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밀대의 봄'...화려하고 고운 색감과 여성미 넘치는 부드러운 감수성으로 봄 향기에 흠뻑
'련광정의 아침'...눈과 낙엽이 한덩어리가 되어 자연의 일체감을 만끽
'백두산'...남색, 주황색, 흰색 3가지 색감만으로 웅장하고 환상적 느낌의 절경을 묘사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파도의 메아리(208-130)
파도의 메아리(208-130)

▲'파도의 메아리'(208-130 연대미상)

예술은 인간에게 고결한 감정의 고양과 순수한 정서에로의 정화, 크게 중요한 두 가지 순기능을 안겨준다. 미술 분야의 한 축인 사실주의는 안정감 있는 미적인 대상의 재현에 충실하는 특성으로 보아 인간의 정서를 차분하게 가라 앉히고 순수한 정서로의 순화를 촉진한다.

또 다른 축인 추상주의는 표현하기 어려운 영감의 북돋움과 에너지의 진작, 그리고 환희와 격정의 고양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그런데 북한의 조선화는 미묘하게도 이 두가지 축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서 때로는 균형감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갈등관계를 촉발시켜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북한의 사실주의는 조선화라는 영역에서 독특한 개성을 꽃피워왔다. 몰골기법으로 대변되는 수묵 표현주의가 조선화의 사실주의와 불협화음을 야기하면서도 화학적으로 용해되어 기묘한 동거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다차원의 맥락에서 북한의 사실주의는 자연주의에 대해 동지적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사실주의는 진실주의라고 말하려는 듯하고 자연주의는 단지 모방주의일 따름이라고 격하하는 주장을 펼치곤 한다. 북한 조선화에서 묘사의 함축과 내용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북한식 사실주의는 있는 그대로의 재현을 의미하는 생명력 없는 자연주의와는 차별화되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강조한다.

북한식 사실주의에 내포된 추상주의는 마치 이질적인 친구나 배우자감이 상대편에게 자석처럼 이끌려 찰떡 궁합을 이루고 있는 형국이다. 단조로움과 도식성을 탈피하고 상호간의 존재감을 돋보이게 하고 보완을 추동하여 음양의 조화를 구현해가는 양상이다.

다시 말하여 사실주의라는 종래의 한정된 틀만으로 조선화의 주요 특징을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고전적 의미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 전통적인 수묵 추상의 몰골기법이 혼융,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한 조선화는 양식 자체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갈등과 변화를 빚어 왔고 모순의 융화를 다져가는 과정에서 아주 튼튼한 자생력과 자체 구동력을 갖춘 새로운 생명력을 키워나가게 된다. 여기에서도 정반합의 변증법 이론이 여지없이 절묘하게 적용된다.

리창은 관계에 대한 사색이 남달리 깊은 작가이다. 북한에서 그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낙동강 할아버지>는 군인과 민간인(뱃사공 할아버지)의 관계에 천착하여 전쟁에서의 민군간 상호의존성의 절대적 중요성을 일깨운 작품이다. 또한 그의 작품 속에서는 누각 혹은 정자와 자연경관의 조화도 일품이다.

옛성터 위에 걸터 앉은 누각이나 정자에서 풍기는 고풍스러운 인공미를 둘러싼 자연 배경의 아름다움은 상호 보완과 균형을 통한 멋진 가치 상승을 야기시키며, 동시에 인간에게 푸근하고 안락한 쉼터를 제공한다.

이와 함께 리창은 파도와 이끼 낀 바위를 소재로 한 그림도 그의 대표작으로 소화해낸다. 김성근의 파도나 문화춘의 급류 그림 등에서는 물살의 세기와 형상, 그리고 움직임의 급진전 양상 등이 돋보이고 주류를 이루는데 비해, 리창은 파도와 함께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포말 등의 디테일에 주안점을 두어 관전 포인트가 확대된다.

바위 위의 이끼들이 파스텔톤의 연한 군청보라빛의 고상한 느낌으로 점철되어 파편처럼 흩어지는 청보라빛의 물보라 입자들과 유사색을 띠며 공감과 어울림의 절묘한 하모니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함께 파도와 바위간의 역동성 있는 사선형 대칭구도로 파도의 격류에 못지않게 우람한 바위들과 파도와의 격렬한 포옹 장면도 동시에 비중있게 다루었다. 파도와 바위가 뜨겁게 부딪치며 서로 격한 투쟁을 벌이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언제나 파도의 방문을 온몸으로 맞이해야 하는 그들의 숙명적인 관계를 그려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사랑과 증오가 동전의 양면처럼 느껴지듯이 말이다. <파도의 메아리>라는 그림의 제목이 사뭇 시적이고 서정적으로 다가온다. 이 또한 파도가 바위를 통해 그의 메시지와 속삭임을 메아리치럼 전달하고자 하는 간절함과 그리움이 아니겠는가?

을밀대의 봄(120호 연대미상)
을밀대의 봄(120호 연대미상)

▲을밀대의 봄(120호 연대미상)

‘을밀대는 금수산의 을밀봉에 있는 평양성 내성의 북장대로, 6세기 중엽에 처음 건립되었다. 평양성 중 가장 북쪽에 있기 때문에 사방이 트여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한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평양팔경의 하나인 ‘을밀상춘(乙密賞春:을밀대에서 바라보는 봄 경치)‘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을밀대는 ‘을밀선인‘이 자주 하늘에서 내려온 장소 또는 ‘을밀장군(을지문덕 장군의 아들)‘이 싸워서 지켰던 곳이라고 한다.’ 이상은 두산백과를 인용하였다.

그림의 오른쪽 우람한 매화나무 세그루가 삼각형으로 안정감 있게 큰 양산마냥 을밀대 위를 가리며 봄의 삼미신처럼 화면을 압도하며 버티고 서 있다. 그 삼미신에게 노래하고 있는 한쌍의 새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을밀대 언덕을 휘감고 도는 진달래 군단과 작은 매화나무 숲은 성벽의 앞마당을 울긋불긋 경쟁하듯 화사하게 장식하며 봄의 절정미를 두가지 빛깔로 압축하여 합창하고 있다. 을밀대의 지붕색도 진달래에 물들어 분홍빛으로 젖어 있다.

한편 리창의 화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익숙한 키 큰 소나무들이 왼편에 우뚝 서서 창을 들고 호위하고 있는 듯하고 몽글몽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숲의 형상도 빼어나고 멋스럽다. 또한 매화나무와 바위들에 파란 점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어 감각적이고 이채롭다.

이 그림에서 리창은 을밀대로 봄나들이를 나와 그의 작품 중 가장 화려하고 고운 색감과 여성미 넘치는 부드러운 감수성으로 봄 향기에 흠뻑 취해 화폭에 몰입되어 있어 보인다.

련광정의 아침(50호 1991년)
련광정의 아침(50호 1991년)

▲련광정의 아침(50호 1991년)

련광정에 첫눈이 내린 이른 겨울 아침 풍경의 감흥을 따뜻한 정서가 물씬 풍기도록 하면서 눈부실 정도로 환한 아침햇살이 찬란하게 반사되는 광경을 화폭에 담았다. 낙엽이 완전히 물러가기 전 눈꽃들이 몽글몽글 그 위에 사뿐히 내려 앉아 낙엽의 고운 빛깔과 환상적인 조합을 이루고 있는 묘사력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눈과 낙엽이 환상적인 콤비로서 한덩어리가 되어 자연의 일체감을 만끽하게 해준다.

련광정 담벽의 누런 이끼와 노랗게 물든 나뭇잎, 고동색의 바위와 붉은 황토 빛깔의 누각 등의 색감이 단색 계열로 세련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바로 이런 개성과 서정성 넘치는 빼어난 묘사력이 위와 같이 칭찬의 서평을 쏟아내기에 지면이 부족할 정도가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련광정은 평양시 대동문 근처에 위치하고 대동강에 접한 절벽 위에 지어진 고려 이래의 경승지로 관서팔경의 하나이다. 고려의 고명한 시인 김황원이 련광정 풍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위해 온종일 시를 가다듬었지만, 만족할만한 작품을 만들지 못해 울면서 떠났다는 일화가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이 회견을 한 장소이고, 1609년 사신으로서 방문한 명나라 서화가 주지번이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라고 쓴 현판을 걸었다.

백두산(80호, 2005년)
백두산(80호, 2005년)

▲백두산(80호, 2005년)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개성적인 표현은 설경의 하얀 눈을 액션 페인팅처럼 조선화의 발묵법을 자신감 있게 구사하면서 흰 조선화 물감을 때로는 진하고 약하게 농담을 주어가면서 거침없이 흩뿌려 놓은 점이다. 추상표현주의자인 미국의 잭슨 플록의 난잡스러운 액션 페인팅에 비하면 정갈스럽고 고품격이다.

일부 하얀 점을 콕콕 찍어 바른 듯도 보이지만, 주변의 작은 점들이 의도하지 않게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붓에 묻힌 물감에 적신 물을 뿌린 흔적이 역력하다. 대기를 촉촉이 적시며 물방울 기포처럼 눈발을 아롱지게 묘사한 점은 하얀 꽃가루가 흩날리는 듯한 환각을 불러모으며 몽환적인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바람이 이는 듯한 너울거리는 율동감을 일으키며 화면을 살아 숨쉬게 한다.

근경의 나무숲과 대비하여 중경의 들판 및 원경의 하늘은 사선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 다른 한켠의 주홍빛 낙조가 스며드는 하늘빛과 옅은 남색이 결합된 두 보색의 조화는 태극의 어울림처럼 밀착되어 보인다. 맑은 주황색 노을 빛깔은 희미한 남색과 우림(피움) 기법으로 접목되면서 경계가 사라진 혼색을 이루고 있어 그윽한 여백미와 장중한 색채미를 동시에 안겨준다.

주홍빛 하늘이 아련한 공간감을 창출하면서 연남색의 땅거미가 곤색(감색)의 어둠 속으로 잠들기 직전 무렵, 대기의 색채를 설경이 감싸고 하얗게 덧칠하면서 밝게 비추고 있어 삼중주의 색채쇼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가까이에 밀집된 전나무, 소나무, 자작나무들이 조화롭게 구성되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설경의 밀림 숲 장관을 다채롭게 살려내고 있다. 멀리서 보이는 백두산 전경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는 이러한 구도의 그림은 수 많은 북한 화가들이 즐겨 그렸으나 3가지(남색, 주황색, 흰색)의 색감만으로 이처럼 웅장하고 환상적인 느낌의 절경을 묘사한 작품은 흔치 않다.

생존한 리창이 북한의 3대 화가인 정창모, 선우영, 김상직과 더불어 현대 북한의 4대 조선화 화가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이 작품을 통해 비춰 볼 때, 그의 자자한 명성이 결코 허명이 아니라는 실감이 들게 하는데 충분하다.

리창 화가
리창 화가

◇리창(1942~ )은 누구인가?

리창은 고색창연한 인공적 조형미와 자연의 풍광미를 나란히 접목하여 고아하고 환상적인 단짝을 이루는 풍경화가 일품이다. 련광정, 평양성, 을밀대 등을 소재로 한 풍경화들은 깊은 사색이 담겨 있고 품격이 상승되어 문화적 향취가 무르녹아 있다.

대학시절 지도교수이고 개인 교습까지 받았던 정종여와 함께 한 세월 속에서도 그렇고, 대선배 화가 정현웅과 옛성터를 배경으로 한 합작품에서도 그가 화가로서의 무게와 자질, 그리고 권위를 인정받기에 이른다.

리창의 딸 리혜성도 여성스러운 감성이 충만한 실력이 출중한 화가이며 동생 리강도 명망 높은 화가로 활약 중이다. 리창은 강단 있는 풍경화·화조화 전문화가로서 인물의 김성민, 산맥의 최창호, 소나무의 리경남과 함께 현재 북한에서 활약하는 4대 조선화가로 추앙받고 있다.

리창은 40여년간의 창작생활을 통하여 인물화, 풍경화 작품들을 창작하여 국가미술전람회에서 9개의 금메달을 받았고, 수십점의 작품들이 국보로 소장되였다. 아시아와 유럽 여러나라 등에서 개인전과 현지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조선화의 몰골기법과 선묘기법을 현대적 미감에 맞게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유능한 화가이다.

다음은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의 리창 부분을 발췌, 인용하였다. “≪락동강의 할아버지≫, ≪대동문≫ 등 인물화, 풍경화, 화조화의 모든 분야에 능통한 다재, 교육자형의 화가로서 조선화의 전통적 기법들인 몰골, 세화, 진채 등 다양한 형상요소들을 통합 활용할 줄 아는 특기로서 민족회화의 향취를 한층 돋구고 있다.

그는 대학시절 정종여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그후에도 그의 각별한 관심 속에서 창작생활을 하였다. 정종여와 시인이였던 아버지는 친분이 두터웠고 이러한 연고로 정종여는 리창의 창작생활에 대하여 깊은 주의를 돌리였다.

특히 전통적인 조선화 기법을 견지하여 조선화의 고유한 면모를 살려나가도록 요구성을 높였으며 규범을 벗어나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식의 비과학적인 묘사 태도에 대해 엄격히 경계하였다.

정종여 자체가 전통에 치우치면서 현대적 감각을 무시하지 않았고 조선화 분야에서 민감하다할 정도로 새것을 지향하였던 만큼 리창 역시 조선화의 형상 수단과 고유한 기법을 중시하면서 시대적 미감에 맞게 형상적 형식을 따라 세우는데 관심을 돌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들은 어느모로 보나 조선적 느낌이 완연할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볼 때도 시대와 보조를 같이 하고 있다. 리창은 담채형상 방법을 주제화 창작에서 기본으로 들고 나갔는데 화면이 부드럽고 선명한 것은 여기에 많이 기인된다. 리창은 창작가의 본도를 지키면서 다작에 매여달리지 않았다.

보급을 전제로 한 유사한 그림의 제작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만큼 창작을 신중하게 대하였다. 그는 몰골그림에서 일정한 품격을 가지고 있다. 몰골기법으로 풍경, 화조 등을 그렸는데 필력이 느껴진다. 연마된 기술로서 정리되고 세련된 수준 있고 문화성이 높은 몰골 그림들을 창작하여 내외에 널리 보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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