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가을'...가을 끝자락에서 유순한 정서와 낭만적 감성 흩날려
'봄의 여인'...어디론가 나들이 가는 중에 이름 없는 들꽃 한 손에 살며시 잡고 향기 음미
'자화상'...고흐의 자화상에 비견될 만큼 국내 1세대 화가 중 가장 인상 깊은 강렬한 자화상

【뉴스퀘스트=정형렬 갤러리피코 대표 】

자식을 기다리는 노인 (53-35.5 1953년)
자식을 기다리는 노인 (53-35.5 1953년)

▲자식을 기다리는 노인(53-35.5 1953년)

한 손에는 손전등을 치켜들고 다른 손은 지팡이를 짚고서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며 한 노인이 서 있다. 자식이 행여나 노인의 모습을 발견하리라는 기대감에서 파도가 덮칠듯 넘실거리는 위험한 바닷가 코앞에서 손전등을 켜고 그 자신이 등대가 되어 있다.

이 작품은 1953년작으로 6.25전쟁이 끝나는 시기에 그려졌다. 6.25전쟁통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자식을 기다리다 못해 이제는 발벗고 나서서 맨발로 헤메는 노인의 모습이 참으로 가슴 아프고 처연하다.

요즘에도 치매 노인들은 맨발로 도로를 활보하는 사례들이 발견된다. 무언가에 넋을 잃고서 찾아나서는 경우나 외출 후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치매노인들의 행색에서 자신의 신발이 불편한지 벗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그림 속 노인이 치매 상태인지 모래사장을 지나다니기 편리하도록 신발을 벗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전쟁 중에 자신의 자식이 행방불명되어 이제나 저제나 오려나 하는 애타는 마음을 눈물로 삼키며 노인은 오지 않는 자식을 마냥 기다리며 세월을 흘려보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 분명하다.

자식을 찾다가 혹시 저세상에서 기다리는 자식 곁으로 함께 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걸어다닐 힘이 있는 동안은 이 바닷가를 끊임없이 배회하는 행위를 택할 것이다. 흰 두건을 머리에 동여메고 머리결이 세찬 바닷바람에 흩날려 자신의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단단히 장기적인 태세를 갖추고서 흰수염을 길게 늘어뜨리며 하얀옷을 차려 입고서 자신의 존재를 멀리서라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현명하게 자신의 차림새를 고안하였다.

이 즈음 시기에 그려진 김석룡의 할아버지에 관한 그림 이야기(해방전 이야기 1957년작)에 관련된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의 해설을 곁들인다. ‘거의 과반생을 고생속에 살아온 생활의 흔적이 역력한 할아버지의 주름잡힌 얼굴과 못이 박힌 손, 구불사한 어깨는 눈을 내리 깔고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심중한 얼굴 표정과 어울리면서 한 인간의 운명 문제만이 아닌 당시 우리 인민이 당한 착취상을 예측케 하고 있으며 그러한 일이 절대로 되풀이 돼서는 안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중략) 손자와 손녀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심중한 마음의 가책과 각오를 다지고 있다.’

농촌의 가을(37-29 연대 미상)
농촌의 가을(37-29 연대 미상)

▲농촌의 가을(37-29 연대 미상)

이 그림은 서구의 인상주의 명화 한편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시원하게 펼쳐진 하늘, 언덕 위에서 아련하게 황토색 흙에 접목되어 있는 땅의 사람들, 가을 들녘의 풍요를 상징하는 건초더미들과 태양을 향해 맞닿을 듯 솟아오른 전봇대와 하늘을 가로지른 전선줄들과 노란색의 꽃향기와 연록의 풀냄새를 피우며 잡힐 듯이 드리운 전경들은 가을 끝자락에서 유순한 정서와 낭만적 감성을 흩날리고 있다.

땅에서 벌어진 한해의 일을 마무리하며 큰 개미처럼 땅에 밀착되어 부산하게 움직이는 농군들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땀을 식히고 땅을 정성스레 고르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다이아몬드형의 태양 본체에서 광선이 뿜어나오고 태양열이 이글거리는 하늘 화면이 전체의 80프로를 지배하고 있다.

태양은 바람개비처럼 휘돌면서 광선을 하늘 주위와 지상을 향해 무차별 살포하고 있고, 거대한 창날처럼 빛의 한 파편을 지상에 내리 꽃고 있다. 마치 화가 고흐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별빛과 달빛을 하늘 위로 떠다니는 배처럼 쏟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화가는 빛의 입체감과 색면의 양감 및 질감을 살리기 위해 태양빛의 마띠에르를 대담하게 돌출시키고, 노란색의 열선과 어슴푸레한 구름의 명암을 점점이 태양빛 속으로 잠입시켜 놓았다. 그 빛을 감싸안고 있는 하늘은 갖은 청보라 색조들의 색파장을 너울거리며 하늘 중심의 세상을 전개하고 있다.

꿈틀꿈틀 움직거리고 진동하는 하늘은 보라색과 하늘색이 구름의 흰 물감 속에 풀어져 뒤범벅되어 온전히 뒤섞이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미완의 하늘로 남아 있는 것처럼 강렬하고 진한 여운을 던져주고 있다.

거대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지상의 피조물들은 하늘과 태양을 경배하기 위해 제단을 세워놓고 성상을 땅에 깊이 심어 우뚝 솟아 올리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의 비유적인 분위기는 건초더미가 그 제단이요, 전봇대가 그 성상이라고 느껴지는 경건함과 하늘에 대한 고마움의 정이 깨끗하고 진하게 흐르고 있다.

거대한 하늘의 화면 부피를 다소 가리어 하늘과 지상의 불균형을 상쇄시키고 자연과 인공물의 조화를 꾀하려고 시도한 화가는 전봇대를 하늘과 대비시키려는 듯 과장되게 키워놓았다.

한편 불안하게 치솟아 올라간 전봇대 한쌍은 그 맞은편 두 개의 건초더미와 대칭을 이루어 균형을 이루고 있다. 태양과 전봇대 그리고 건초더미는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어 안정감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거미줄처럼 살며시 뻗어 있는 전신주의 전선줄 두세 갈래가 하늘의 공백을 어루만지며 허전한 공허감을 달래주고 있다. 대가의 노련하고 절묘한 기획 배치라고 볼 수 있다.

봄의 여인(37-25 1964년)
봄의 여인(37-25 1964년)
자화상(5호 1967년)
자화상(5호 1967년)

▲봄의 여인(37-25 1964년)과 자화상(5호 1967년)

바탕색조가 은은한 빛깔의 향연으로 너울거린다. 곱고 감미롭게 퍼져 있는 다채로운 색상들이 봄의 아지랑이처럼 하늘하늘 부드럽게 피어오르며 생동하는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색채와 형상의 조형미를 환상적이고 능숙하게 표현하기로 정평난 대가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그림이다.

연분홍과 연보라빛, 연록색 그리고 옅은 하늘색의 밝은 색조의 이미지들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거리고 바탕에 심어놓은 갖가지 꽃들이 은연중에 만발할 것처럼 약동하는 봄기운이 잠복해 있어 봄의 화사함을 고조시켜 가고 있다. 화면 가장자리에 삐져나온 숲 속의 녹색 잎새들은 봄의 여린 색조에 물들어 잠겨 있고 화면의 공간감을 확산시키고 있다.

봄의 여인은 어디론가 나들이를 향해 가는 중에 이름 없는 들꽃을 한 손에 살며시 잡고 끌어당기며 향기를 음미하고 있다. 여인의 몸은 대각선으로 비틀려 있으면서 꽃에게로 무게중심이 기울어 있어 여인의 전진하는 발걸음이 빚어내는 운동감을 포착한 스냅사진처럼 보인다. 목도리를 흩날리며 목적지를 향하여 바쁘게 잰걸음을 옮기는 장면과 꽃에게로 다가가는 여심이 미묘하게 갈등을 이루며 멈칫거리고 있는 화면이다. 작가는 인물 묘사 중 얼굴의 근육과 면분할된 빛의 반사 음영들을 중첩시키면서 유화의 터치감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이렇게 입체감을 물씬 드러내는 투박한 얼굴이지만 희열감이 서서히 차오르며 희망을 피우는 밝은 표정이 미묘하게 어려 있다.

왼쪽 어깨에 얇은 막대기를 둘러 메고 근로자 복장 차림을 하고서 무언가 신바람 난 듯이 걸어가는 여인의 몸짓에서는 당당하면서도 힘찬 기운이 새록새록 솟아나고 있다. 작가의 순수한 개인적 감수성과 사회주의 운동(당시 천리마운동) 추진을 현장에서 체험하면서 고무된 사명감이 자연스럽게 혼합되어 녹아든 심정이 함께 묻어난다.

김석룡의 인물 묘사는 중후함과 섬세함을 동시에 추구하여 인물의 표정과 눈빛 속으로 관람자를 몰입시켜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두고두고 음미하게 만드는 마력이 스며 있다. 내가 지금껏 본 우리나라 1세대 화가 자화상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강렬한 자화상을 꼽는다면 아래 그림의 고흐 자화상에 비견되는 김석룡 자화상이다. 그 눈빛은 우수와 비탄에 젖어 있지만, 이글거리는 정열이 활화산처럼 불타오르고 있다.

김석룡 화가 
김석룡 화가 

◇김석룡(1922-2004)은 누구인가?

1세대 화가의 막내군에 속하는 화가는 북한미술계에서도 손꼽히는 노력파와 실력파라는 평가를 들으며, 문학수와 함께 가장 헌신적이며 열정적인 미술교육자로 칭송받았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은 말한다. ‘김석룡은 대학 초창기부터 오랫동안 교단에서 교원, 강좌장, 학부장 사업을 하면서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후대교육사업에 다 바친 우수한 교육자였다.

그는 성격이 온순하고 침착하지만 학생들에 대한 요구성이 매우 높았다. 그는 실기교육에서 엄격하였다. 기량이 높았던 그의 소묘는 매우 정확하였다. 그는 연필을 뾰족하게 깍아 면과 면, 부분과 점들까지 투명하고 명확하게 그릴 것을 요구하였다. 소묘에서 멋을 부리며 자신을 기만하면서 어물어물 해보려는 경향은 허용될 수 없었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문학수와 김석룡이 교육자로서 쌍벽을 이루는 대목이 언급되듯이 정관철이 변월룡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북한에서 미술품들이 거래되는 시장이 55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례를 입증하는 두 화가 관련 대목들이 등장한다.

“문학수 동무는 이번 나와서 그림값(평양시 복구 건설을 지도하시는 김일성 원수 작품)을 좀 받아 가지고 부인의 봄 스푸링 멋진 것(소련제)을 하나 사 가지고 갔다.”라거나 “김석룡 선생의 <류벌공의 노래>는 시원해서 대중들이 퍽 좋아합니다. 벌써 이 그림은 주을 휴양소에서 샀습니다. 제일 먼저 팔렸습니다.”라는 재미있는 사례들이 튀어나온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다룬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와 참교육자로서의 품성에 얽힌 일화를 전한다. “그의 작품은 시대적 요구에 예술적 해답을 주기 위한 창작가의 깊은 사색과 열정, 꾸준한 노력과 진지한 창작 태도에 의하여 명화로 훌륭하게 창조되었으며 높은 사상예술성으로 하여 국내외의 전시과정을 통하여 인식교양적 기능과 우리 미술의 높이를 시위하는데 기여하였다. (중략)

그는 1975년부터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현지 체험을 하였다. 회령시에서도 어린이들에 대한 미술교육을 중단하지 않았다. 저녁이면 그의 집 웃방에 각이한 년령의 그 일대 아이들이 모여 머리 흰 동네 늙은이의 강의를 받군한다. 그들은 이 노인이 얼마나 수준있는 노미술가라는 것을 잘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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