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간제 중국 당 중앙정치국 서기 겸 조직부장. 나이나 스펙으로 보면 최고 지도자를 노릴 만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사진제공=신화(新華)통신]
리간제 중국 당 중앙정치국 서기 겸 조직부장. 나이나 스펙으로 보면 최고 지도자를 노릴 만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사진제공=신화(新華)통신]

【뉴스퀘스트=베이징/전순기 통신원】 중국은 테크노크랫(기술 관료)이나 이공계 출신 관료들의 세상이라고 단언해도 무방하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세세한 설명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전, 현 총서기 겸 국가주석인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시진핑(習近平) 등의 대학 전공이 하나 같이 이공계 학과였다는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당 최고 권력기관인 24명 정원의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들의 상당수가 테크노크랫이거나 이공계 출신인 것은 이로 보면 하나 이상할 것이 없다. 이들 중 단연 주목을 모으는 인물은 아마도 가장 나이가 어린 4명 중 한명인 리간제(李干杰. 59) 당 중앙정치국 서기 겸 조직부장이 아닐까 싶다. 칭화(淸華)대학 핵원자로공정과에서 석사 과정까지 마친 후 오랫동안 테크노크랫으로 일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력으로 보면 최고 지도자를 노려볼 만한 위치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시 주석이 3연임만 하고 은퇴할 경우는 진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의 고향인 (湖南)성 창사(長沙)시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는 영재로 유명했다. 성 전체에서 잘 해야 한자리 수 학생들이 합격하는 칭화대학에 가볍게 진학한 것은 하나 이상할 것이 없었다. 대학 측이 이런 인재를 학부생 때부터 주목한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해야 한다. 그가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 최우등의 성적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았나 싶다.

그는 그러나 학교 측과 스승들의 적극적 권유에도 박사 과정에는 진학하지 않았다. 자신의 적성이 학자보다는 관료에 맞는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나 보인다. 석사 학위를 받던 해인 1989년 그가 향한 곳은 국가핵안전국 베이징안전센터였다. 이곳에서 엔지니어로 4년을 일하는 동안에는 쉽게 잡기 어려운 기회도 움켜쥘 수 있었다. 1991년 하반기부터 이듬해 연말까지 프랑스의 핵안전 및 방사선방어연구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학을 마친 후 그는 원래 직장으로 돌아왔다. 스펙이 남부럽지 않은 인재였던 만큼 승진은 빨랐다. 32세 때인 1996년에는 처장이라는 나름 고위직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어에 능통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프랑스 대사관 근무를 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1999년부터 1년 6개월 동안 과학기술 담당 1등 서기관으로 열심히 일한 결과는 역시 승진이었다.

그는 2008년 환경보호부를 거쳐 생태환경부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 국가환경보호총국의 핵안전 및 방사능환경관리사(司. 국에 해당)의 처장(과장)으로 옮긴 2000년 7월에는 관료로서 엄청난 기록도 남긴다. 고작 4개월 만에 부사장(부국장)으로 승진했다면 진짜 이렇게 단언해도 괜찮다. 나이 36세 때였다.

2008년 환경보호부에서 초대 부부장(차관)으로 일한 그는 당시까지 쌓아놓은 엄청난 스펙을 발판으로 2010년 친정인 국가핵안전국 국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테크노크랫으로서는 이룰 것은 다 이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았다. 국가급 정치인으로 변신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도 했다. 2016년 겨우 42세의 나이에 허베이(河北)성 부서기에 발탁되면서 변신의 꿈을 이룬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이후 정치인으로서도 승승장구했다. 2017년 다시 환경보호부로 컴백해 부장(장관) 자리를 꿰차는가 싶더니 3년 후에는 산둥(山東)성 성장에까지 올랐다. 산둥성에서 당 서기까지 마친 그는 2022년 10월 열린 제20차 전국대표대회(매 5년마다의 전당대회)에서 마침내 대망의 정치국 위원 자리까지 거머쥐게 된다. 이어 올해 4월 중앙서기처 서기로 있으면서 당 중앙조직부 부장 자리에도 올랐다.

엄청난 스펙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중국 당정 최고 지도자들 중에서는 단연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핵 및 원자력 분야 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둥성 성장과 서기로 일할 때는 이런 자신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산둥성이 그의 진두지휘 하에 전국 최고의 원전 지방 정부가 된 사실은 이를 무엇보다 확실하게 증명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그는 전공을 떠나 있다고 해야 한다. 당 중앙서기처 서기와 조직부장의 자격으로 고위 간부들의 인사와 당원 교육, 조직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중국 언론의 보도를 종합하면 놀랍게도 이 일도 잘 해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올해 3월 10일의 제1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국회에 해당) 1차 회의 제3차 전체회의에서 서기처 서기 자격으로 사회를 맡아 시 주석의 국가주석 3 연임 당선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분명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시 주석이 사회를 너무 잘 봤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는 것이 중국 언론의 전언이다.

그는 시 주석의 골수 인맥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히 밀접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다. 우선 시 주석과 칭화대 동문이라는 끈끈한 인연으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여기에 시 주석의 3연임을 확정 짓는 20차 당 대회를 앞뒀던 지난해 6월 중앙당교 기관지인 쉐시스바오(學習時報) 1면에 글을 실어 “시 주석의 집권에 박수를 보낸다.”면서 그의 지시를 ‘나침반’, ‘황금열쇠’, ‘지렛대’ 등에 비유해 칭송한 사실 역시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분히 아부조의 헌사이나 시 주석 입장에서는 반대로 생각해야 정상이 아닌가 보인다. 그를 은근히 밀어주면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나이나 스펙으로 볼 때 그는 더 높은 자리를 넘봐도 괜찮다. 충분히 능력도 갖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이 중국 내에서보다는 해외에서 더 많이 나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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