠세라 그를 귀한 손님처럼 반겨 맞으며 복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엿을 사먹으려고 모여들고 있다. 나이 어린 아이들은 엄마를 졸라 대동하고 나오거나 형과 언니 손을 잡아 끌고서 혹은 업힌 채로 나와서 엿을 사먹고 있다.

돈이 없는 아이들은 집에서 못쓰는 물건이나 폐품 등을 가지고 나와서 엿으로 바꿔달라고 하면 인심 좋은 엿장수 아저씨가 엿으로 바꿔 나눠 주셨던 추억이 떠오른다. 이처럼 엿장수는 동네 마을 어린이들에게 사시장철 방문하여 웃음꽃을 피우게 하고 추억을 선물하는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백학훈의 삽화 형식의 조선화는 참으로 정겹고 따스한 이야기가 넘쳐 흐른다. 그의 그림은 이야기 복주머니다. 그림을 펼쳐 놓으면 그 옛날의 어린시절 추억의 이야기 보따리가 펼쳐진다. 형형색색 소박한 한복 차림의 사람들은 우리 선대의 질박한 삶의 모습 그대로이다. 옛시절의 마을의 온기를 모으고 활기가 샘솟는 실제 단막극의 재현이며 풍성한 인심을 나누고 이야기 꽃을 피우는 동화 같은 풍경인 것이다.

그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무엇이 부족하고 성에 안차서 엄마에게 떼를 쓰며 우는 아이,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서 일어나라고 타이르는 어머니, 형의 손을 잡고서 숨가쁘게 이제 막 도착하여 엿을 사먹으려는 아이, 엿을 사서 언니 손을 잡고 한창 엿을 빨아 먹고 있는 동생, 어린 동생을 업고서 물끄러미 엿장수를 바라보며 어찌 할까를 궁리해 보는 누나, 바둑이와 함께 나와서 막 엿을 손에 건네받는 아이와 자기에게도 좀 달라며 아이에게 달라붙는 바둑이, 조금 큰 녀석들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엿을 사서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평양의 외화 상점에서는 가락지빵(도넛), 설기과자(카스테라), 애기과자(우유과자), 과일단물(주스) 등을 판매하고 있다. 덕분에 상류층 어린이들은 외화 상점에서 파는 우유, 고급빵, 쏘시지, 사탕, 과자, 주스를 간식으로 먹을 수 있다.

반면 보통의 북한 어린이들의 간식거리로는 지짐(부침개), 빵, 떡, 강냉이 알튀기(옥수수 뻥튀기), 강냉이 펑펑이(옥수수 과자의 일종), 국수, 고구마, 삶은 옥수수, 가마치(누룽지) 등이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기 전 북한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우유와 과일 같은 간식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에게 주던 우유와 과일 같은 간식은 옥수수 뻥튀기 정도로 바뀌었다가 평양을 제외하고는 그것마저도 사라졌다고 매체는 전한다.

북한 화가들에게 있어 그림의 소재는 대개 일상 속에서 채취된다. 주제화 분야는 근로 현장에서의 인상적인 발견과 역사적 중요 대목에 대한 상상력에 의해 그 소재가 포착되어 각자의 주제의식의 발로와 융합되면서 소재의 표현 방식과 형태가 다각화된다.

사실 이 분야에 대한 창의력과 구성력은 남한을 비롯한 자유세계의 작가들이 그에 대한 고민과 사색이 훨씬 덜하기 때문에 그들과 대비되면 역사성의 빈곤과 일상성의 소박미에 대한 감성이 오히려 현저히 부족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한편 북한에서는 일상 생활의 소재에 있어 다른 세계의 화가들이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누드 분야와 추상화 분야가 우선 배척되고 반국가주의적인 표현도 물론 금지된다. 그렇지만 북한 조선화에 고유한 추상적 몰골기법에 의한 추상 표현주의는 예외이다.

이러한 제약 때문에 북한 화가들은 평이한 일상미에 대해 깊은 관조와 천착이 뒤따른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아니 망각하거나 잃어버린 정서를 그들은 마치 옛사람들처럼 훨씬 더 순수하게 보유하고 있다.

백학훈 화가의 '봄나드리(신양 옛 풍경)' (50호 2006년)
백학훈 화가의 '봄나드리(신양 옛 풍경)' (50호 2006년)

▲봄나드리(신양 옛 풍경) (50호 2006년)

꿈결같은 풍경이 ‘신양’이라는 지명의 경치 속에 녹아 있다. 만약 이 풍광의 중앙에 사람과 소라는 생명체가 없었으면 깊은 산 속의 절경을 감상하는데 그쳤을 것이다. 그야말로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광경이 펼쳐지면서 두 사람과 소를 중심으로 생동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사나이는 여인을 업고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겠지만, 더욱 편하고 안전한 여정을 위하여 제법 시간이 소요되는 여행 길에 소 등위에 자신의 각시가 될 여인을 태워 개선장군처럼 행차하고 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이 처자를 소개하려는 부푼 기대를 안고서 말이다. 개울 중앙의 돌다리를 건널 때가 되어 더욱 안전성을 확인하면서 뒤를 돌아보며 여인과 소와 교감하려는 사나이는 조심스럽게 힘을 주어 걷고 있다. 여인에게는 어떤 황금마차도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은 한 손으로는 소 등을 잡고 두 다리를 모으고 한쪽으로 내린 품이 다소곳해 보이면서 여차하면 언제라도 두 팔을 벌리고 내려와 사나이에게 안길 수 있는 태세다. 그림을 좀 안다하는 어떤 이에게는 이 그림이 소위 이발소 그림으로 비춰질 수 있다. 섬세한 묘사 속에 회화적으로는 특별한 현대적인 터치가 보이지 않는 소위 쫑쫑이 그림이라는 비하 섞인 표현을 곁들여 말이다. 그림이 안겨주는 아련한 감동과 몰아적인 흡인력의 효과는 아무 그림에서나 발생되는 것은 아니다.

화가 자신의 풍부한 감수성과 공감능력이 사실주의 화풍의 유화에서건 속도감 있는 필치의 조선화에서건 가리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펼쳐지는 것은 그림의 형식은 부차적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대목인 것이다. 어떤 이가 사실주의 화풍의 그림을 무턱대고 한 수 아래인 것처럼 비하하는 것은 북한 미술계가 가장 혐오하는 형식주의에 매몰된 관점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만약 이런 그림을 건 이발소가 있다면 그 곳은 명소가 될 것이다.

그것도 북한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해학적인 회화가인 거장 백한훈의 유화가 걸려 있다는 소문이 돌면 그 자체로 상당한 광고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지난 안동 북한미술 전시회에서도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그림 중 하나였다. 산 중의 아늑한 계곡물 속에는 사람들의 산뜻한 옷차림과 연록색의 나무 그림자가 훤히 비치고 물속의 바위가 드러나 있어 참으로 맑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걷다가 무더위에 지치면 목욕이라도 하고 갈 수 있는 그런 휴식의 장소처럼 보인다.

소와 여인을 가진 사나이는 세상을 다 품어 안은 듯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뿌듯해 보인다. 그의 나들이 행보는 가장 경쾌하고 신이 나서 그의 앞길에는 그 어떤 장애도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

백학훈 화가 
백학훈 화가 

◇백학훈(1938-작고?)은 누구인가?

백학훈은 익살스럽고 옛 추억이 서린 해학적인 그림을 잘 그린다. 어린시절의 동심의 세계를 펼쳐 보임으로써 부자유스럽고 통제된 당시의 세태를 풍자한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의 자유와 낭만의 놀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불간섭과 불가침의 영역이기도 하고, 한때 현실이었던 그 이상세계를 화폭에 담을 수 있는 것은 화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백학훈은 1938년 함경북도 선봉군 성봉읍 출생하여 1959년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하고 21세의 나이로 대학 교단에 서게된다. 평양미술대학 회화학부를 졸업 졸업작품으로 장편소설(력사)를 삽화로 그렸는데 국가미술전람회에서 2등을 하게 된다.

그 후 많은 예술 삽화는 단색 또는 백묘 방법으로 그려졌는데 인물의 행동과 성격표현이 빈틈없는 소묘와 필력으로 그려져 자연스럽고 선명하다. 그는 수많은 혁명적 역사적 그림을 그렸으며 삽화 뿐만아니라 조선화, 유화, 선전화 판화, 수채화 등 모든 그림에 정통한 천재화가이다. 여러점이 국가미술전람회에 입상하였으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96년까지 출판화분과 위원장, 90년부터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집행위원, 국가작품심의 위원회분과 및 종합심의위원, 국제조형예술협회 민족미술위원회 집행위원이다. 1977년 공훈예술가, 1986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수여받았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는 “그의 삽화는 소설의 장면들과 밀착된 인간성격과 행동묘사, 정황묘사로 하여 매우 흥미진진하며 작가가 작품에서 제기할 수 없었던 직관적 표상을 생동하게 펼쳐낸 것으로 하여 소설의 내용을 비상히 풍부화 해주고 있다.

특히 삽화는 당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고찰, 확인된 의상과 생활도구의 묘사로 하여 진실성을 담보하고 있으며 인물의 행동과 성격표현이 빈틈없는 소묘와 필력으로 선명하게 그려져 매우 자연스럽고 명확하다. 그는 삽화 형상의 예술적 심도에 있어서 북한의 삽화예술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높은 경지를 확고히 개척하였다.” 라고 평하고 있다.

또한 “백학훈은 세계가 공인하는 출판미술가일 뿐만 아니라 조선화, 유화 등 회화 작품 창작에서도 높은 기량을 소유하고 있는 미술가이다. 그는 그 어느 미술가 보다 현실에 대한 조형적 파악이 깊고 직관적 표상과 형상능력이 높은 것으로 미술계에서 공인되고 있는 수재형의 미술가이다.

백학훈의 예술 삽화는 일반 회화 형식에서 도달된 높이의 수준에서 그 질적 형상이 확고히 담보되었다. 화면의 구성과 색채 표현, 기술적 처리에서는 단독작품처럼 완성도가 높다.

이것은 이 그림책들이 우리나라 삽화 예술 발전의 새로운 높은 단계를 열어놓은 또하나의 창작적 성과로 된다. 예술삽화는 단순히 소설의 내용을 기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언어적 수단을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을 생동한 직관적 언어로 형상을 재창조하는데 있다.

이러한 삽화예술 창조의 요구에 맞게 그는 소설을 통하여 보고 느낄 수 없었던 인간관계의 행동적 변화와 심리, 구체적 정황과 환경을 풍부하고 다면적인 직관적 형상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삽화의 예술적 풍격을 더 높였다.

또한 형상을 세련시키고 완성도를 높임으로써 삽화의 문화성과 정서성을 일층 제고하였고 다채로운 색채로 형상함으로써 현실 반영의 생동성과 진실성을 보다 확고히 담보하였다.”라고 그의 화재(畵才)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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