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화석정에서 필자 김용섭 교수(사진 가운데)와 동료 교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김용섭 교수]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화석정에서 필자 김용섭 교수(사진 가운데)와 동료 교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김용섭 교수]

【뉴스퀘스트=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 기호 유학의 발상지는 파주이다. 파주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교하(交河)지방이다. 지난 11월 1일과 2일 경기도 파주로 4인의 동료 교수 금화(琴和), 송백(松柏), 우경(又經), 가산(佳山)이 함께 1박 2일 일정으로 역사문화 탐방을 다녀왔다.

올 봄과 여름에 영남 유학의 산실인 함양의 남계서원과 산청의 덕천서원 그리고 경주의 옥산서원을 돌아보면서 일두 정여창, 남명 조식과 회재 이언적 선생의 삶과 행적을 살펴보았다.

우경은 일정상 그날 저녁에 합류하기로 하여, 금화, 가산, 송백 3인이 오전에 용산역에서 만나 가산의 승용차로 자유로를 달려 점심 나절에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에 도착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식당을 찾았다. 자운서원 부근 허름한 곳에 ‘콩사랑’이라는 상호의 팻말이 걸려있어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다. 때마침 점심을 먹고 나오는 여성들이 있어 그곳이 식당이려니 하고 들어갔다. 그런데 식당 전체를 남근목(男根木)으로 장식하고 있는데 놀랐고, 음식은 주인이 직접 만든 것으로 정갈하고 맛있어서 또 한번 놀랐다.

기호유학의 성지인 자운서원과 율곡선생 유적지 부근에 이런 식당이 있어 흥미로왔다. 고매한 성리학의 세계도 먹고 사는 문제인 음식남녀(飮食男女)에서 벗어날 수 없어 이곳이 명소(名所)일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호계삼소(虎溪三笑)처럼 함께 웃었다.

이러한 야한 식당에서도 인간본성을 소홀히 하고 도덕군자연 하는 사람의 위선의 탈을 벗어야만 음식의 참맛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로 음식남녀는 인지대욕(飮食男女 人之大欲)이 아닐 수 없다. 공자가 예기(禮記)에서 먹고 마시고 남녀가 만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큰 욕망이라는 점을 밝혔다. 일행은 식사 후에 자운서원 바로 근처 길가의 커피숍에 들려 차를 한잔하고 파주의 역사인물 탐방을 시작하였다.

자운서원 주변은 산세가 부드럽고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 서원 역시 강학공간과 제사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65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율곡 이이, 사계 김장생 그리고 남계 박세채 3인의 대학자의 위패를 모셔놓고 배향하고 있다.

율곡선생 유적지에서 필자 김용섭 교수(사진 가운데)와 동료 교수들[사진=김용섭 교수]
율곡선생 유적지에서 필자 김용섭 교수(사진 가운데)와 동료 교수들[사진=김용섭 교수]

자운서원에 들어가기 전에 율곡기념관에 들려 영상을 시청하고 율곡의 삶과 행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율곡은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수석)으로 합격한 후 29세에 대과에 장원으로 최종합격할 때 까지 9차례의 시험에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는 성리학에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전개하고,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자세로 실천을 강조하는 등 이기이원론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이다.

율곡은 입지(立志)를 하여 사회의 근본적 개혁인 경장(更張)에 지향점을 두고 선조 왕에게 직언과 직간을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동호문답과 만언봉사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제왕학의 교과서인 성학집요와 학생용 입문서인 격몽요결 등의 서책을 발간하였다.

당시 사간원 대사간, 호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 우찬성, 홍문관 대제학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으나 벼슬보다는 학문에 더 큰 뜻을 두었고 서인의 영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수제자인 사계 김장생 등 훌륭한 제자와 후학을 길러냈을 뿐만 아니라 학자의 최고의 영예인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은 판서보다는 정승이, 정승보다는 문형(文衡)으로 지칭되는 대제학이, 대제학 보다는 문묘배향자를 더 영예롭게 생각하는 유학의 나라였다.

자운서원 앞의 율곡기념관에는 그의 모친으로 현모양처의 표본인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草蟲圖)가 전시되어 있다. 자운서원의 뒷편은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 병풍처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자운서원 옆에 있는 율곡선생의 가족묘를 둘러 보았다. 때마침 가을의 단풍이 절정을 약간 지난 시점이지만 노란색의 은행잎과 붉은 색의 단풍으로 인해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족했다.

남향집이 풍수적으로 길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전북 고창의 인촌 김성수의 생가나 성북동 만해 한용운이 기거했던 심우장 등 북향집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율곡의 묘터는 그의 부모 묘터보다 위에 위치하고 있어 역장(逆葬)으로 알려져 있다.

인근의 우계의 묘터도 역장이고, 연산의 사계의 묘터도 역장이다. 이는 정해진 법이 따로 없이 형편에 따라 자유롭게 정하면 된다는 무유정법(無有定法)으로, 명당을 찾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역장이 된 것이므로 예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자운서원을 지나 화석정(花石亭)을 들렸다. 화석정은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정자이다. 율곡의 선대에서 이를 지었다. 화석정 옆에는 율곡이 8세때 지은 시비가 있다.

정자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쓴 화석정 편액이 걸려있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 때 화석정에 들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으나 이항복이 정자에 불을 붙여 활활 타올라 선조의 피난길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러나 이곳 화석정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학자인 율곡, 우계, 구봉이 서로 만나서 교우하면서 학문과 시를 논한 곳으로 유명하다. 구봉과 율곡, 우계는 도의지교(道義之交)로 평생을 함께 하였다. 그들은 서로 생각은 다르나 교학상장(敎學相長)하면서 국가사회를 개혁하려는 포부로 우정을 넘어 대학자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물로 지정된 삼현수간(三賢手簡)은 세 분이 주고받은 서간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파주의 삼현이 서로 오랜 기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은 것을 가장 늦게 까지 살다간 구봉 송익필의 문집에 있던 것을 따로 떼어 삼현수간으로 편집한 것이다. 이것은 현재 삼성 리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삼현수간에는 ‘황강사계창주고가(黃岡沙溪滄洲古家)’라는 인문(印文)이 찍혀 있다. 황강은 사계의 부친 김계휘의 호이며, 창주는 사계의 손자인 김익희의 호이다. 사계 후손이 보관해 오던 문서라고 할 것이다.

율곡과 우계는 대학자이자 훌륭한 인품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구봉 역시 학문적 경지가 높고 당시 8문장가 중의 한분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그 위상이 높다. 삼현수간은 이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진지한 자세, 국가사회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춘추의리정신과 올곧은 자세와 예의염치를 중시하는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다. 화석정에서 임진강을 바라보는 정취도 남다르지만 16세기를 치열하게 살다 간 파주 삼현의 우정의 현장에 잠시 머무를 수 있어 좋았다.

첫날 저녁은 파주의 프로방스를 둘러보고 언덕에 있는 커피숍에서 우경을 기다리며 차를 마신 후에 부근의 한식당에서 4인이 함께 식사를 하고 숙소로 옮겨 새벽 2-3시까지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파주를 오가다 보면 식당 중에 두부집이 많은데 놀랐는데 파주의 장단에서 콩이 많이 산출되는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숙소를 당초 예술인 마을 부근에 예약하였는데, 그곳에서 휴대폰으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다른 숙소에 예약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숙소도 조금 떨어진 곳이라 한적하면서 묵을 만 했다. 여행지에서 겪게되는 이러한 일들도 마치 탱고에서 스텝이 엉기는 것처럼 그 자체가 또 다른 여행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심학산 둘레길에서 잠시 쉬면서 한컷, 필자 김용섭 교수(사진 왼쪽에서 두번째)와 동료교수들[사진=김용섭 교수]
심학산 둘레길에서 잠시 쉬면서 한컷, 필자 김용섭 교수(사진 왼쪽에서 두번째)와 동료교수들[사진=김용섭 교수]

다음 날 아침에 간단히 조식을 마친 후 우리 일행은 심학산으로 이동하였다. 심학산 중턱에 있는 약천사라는 절에 들렸다. 고려시대의 절터에 1932년 중창된 이 절은 높이가 13미터가 되는 청동좌불상이 있다. 13이라는 숫자가 우연치고는 기묘하다. 율곡이 진사초시에 합격한 나이가 13세이고, 사계가 구봉에게 예학을 배우기 위해 파주로 온 나이가 13세이기 때문이다.

율곡은 모친 신사임당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3년간 파주에서 시묘살이를 한 후 1년간 금강산에 입산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던 행적이 있다. 이로 인해 그는 성리학의 탐구에 있어 그 깊이를 더하기도 하였으나, 성리학의 나라에서 동인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율곡은 유학자로서 당시 충분히 문제가 될 법한 이교(異敎)인 불교에의 귀의에 대해 그다지 개의치 않으며 성리학의 고루함을 탈피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위선 없는 인간성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구봉을 떠올리며 우리 일행은 심학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심학산은 산책코스가 잘 마련되어 있다. 산등성이에 올라서니 강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심학산의 정상에 심학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사방이 탁트여 있어 임진강과 한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심학산은 비록 높지는 않지만 거북 모양으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낄 수 있는 산이다. 비운의 천재 구봉이 심학산 자락에 학당을 개설하여 제자를 양성하였다고 하니 그의 혼이 심학산에 서려있다고 생각했다.

부친의 모함으로 천출의 노비신분으로 전락한 구봉이 자신의 비범한 능력으로 예학의 기초를 형성하고 그의 제자인 사계가 스승의 뜻을 받들어 조선의 예학을 완성하였다. 이곳은 사제지간의 정과 의리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이처럼 구봉이 사계 등 제자를 교육한 곳이 심학산 자락 초가집의 싸리문에 정자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봉은 가화(家禍)로 인해 25세의 나이에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으로 나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그러나 그는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문장으로 율곡을 능가한 내공과 학문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제갈량으로 통했다. 사계 부친 황강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학자인데, 서울 정동에 거주하던 13세의 어린 사계에게 예학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파주의 구봉에게 교육을 맡긴 것이다. 자식에 대한 교육을 스스로 하지 않고 친구에게 맡긴 역자지교(易子之敎)의 사례이다.

심학산의 다른 이름이 구봉산이다. 송익필의 호를 따서 구봉산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 아니라 율곡과 우계가 모두 지명으로 호를 사용한 것과 동일하다. 퇴계로와 율곡로라는 도로명에 학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으나, 산의 이름에 특정인의 자를 따서 지칭한 사례는 거의 없다.

그러나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는 중간에 운장산이 있다. 이 산은 19세기 초까지 명칭이 주줄산이었다. 그 산의 이름이 구봉 송익필의 자인 운장(雲長)을 따서 운장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인조반정의 공신들의 상당수가 구봉의 제자라서 한때 구봉은 조선의 숨은 왕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구봉의 제자인 ​사계는 노둔하고 평범한 재질이었으나 꾸준히 절차탁마하면서 천재 학자인 구봉으로부터 근사록과 예학을 배웠다. 대다수 천재의 교육방법이 그다지 자세하지 않듯이, 구봉은 분발하지 않으면 학생을 깨우쳐 주지 않고, 한모퉁이를 들어 올려서 나머지 세 모퉁이를 미루어 짐작하지 못한다면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교육관에 입각하여 학생을 지도한 것 같다.

사계는 그의 스승인 구봉으로부터 13세에서 20세까지 기초를 튼튼히 한 후 20세부터 30세 초반까지는 율곡으로부터, 33세 이후에는 대학자인 우계로 부터도 학문을 배웠다.

심학산 부근에 출판단지가 있지만 예술인 마을의 방문을 놓칠 수 없어 다시 승용차를 운전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아름답게 조성된 헤이리를 이곳 저곳 산책하면서 둘러 보았다. 인사동에 있었던 귀천(歸天)이라는 커피숍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그곳에 들려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귀천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라는 대목이 오래 반추된다. 예술가들이 파주에 많이 살고 있고, 그곳은 서울시민이 쉽게 갈 수 있는 근교 여행지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마지막 행선지로 출판단지를 둘러보았다. 파주 출판단지에 유명한 출판사 대부분이 한 곳에 모여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판단지의 중심가에 ‘지혜의 숲’이라는 공동서재가 있어 서가에 꽃혀 있는 오래된 서적을 살펴보았다. “여행은 서서하는 독서이고, 책은 앉아서 하는 여행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곳이 여행과 독서가 동시에 가능한 곳이 아닌가 한다.

율곡은 높은 벼슬의 관록도 좋았지만 학문의 경지가 높았다. 우계는 과거시험은 보지 않았으나 학문이 심원하고 후에 관직에 추천되어 이조 참판 등 벼슬에 잠시 나아갔다. 구봉은 재능과 학식이 높았지만 신분 때문에 벼슬에 나아가지 못했으나 서인의 지략가로 통했다.

세 사람은 이렇게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도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정신세계는 직(直)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통상 호를 부르는데, 자(字)를 부르기로 한 것은 특이하다.

율곡의 자는 숙헌(叔獻), 우계의 자는 호원(浩原), 구봉의 자는 운장(雲長)이다. 율곡은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서 서울 청진동 부근에서 살았고, 우계는 그의 부친 청송 성수침과 함께 서울 북악산 아래 서촌에서 성장했다. 구봉 역시 어린 시절 서울에서 성장했고 훗날 파주 심학산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이처럼 파주가 이들 삼현의 출생지는 아니다.

율곡, 우계 그리고 구봉이 활동하던 16세기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을 보아 출사(出仕)한다는 것이 입신양명의 순로로만 여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붕당과 외척의 발호, 권간의 상소에 의하여 벼슬길이 순탄하지 않는 상황에 놓이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계의 스승은 앞서도 밝힌 바 있듯이 대학자인 구봉, 율곡, 우계 3분이다. 사계는 다른 세계에 한눈팔지 않고 학자의 길에 매진하면서 제대로 학문을 전수받았다. 그리하여 아들 신독재 김집을 자신의 제자로 삼아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 국사무쌍(國士無雙)의 인재를 양성하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사계는 구봉 송익필의 영향을 크게 받아 예학을 연구하고 집대성함과 동시에 가례집람, 상례비요, 의례문해 등 예학서를 저술하였고, 율곡과 우계의 영향을 받아 경서변의 및 근사록석의 등을 저술하였다.

그는 조선예학의 태두가 되었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아들 신독재와 함께 부자가 문묘에 배향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스승인 우율(牛栗)과 그의 제자인 양송(兩宋)과 함께 6분이나 문묘에 배향되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을 이끌어 가는 것은 구봉과 같은 천재이지만 이것을 완성시키고 계승하는 것은 사계와 같은 평범하지만 오랜 기간 끈질기게 절차탁마한 사람의 몫이다. 사계는 3분 대학자의 학문을 잘 승계하여 기호유학의 사승관계의 큰 흐름을 형성하여 청출어람(靑出於藍)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 파주여행의 성과는 파주지방에서 기호유학 학맥의 사승관계(師承關係)의 원류를 찾은 것이다.

이번 파주여행의 또 다른 성과 중의 하나는 선비정신의 탐구에 있다. 선비정신은 우리의 전통문화이다. 이러한 선비정신은 가치관이 혼탁한 오늘날 계승발전하고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선비는 학식과 덕망을 간직하며 이를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선비는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예의란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고, 염치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바로 그 잘못을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태도를 말한다.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는 동안 탄핵상소를 받아 여러 차례 사직상소를 내렸으나 당시의 왕인 선조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 번째 사직상소에서 “전(傳)에 이르기를, 예의염치는 사유(四維)라고 하는데, 사유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으니 병조판서는 없을 수 있으나 사유는 없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사직을 간청하였다.

그럼에도 선조는 율곡을 계속 중용하려는 비답을 내렸다. 여섯 번이나 사직상소를 전달한 후에 율곡은 “유학자는 나아가고 물러가기를 구차하게 하지 않아서, 예로써 나아가고 의로써 물러갈 뿐이요, 선비가 되기를 목표로 삼지 않은 적이 없으나 선비로서 염치가 없다면 어찌 선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처럼 예의염치는 선비의 중요한 덕목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사 선생의 대련 중에‘대팽부두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가 있다. 이는 최고의 음식은 두부와 오이, 생강, 채소라는 뚯이다. 파주 여행을 마치고 일행이 서울로, 전주로, 대구로, 군산으로 각자의 집으로 헤어져 돌아가기 전에 심학산 중턱의 두부집에 들렀다. 일정이 있어 파주출판단지에서 먼저 헤어진 송백을 제외한 우경, 가산, 금화 3인이 일미(一味)의 해물 두부탕을 들면서 파주기행의 대미(大尾)를 장식하였다.

후기(後記)이지만, 서원 등 한국의 정신문화를 탐구하면서 최근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율곡과 퇴계 선생의 성리학 비판론이 등장하고 있어 한마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성리학을 마치 모화사상으로 치부하고 붕당과 당쟁이 망국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는 견강부회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성리학은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깨우치는 학문이며 조선의 정치이념이다. 사림세력간에 건강하게 공론을 유지하면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관하여 대립하는 동안에는 국가체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갈등구조가 오히려 조선 정치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였다고 할 수도 있다. 영·정조 시대의 탕평책으로 인해 당쟁이 그친 정치적 진공상태에 외척이 발호한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오히려 망국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 조선 성리학 그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고식적인 성리학의 이념에 매몰되어 상대 세력을 용인하지 않고 포용과 개혁개방으로 나아가지 않은 지배층의 무능과 폐쇄성이 조선 패망의 길을 가속화 하였다고 할 수 있다.

◆ 김용섭 박사 프로필

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변호사)

- 경희대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
-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 졸업 (법학석사)
- 제26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16기 수료
- 독일 만하임대 대학원 졸업 (법학박사)
- 법제처 행정심판담당관
- 한국법제연구원 감사
- 법무법인 아람 구성원 변호사
- (현) 전북대 법학전문대학교 교수, 변호사
- (현) 국회 입법지원위원, 대한변호사협회 법제위원회 위원
- (현) 한국행정법학회 회장, 한국조정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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