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1912년생 동갑 호네커, 1994년 5월 29일 망명지 칠레에서 객사
그해 7월 8일 돈독한 형제애 과시하듯 김일성도 눈을 감았다

동갑내기 친구로 알려진 김일성과 호네커는 살아생전 죽이 잘 맞았다. 사진은 1984년 두사람이 만나는 장면 [사진=PICTURE-ALLINCE/ZB]
동갑내기 친구로 알려진 김일성과 호네커는 살아생전 죽이 잘 맞았다. 사진은 1984년 두사람이 만나는 장면 [사진=PICTURE-ALLINCE/ZB]

【뉴스퀘스트=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 34년 전 10월 18일 동독 독재자 에리히 호네커가 물러났다. 두들겨 패고 잡아 가둬도 개혁·개방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함성이 전국으로 번지는 상황이었다. 당국의 공식 발표는 건강상의 이유로 그가 동독 공산당 총서기, 국가평의회 의장, 국방위원회 위원장 직위의 사임을 요청했고,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전날 10월 17일 정치국회의에서 축출되었다. 숨 막히는 극적 ‘궁정 쿠데타’가 막후에서 기획되고 전광석화처럼 진행되었다.

“에리히, 더 이상은 안 돼. 너는 가야 해”, 18년 전 국가수반 발터 울브리히트를 권좌에서 밀어낼 때 호네커 자신이 했던 말을 그 스스로 들어야 했다. 그것도 그의 권력 장악 기회를 제공했던, 1970년 3월 19일 서독 빌리 브란트 수상과 역사적인 첫 정상회담을 했던 총리 빌리 슈토프의 입에서였다.

당시 독·독 정상회담을 가장 반대했던 이가 호네커였다. 정상회담에 구름같이 운집한 동독 주민들이 ‘빌리 빌리’를 외치며 통제 불가능하게 환호했고, 그 장면이 전 세계에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졌다.

물론 빌리는 슈토프가 아닌 브란트였다. 정상회담을 통해 서독과 다른 별개의 주권국가임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인정받으려 계획했던 동독에 큰 차질이었다. 이를 빌미로 호네커는 이듬해 울브리히트 자리를 차지했다.

무혈쿠데타의 구심점은 호네커가 황태자로 키운 권력 2인자, 국가평의회 부의장 에곤 크렌츠였다. 망설이는 그를 움직인 것은 호네커의 운명이 아니라 동독의 운명을 위해 결단해야 한다고 속삭인 국가계획위원장이자 정치국원 게르하르트 쉬러, 정치국원이자 동베를린 공산당 제1서기 귄터 샤보프스키, 정치국원이자 노조연합위원장 해리 티쉬, 다시 총리를 맡고 있던 슈토프, 칼맑스시 공산당 제1서기 지그프리드 로렌츠 등이었다.

거사 성공의 열쇠는 비밀경찰 슈타지(Stasi)였다. “달리 생각하는 자가 바로 반역자다”를 구호로 삼은 슈타지가 가담하지 않는 한 처형을 각오해야 한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주민들의 시위를 막으라 명령했으나, 동요 현장을 실시간으로 체감한 슈타지 수장 에리히 밀케가 머리를 굴렸다, 호네커를 독단적이라 비난하며 동참했다. 공산당 중앙위 보안담당 볼프강 헤르거도 따랐다.

정치국원의 다수를 확보한 거사파의 마지막 관건은 대형(大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승인이었다. 그가 권력 변화를 거부하고 소련군을 움직인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불과 며칠 전,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을 축하차 방문한 고르바초프의 행동이었다. 6일 그는 동독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개선문 앞에서, 수많은 동독 주민에 둘러싸인 가운데 서독을 포함한 서방 미디어에, 공개적으로 “나는 삶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위험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습니다”는 발언이 생중계 되었다. 호네커와의 정상회담에서는 “너무 늦게 오는 자를 삶은 심판할 것이다”라며 변화를 촉구했다고 알려졌다.

호네커는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을 수정사회주의로 비판하고, 자신의 권력에 대한 침해로 간주했다. 루마이나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북한의 연형묵을 포함해 건국절 행사에 참석한 정상들에게 ‘사회주의권 단합’을 강조하며, 맑스와 엥겔스의 고향인 독일 땅에서 사회주의는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그리고 7일 “전진만이 있을 뿐, 후퇴란 없다”(Vorwärts immer, rückwärts nimmer)를 외쳤다.

쿠데타파는 거사 전날 10월 16일, 티쉬를 모스크바에 급파했다. “거사의 성공을 빈다”며 고르바초프의 허가가 떨어졌다. 호네커 운명이 결정되었다.

10월 17일 정치국회의, 건국절 행사에서 받았던 인민군과 주민의 환호를 음미하며 호네커가 느긋이 나타났다. 호네커와 추종자들이 반항할 경우 체포를 위해 밀케가 슈타지 요원들을 대기실에 배치한 상황은 꿈에도 몰랐다.

슈토프의 퇴진 요구를 시발로 호네커가 믿고 또 믿었던, 애절하게 바라보며 반대 토론을 기대했던 동독 최고의 실세들이 돌아섰다. 상황이 바뀌었다, 국민들은 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탱크의 포문을 열 수는 없다, 반박하지 말고 슈토프의 제안을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을 경우 당신의 명예를 먹칠할 정보를 공개하겠다며 자신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밀케까지 나서자 끝이었다.

자신의 퇴진을 결정짓는 투표에 호네커 역시 찬성의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만장일치였다. 두 추종자 선전선동담당 요아힘 헤르만, 경제담당 귄터 밑탁도 잘렸다. 정치국은 즉시 만장일치로 크렌츠를 공산당 총서기로 추대했다.

헌 술을 헌 부대에 부은 격인 크렌츠가 권좌에 머문 기간은 불과 7주, 12월 6일까지였다. 동독 공산당은 격랑에 휩쓸려갔다. 자유와 개혁·개방을 요구하는 인민들에 의해 인민민주주의가 무너져 내렸다.

“장벽은 그 만들어진 조건이 변경되지 않는 한 그대로 유지될 것입니다. 그와 연관된 원인들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50년, 100년 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사회주의 동독과 제국주의 서독 간 통일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가 땅에 떨어진다는 사실만큼 확실하고 분명합니다”는 호네커의 신념들은 역사 앞에 거짓이 되었다.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1912년생으로 김일성과 동갑인 호네커는 1994년 5월 29일 망명지 칠레에서 객사했다. 7월 8일 돈독한 형제애를 과시하듯 김일성도 눈을 감았다. 변화를 거부하고 도망가다 잡혀 198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부인과 함께 총살당한 차우셰스쿠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력 최고사령관 김정은, 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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